목사님, 자살하면 지옥에 가나요?

날짜: 
2008/10/25
설교: 

민11:10-15 목사님, 자살하면 지옥에 가나요?
예수님을 갓 믿으신 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제법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날그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자기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으려고 상당히 애를 쓰는 분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큐티 즉 말씀을 통한 묵상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매일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말씀의 방법은 좀 색달랐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경을 앞에다 놓고 “주여, 믿습니다.” 하고 성경책을 펼칠 때 자기의 눈에 처음 들어오는 구절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날도 이 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성경을 앞에다 놓고 “주여, 믿습니다.” 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날 펼쳐진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27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첫 눈에 띠인 구절은 5절의 구절이었습니다. 그 구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라.”
이 분은 도대체 이 구절을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지 좀처럼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지금 상당히 괴로운데 혹시 하나님이 가룟 유다처럼 나도 목메어 죽으라고 하는 소린가?” 그렇게 고민하면서 이 분은 “에이,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서 다시 한번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펼쳐진 성경은 누가복음 10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구절은 37절이었습니다. 그 구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구절을 본 순간 이 분은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나도 가룟 유다처럼 진짜 목메어 죽으라고 하는 건가?” 이 분은 너무너무 고민을 하다가 “그래, 삼세번이란 말이 있는데.... 다시 한번 성경을 펼쳐보아서 그 때도 이와 같이 목메어 죽으라는 말씀이 나오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자.” 이렇게 생각하고 그 분은 다시 한번 더 성경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펼쳐진 성경은 요한복음 13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처음 띠인 구절은 27절이었습니다. 그 구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구절을 본 순간 이 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그날 하루 종일 우울했습니다. 밥맛도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이 분은 그날 펼쳐진 성경대로 목메어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스개 소리지만 제법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무당이 점치는 식이나 미신과 같은 방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경에 나온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도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만연한 자살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최근에 한국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으로 인해 한국은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도 목사님들도 종종 자살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토론의 핵심 중의 하나는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 중에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묻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자살하면 지옥에 가나요?”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이 질문이 상당히 심각한 질문인 줄 알지만 질문한 상대방이 자살에 대한 염려가 전혀 없는 분인 것을 알면 웃으시면서 그 분에게 이렇게 되묻기도 합니다. “왜요, 자살해도 지옥가지 않으면 한번 해보려고요?”
이러한 말에 그 성도가 웃으면서 “아니 목사님, 제가 왜 자살합니까? 나는 아직도 죽어서는 안된다구요.”라고 대답하면 좋지만, 반대로 그 분이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목사님은 “아차! 이 양반도 위험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도님이 요즘 혹시 어려운 일이 있지 않나 주의 깊게 살피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살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를 보면 한국의 경우 일 년에 자살하는 사람이 12,174명입니다.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2007년 죽은 자들의 원인을 볼 때 자살은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에 이어서 사망 원인 4위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뇨병보다 높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자살을 생각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살을 시도를 했지만 죽지는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살의 위험은 기독교인들도 예외일 수가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특히 최근에 자살한 연예인들 중에는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간증을 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소식을 들으면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살을 한 기독교인은 진짜 믿음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때때로 믿음의 위인들도 아주 힘든 상황이 자신에게 닥쳐올 때 자살의 충동을 느낀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속을 섞이고 불순종하니까 하나님께 자기 좀 죽여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고백이 오늘의 본문 민수기 11장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데 구하옵나니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종합영양제와 같은 만나를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만나는 지긋지긋하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심정은 이해가 가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가 안가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나를 40년간 먹으면 싫증도 나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밥을 죽을 때까지 먹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반찬은 계속 먹으면 싫증이 나는데 밥은 계속 먹어도 싫증이 안납니다. 주식이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다가 싫증이 났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솔직히 이렇게 기도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 지금까지 만나를 주셔서 저희들이 이 광야에서 굶어 죽지 않고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번쯤은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만나가 좀 싫증이 납니다. 이제는 고기가 좀 먹고 싶습니다. 하나님, 고기 좀 주실 수 없나요? 물론 이곳은 광야이기에 고기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겠지만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식으로 선하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울고불고 원망 불평을 하며 싸우듯이 말합니다. “아니, 애급에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괜히 이곳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내서 만나만 지긋지긋하게 먹으라고 하고.... 에이, 차라리 애급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곳에서는 정욕에 좋은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마음껏 먹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불평의 말을 들은 모세는 기운이 탁 빠졌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하여 힘들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가야할 생각을 하니 참으로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한심해졌습니다. 도저히 살 맘이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그들의 요청을 들어줄만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제 스트레스를 받다가 모세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탈출구로 신앙의 위인이 모세도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죽음을 생각한 사람이 비단 모세뿐만이 아닙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는 욥도 모든 재산을 잃고, 자녀들도 죽고, 자신의 몸도 악창이 생겨 큰 고통 가운데 거하자 마침내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또한 앞날의 가망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만 피곤하고 지쳐 하나님께 자신을 좀 죽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렇듯 자살의 충동은 비단 불신자들만이 겪는 고통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자살의 충동이 생길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경우에도 여의도 성전을 짓다가 오일쇼크로 말미암아 재정적인 어려움이 다가오자 여의도 초원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을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도 보면 어떤 학생이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자 그것을 비관하고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그리워하며 그 아버지도 뒤따라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닌 시절이었습니다. 친구가 경기도에 있는 모 부대에서 근무하기에 면회를 몇 번 갔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편지도 몇 번 썼습니다. 그런데 그 부대에서 제 친구가 아닌 다른 사병에게서 이상한 편지가 저한테 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연애편지였습니다. 자신은 지금 무척 외롭다는 것입니다. 꼭 답장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그 부대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 겉봉투의 이름과 주소를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 여자 이름 같아 보여서 저에게 연애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받아 보고 “햐, 웃긴 녀석이다!” 하고 그냥 웃어 넘겼습니다. 물론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부대에 또 다시 친구에게 면회를 가서 물었습니다. “야, 너희 부대에 아무개 병사가 있냐?” 그러자 그 친구가 놀라면서 되묻습니다. “아니, 네가 그 아이를 어떻게 아냐?” “왜 그 친구 이상한 아이냐?” “응, 그 애 며칠 전에 보초 나갔다가 총으로 자살해 죽었어!” 저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편지를 쓰면서 외롭다고 할 때가 자살의 위기였었구나!”
여러분, 사람은 고통스러운 문제를 만날 때,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없고, 자기를 도와줄 아무런 사람도 만나지 못할 때, 죽음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시는 분인 줄을 확신하고, 또한 외롭고 힘들 때에 하나님이 더욱 자신과 함께 해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기에 자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의 순간적인 충동감으로 인한 불행은 때때로 믿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자살이 믿는 사람에게 이루어질 때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합니다. 물론 사람이 구원을 받고 못받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다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인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한 것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일입니다. 그 당시 루터는 면죄부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교리를 전면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그의 외침은 당시 가톨릭 사람들에게 상당한 쇼크였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세례, 성찬, 고해성사, 고행, 그리고 행함과 같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구원의 조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함과 같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오직 믿음 한 가지만 있으면 되는 줄 깨달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살과 구원의 문제도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자살은 일종의 살인행위입니다. 큰 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해준 법밖에 없습니다. 고로 누구나 자기를 죽이든 타인을 죽이든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빼앗는 살인을 해서는 안됩니다. 고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자살에 대한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장례를 치러주지도 않았습니다. 기독교 묘지에 묻히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의 남은 재산은 몰수를 했습니다.
오늘날도 개신교 교파들 중에는 성도가 자살하면 장례를 치러주지 않는 교단도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자살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중세적인 교리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살에 대한 중세 시대의 교리는 이러했습니다. 첫째, 자살은 용서받지 못할 성령훼방죄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이 성령훼방죄라는 근거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둘째, 다른 죄는 죽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자살은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으므로 구원을 못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자신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한 공로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뿐입니다. 만약 특정한 죄를 회개했느냐 못했느냐에 근거하여 구원이 결정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각해보세요. 항공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비행기가 미사일을 맞아서 회개할 시간을 갖지도 못하고 죽은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치매에 걸려서 자기가 한 잘못된 행동들을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많은 신자들은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과거에 범한 죄가 죄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의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는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님들에게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실이 아닌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성도님들을 설득하여 자살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보다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명감을 느끼게 하면 순교는 할지언정 자살을 택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자살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복음의 능력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살이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살의 충동을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자살의 충동을 느낀 모세나 욥이나 엘리야를 자살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사명을 주시고, 회복을 시켜주셨습니다. 아무쪼록 어려운 외국 생활에서도 자살하지 마시고 꿋꿋이 승리하시며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