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과 초막절

날짜: 
2010/10/10
설교: 

레23:33-43 추수감사절과 초막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5:39) 즉 구약 성경은 신약의 예수님을 설명하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의 레위기 23장은 절기장이라고 하는데 이도 역시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렇습니다.
제1절기 : 유월절(레23:4-5)------그리스도의 죽음
제2절기 : 무교절(레23:5-8)------그리스도와의 친교
제3절기 : 초실절(레23:9-14)-----그리스도의 부활
제4절기 : 칠칠절(레23:15-22)----그리스도와 성령의 교제
제5절기 : 나팔절(레23:23-25)----그리스도의 성도 부름
제6절기 : 속죄절(레23:26-32)----그리스도의 속죄
제7절기 : 초막절(레23:33-43)----그리스도의 성도 추수
그런데 추수감사절은 오늘 본문의 초막절에 해당합니다. 초막절이 주는 교훈이 바로 추수감사절에 주는 교훈입니다. 초막은 어떤 집입니까? 초막은 글자 그대로 풀로 얼기설기 만들고 과일들을 달아놓은 한국의 원두막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 옷이 흰 눈보다 더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베드로는 왜 예수님에게 궁궐을 짓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큰 저택을 짓자고 하지 않고, 하필이면 초라한 초막을 짓자고 했을까요?
단지 높은 산에 크고 화려한 궁궐이나 저택을 짓기에 힘이 들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초막은 역사적 의미와 함께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추수감사절 즉 초막절이 되면 초막을 만들어 놓고 그 초막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구약의 추수감사절의 상징인 초막절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추수감사절에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비롯해 모든 나라들의 추수감사절은 글자 그대로 추수하는 절기입니다. 한국의 추석이나 이스라엘의 초막절도 역시 추수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풍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을의 풍성한 추수가 있기 전에 농부가 이른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땀을 흘리며 가꾼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농부의 심음이 없었고, 노력과 땀이 없었다면 오늘의 풍요로운 추수감사절은 결코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심지 않으면 추수감사절은 오히려 비참한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즉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심고 거두는 법칙은 땅의 법칙인 동시에 하늘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한국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은 개떡같이 심었는데 찰떡을 바라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즉 좋은 것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것을 심어야 합니다. 이곳 캐나다에 오시는 분들 중에 영어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들이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는 안하고 만날 딴 짓만 하고는 영어를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6-8)
어떤 분은 심고 거두는 법칙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며 이렇게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고, 공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아무 것도 심은 것이 없지만 그냥 구원과 천국을 얻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크리스천들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그 법칙을 역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 우리들은 구원과 천국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 결국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즉 우리는 구원의 열매를 얻기 위해 아무 것도 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의 씨를 심으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결과 나는 살았습니다. 즉 농부가 심었고 농부의 아들이 그 열매를 대신 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고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4:37-38)
즉 심기는 이 사람이 심었는데 따먹기는 저 사람이 따먹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심었습니다. 그 결과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를 자녀와 자손들이 따먹습니다.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즉 심고 거두는 법칙은 그 즉시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결국 때가 되면 법칙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2. 추수감사절에는 심판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초막절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절기입니다. 초막은 한국의 원두막 같은 것입니다. 원두막인 초막에는 알곡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습니다. 그리고 쭉정이는 밖에서 불태워 버립니다. 이것이 초막절입니다. 그래서 초막절 즉 추수감사절은 심판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이 땅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소개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0-12)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과 자비를 베푸시는 구원자로 일하시고 있지만 그날이 오면 예수님은 심판주로 재림하게 됩니다. 즉 알곡 같은 신자는 천국 창고에 모아들이지만 쭉정이 같은 사람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 즉 추수 감사절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에는 과일이나 새 곡식을 먹으면서 그 맛만 느끼지 말고 심판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어느 판사가 길에 지나가다가 물에 빠져 죽으려는 한 사람을 건져주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물에서 건짐 받은 그 사람이 살인을 하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법정의 판사는 자기를 물에서 건져준 그 판사였습니다. 죄인은 판사가 자기와 친분이 있는지라 안도의 한 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재판장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전에도 내 생명을 살려 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때 재판장은 준엄하게 말했습니다. "오냐. 그 때는 내가 너를 구해준 구세주였으나 지금은 너를 심판하는 심판주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심판주가 되셔서 생명과 죽음을, 양과 염소를, 지옥과 천국을, 어둠과 광명을 엄격하게 갈라놓으실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때는 뇌물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물과 사정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꼭 하나 정확하고 냉정한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사람들은 종종 의인이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며, 선인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도대체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냐? 이런 사람 잡아가지 않고?"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악인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심판할 때가 아닙니다. 악인도 죄인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구원의 때요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오면 알곡은 거두어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던지게 됩니다. 고로 초막절, 추수 감사절, 즉 추석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3. 추수감사절에는 천국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 감사절, 즉 초막절에 초막을 짓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기억하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7일간의 초막절이 되면 초막에서 지내면서 애급에서 나그네 되었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땅은 나그네 땅이며 우리가 가야할 곳은 영원한 천국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그네 인생이 끝마치면 본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이 나그네 의식이 강하였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에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은 이 나라 저 나라, 이 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1948년 그들이 다시 독립할 때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남아 살고 있는 이들도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항상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모두 나그네 인생입니다. 한국에는 이런 흘러간 옛 노래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노래는 세상 노래인데 꼭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는 찬송가 가사와도 같습니다. 혹 이 노래를 아시는 분은 찬송가 부르듯이 같이 불러볼까요?
여러분, 인생은 나그네이기에 나그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는 언제가 본향으로 가야 합니다. 고로 우리는 늘 본향으로 갈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여러분, 초막절 즉 추수감사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나그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천국에 도착하기까지 후회 없는 나그네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추수 감사절에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1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2. 심판을 생각합니다. 3. 고향인 천국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