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는다.
성경을 보면 서로 대조적인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할 때에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반대로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도 하시고, 반대로 하나님은 "내가 드라큘라처럼 짐승의 피를 마시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신다고 하시며,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을 치르라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 밖에 없다고 하시며, 반대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로움과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도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런 대조적인 진리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면 신앙 역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올바르지 못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오늘은 성경의 대조적인 진리 중에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기도의 진리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그런데 반대로 성경은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이 말씀들을 볼 때 우리는 의아해집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를 하라는 겁니까? 달라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겁니까? 이 두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 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필요하고,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도 필요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영적인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만 기도합니다. "주여, 아시지요. 보시지요." 그런데 다른 기도의 말은 일체 하지 않고 오직 이 말만 한 시간 이상 계속 합니다. "주여, 아시지요. 보시지요." 이때 주님도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그래, 내가 안다. 내가 보고 있다. 그러니 어쩌라는 말이냐?" 이때 기도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것도 아시지요. 보시지요." 주님이 대답합니다. "그래, 내가 그것도 알고 있고, 그것도 보고 있다. 그러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여러분! 이렇게 기도를 하는 분의 상황과 형편이 어떤 모습인지 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좀 답답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루어 달래기가 좀 애매한 기도 제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미운 녀석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 녀석 때문에 심히 괴롭습니다. 앉아서 기도하려니 그 미운 녀석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렇다고 "주여, 그 녀석 한 대 때려 주십시오. 두 대 때려 주시면 더 좋고요."라고 기도는 못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바 미운 사람을 위하여 평안과 축복을 비는 기도가 주님이 원하는 기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축복의 기도는 잘 안 나옵니다. 자기 생각에는 주님이 알아서 그 미운 녀석 한 대 때려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기도하다간 도리어 주님이 자기를 한 대 때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주여, 아시지요. 보시지요." 주님도 대답하십니다. "그래, 내가 안다. 내가 보고 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즉 기도자의 입장에서는 자기는 책임지지 않고, 뒤로 빠질 테니 주님이 책임지고 알아서 한 대, 그것도 세게 때려달라는 겁니다. 두 때 세게 때려주면 더 좋고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 생각대로 잘 안 때립니다. 만약 주님이 그렇게 쉽게 때리시는 분이라면 아마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 중에 머리에 붕대를 감고 오거나, 눈에 안대를 대고 오거나, 여기저기 파스나 반창고를 붙이고 오는 분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목발을 집고 오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어떤 분은 아예 KO 당해서 여기 오지도 못하고 집이나 병원에 누워 있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 정도는 괜찮은 편이고요. 아예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분도 상당히 많을 겁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주님은 쉽게 때리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또 "주여, 아시지요. 보시지요."라고 기도하는 분들 중에 이런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처녀 총각들의 최대의 기도 제목 중의 하나는 배우자 선택을 위한 기도일 겁니다. 어떤 처녀 자매님이 배우자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배우자 총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도 안 나타나더니 갑자기 둘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 총각은 인물이 잘 생겼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돈도 별로 없습니다. 이 총각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 눈에 훤히 보입니다. 속도 좀 썩고 살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총각은 인물은 아주 볼 것 없습니다. 그런데 돈은 제법 있습니다. 이 총각과 결혼하면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꾸 인물이 신경이 쓰입니다.
이 총각을 택하자니 저 총각이 생각나고, 저 총각을 택하자니 이 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여, 아시지요. 보시지요." 주님도 대답하십니다. "그래, 내가 알고 있다. 보고 있다. 그러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주님, 그것도 아시지요. 보시지요." "그래 내가 그것도 알고 있고, 그것도 보고 있다. 그러니 나보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결론을 말해 보아라."
물론 기도자는 이러한 기도를 하면서 주님이 자신에게 더 좋은 총각을 점지해 달라는 의도로 "아시지요. 보시지요." 하고 기도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자기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이 사뭇 다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응답하시기를 "애야, 내가 보기에는 재가 더 좋은 것 같은데..." 하시면 갑자기 도끼눈을 하고 주님을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면서 기도가 사나워질 수가 있습니다.
결국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주님 생각, 주님 편으로 가지 않고, 자기의 의도대로 주님을 몰아갑니다. 즉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달라는지 무엇을 이루어 달라는지 할 때 주님의 의도, 주님의 생각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물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가족 식구들 열심히 하나님 잘 믿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만날 "돈을 더 주세요, 좋은 직장을 주세요, 사업을 잘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만 하면 그건 순서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즉 주님의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 이 외국 땅에서 교회를 잘 세우고 받들기 위한 기도 제목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구할 때도 그렇습니다. 나 잘 먹고 나 잘 살기 위해서 돈을 달라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물질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배우자를 주시면 하나님 더 잘 믿고, 교회 더 잘 섬길게요."라는 기도를 해야지, 결혼하고 난 다음에 둘이 좋아서 교회를 떠나고, 예배를 빠지고, 놀러만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구하는 기도, 달라는 기도를 하되 주님의 영광, 주님의 뜻을 좇아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떼를 쓰는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보면 떼를 쓰는 기도에 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그 중에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기도가 있습니다. 백도 없고, 돈도 없는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법정에 호소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을 맡은 재판관이 불의합니다. 돈도 생기지 않는 과부의 청원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과부는 안 되겠다 싶어 매일같이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자기의 청원을 들어달라고 조르고 또 조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돈이 생기지 않는 과부의 소송을 들어주기 싫었지만 하도 과부가 귀찮게 구니까 결국 그 소송을 귀찮아서 들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만약 과부의 떼를 쓰는 청원이 불의를 조장하는 청원이라면 정의의 재판관은 그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을 겁니다. 즉 떼를 쓰는 기도를 할 때도 주님의 공의나 뜻에 맞는 기도를 가지고 떼를 써야 합니다. 이치도 맞지 않는 것을 가지고 무조건 울며불며 떼를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한 처녀 자매님이 배우자 선택을 위해 두 총각을 놓고 "아시지요. 보시지요." 하며 주님과 줄다리기 기도를 하다가 결국 자기의 고집대로, 자기가 보기 좋은 총각을 골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얼마가 지나자 그 총각이, 아니 그 남편 새끼가 서서히 본색이 들어났습니다. 이제는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Refund가 안됩니다. Change도 안됩니다. 뒤에 있는 결혼 조항을 보세요. 조그만 글씨로 나와 있지요. "No Refund. No Change."
그런데 요즘 자꾸 Refund나 Change 해달라고 주님께 떼를 쓰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여러분! 괜찮습니다. 그냥 살다 보면 좋은 것도 좋아 보이지 않고, 나쁜 것도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정들면 곰보도 예쁘게 보이고, 긍정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다 괜찮고, 버릴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것을 주십니다. 즉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각 사람에 따라서 이런 은사, 저런 은사를 주십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남이 못 가진 것이 있고, 남이 가진 것을 내가 못 가진 것이 있습니다. 괜히 남이 가진 것만 좋다고 시기하고 원망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내가 가진 것만 좋다고 우쭐하거나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만 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떼를 쓰고 주님께 받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인격적인 교제가 끊어지거나 약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떼쓰고 받은 것은 나중에 꼭 뒤탈이 생기고 맙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과 여러분은 무슨 관계입니까?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리고, 화를 내고, 바가지를 박박 긁어야 들어주는 관계입니까? 아니잖아요. 주님과 우리는 이제 그렇게 떼를 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왜냐하면 내가 주님의 뜻을 알고 있고, 내가 주님을 신뢰하고 있잖아요.
주님이 이 외국 땅에서 나를 절대 굶겨 죽이지 않잖아요? 병들면 고쳐 주시잖아요? 나의 앞길 훤히 아시고 인도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독생자를 주었는데 무엇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예비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좀 더 인내하고 기다려 보세요. 그리고 지금 주신 것에 감사하고 주님의 일을 꾸준히 계속 해보세요. 결과는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인생을 스스로 불행하게 사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에 감사합니다. 내일도 감사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받고 그것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