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날짜: 
2009/01/10
설교: 

시103:8-15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한국과 캐나다의 목회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는 한국보다 장례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젊으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장례식을 치루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정을 끊는 슬픔을 보게 됩니다. 물론 자녀가 부모의 죽음을 대하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죽어서 부모가 자녀의 장례를 치룰 때에는 참으로 큰 슬픔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일을 직접 당한 부모는 "왜 나보다 네가 먼저 가느냐?"고 통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녀를 무덤에 묻지 못하고 평생 마음에 묻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심령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죽으셨습니다. 자녀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토록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하셨을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대신하시고 죽으시므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특별한 의로움도 있는 것이 아니고, 똑똑하지도 않고, 잘나지도 않은데 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까지 죽도록 하셨을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죄값으로 말미암아 지옥 속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당할 것을 불쌍히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죄인들, 창녀, 세리, 귀신 들린 자, 과거가 좋지 못한 자, 문둥병자, 상처 입은 자, 버림당한 자, 고아, 과부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어떤 대가를 바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 세상에서 천대 받고 고통을 당하며 살다가 저 세상에서도 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고통 속에 빠지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데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우리들을 이 외국 땅에서도 귀찮게 하려는 것입니까? 시간, 돈, 에너지 뺏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감추어진 참 평안과 행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이런 것들을 나에게 주느냐고 계속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103:8-15)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 이 큰 사랑과 구원을 얻었은즉 우리도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문화와 인종과 언어가 다른 이국땅에 와서 자기 새끼들과 살기 위해 버둥버둥 대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몇 마디 영어 더 배우겠다고 이곳에 왔지만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방황하는 유학생들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이렇게 온 사람은 이렇게 불쌍하고, 저렇게 온 사람은 저렇게 불쌍합니다. "저 사람은 가진 것이 있어서 불쌍하지 않겠지!" 하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도 역시 불쌍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민생활과 유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같은 동포로서, 혹은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한국에서 살았을 때에는 한국에서 사는 외국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하게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막상 내가 이곳 외국 땅에서 이런 저런 슬픔과 고통을 겪고 살다 보니 그들에 대해서도 연민의 정이 생깁니다. 그리고 "아- 내가 한국에 다시 가면 그들 외국인들에게 잘 해주어야지!"라는 마음도 생깁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23:9) 여러분, 과부가 홀아비 사정을 생각하듯이, 노처녀가 노총각의 마음을 생각하듯이, 나그네가 나그네 마음을 알아주듯이, 이민자가 이민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유학생이 유학생의 마음을 알아주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합심기도 제목 중의 하나는 "새신자에게 좋은 친구가 되게 하소서!"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좋은 친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강도는 나그네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그 나그네를 거의 죽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제사장이 그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았습니다. "아이쿠, 여기 강도가 나타났구나! 빨리 도망가자!" 그 제사장은 그 자리를 황급히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인이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레위인은 오늘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아니, 이 사람, 강도를 만났구먼! 무슨 죄가 그리 커서 이런 재앙을 당했는가? 에이, 바르게 좀 살지!" 하며 그 강도 만난 자를 질책하며 그냥 그 자리를 지나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가는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인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혼혈민족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종하기를 꺼리는 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강도 만나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를 자기 말에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내가 올 동안 잘 돌보아 주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만약 돈이 더 들면 내가 다시 와서 계산해 주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정도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되겠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예,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합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자비를 베풀어서 강도 만나 자의 참 이웃이 되어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누가 새신자에게 참 친구가 되겠는가?" "예, 자비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는 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 불쌍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먼저 이민 온 사람은 나중에 이민 온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고, 영어 잘하는 사람은 영어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고, 자기 차가 있는 분은 차가 없어 고생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고, 목사는 성도를 불쌍히 여기고, 성도는 목사를 불쌍히 여기고,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그리고 서로를 불쌍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저는 외국 땅에 있으면서 가끔 통곡을 하고 울기도 합니다. 특히 캘거리의 겨울은 춥기도 하지만, 길기도 참 깁니다. 어두움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이 됩니다. 그 가운데 감정이 한번 북받치면 이곳은 외국 땅이기에 더욱 감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옛날 우리 한국 조상들이 일제 압박 시대에 불렀던 금지곡 1호가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 어언 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이 '봉선화'라는 노래는 홍난파 작곡에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당시 울밑에서 핀 봉선화는 마치 민족의 슬픈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봉선화'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입니다. 지금은 여성들이 손에다 매니큐어를 바르지만 옛날 우리 한국의 여성들은 이 봉선화 꽃잎을 으깨어 손톱에 묶어서 물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물들인 손톱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울밑에 핀 가련한 봉선화를 보면서 그 당시 민족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듯이, 그리고 나와 너의 처량한 모습을 노래했듯이, 우리는 이곳 외국 땅의 기나 긴 겨울철의 캄캄함과 적막감 속에서 서로의 불쌍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가족이 머나먼 땅, 추운 땅까지 와서 자기의 육신을 불사르며 이 땅을 떠날 때에 우리는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너와 내가 불쌍한 인생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함이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느니라.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3-16)
여러분, 이곳 외국 땅에 오실 때에 한국에서든지 혹은 어디에서든지 왜 슬픔이 없었겠습니까? 왜 눈물이 없었겠습니까? 새로운 희망의 삶을 살아보려고 이곳에 오기 위해 우리는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추운 겨울이 있는 동네입니다. 알라스카에서 내려오는 북풍이 몰아치는 곳입니다. 이곳 역시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이곳에도 사망이 있습니다. 이곳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이곳에도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기 위해 버둥버둥 대는 너와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즉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마5:7)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저히 값을 수 없는 그 빚을 다 청산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만 달란트나 큰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나가서 자기에서 백 데나리온 밖에 빚지지 않은 자의 멱살을 붙잡고 옥에 가둔다면 되겠습니까? 자기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면 자기도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서로 불쌍히 여겨라."(엡4:32)
부모는 자식을 불쌍히 여깁니다. 못난 자식일수록 부모에게는 더욱 불쌍합니다. 자식이 지체장애자나 정신장애자이면 부모는 그 애가 더욱 불쌍하여 평생토록 그 자녀를 뒷바라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네가 부모의 죄 대문에 고생이 많구나!" 하면서 그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그 애도 나중에 흙으로 돌아가고, 나도 흙으로 돌아가는 불쌍한 인생임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그 모습 그대로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찬338, 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