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위로하라

날짜: 
2014/06/28
말씀: 
고후1:3-7
말씀구절: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설교: 

성경적으로 보면 인생사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말세가 다가올수록 인생을 산다는 것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상처를 당하게 됩니다. 특히 이곳 캐나다에 이민이나 유학을 와서 좀더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리어 이 외국 땅에서 더욱 인생이 살기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인생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최근의 한국의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2014년 국내 10대 유행 중의 하나가 '위로가 필요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스트레스와 불안과 고통이 증가하면서 치료나 상담과 같이 불안을 달래주는 '위로 산업'이 발달할 것이라고 예측을 합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외롭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프리 허그(Free Hugs)' 즉 공짜로 안아주는 이벤트가 열리기도 합니다. 살기가 힘들고 외롭고 괴로운데 꽉 안아주고 얼굴을 비벼주기만 해도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인생을 사시는데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특히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큰 스트레스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하셨고, 제자들 듣는 앞에서 내 마음이 번뇌스러워 죽을 지경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지만 또한 육체를 입고 순수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당한 고난을 견디기 위해서는 위로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 결정적인 위로를 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수제자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한 여자가 자기가 시집갈 밑천인 귀한 향유 옥합을 예수님께 다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칼을 펼쳐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시체에 향유를 뿌리는데 이 여자의 이러한 행위는 바로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이러한 행위에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이 여자를 보아서라도 내가 대신 죽어야지!" 하는 결심을 굳힐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고통의 순간에는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위대한 사도 바울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살 소망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하늘의 위로가 있었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위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 힘들어 그곳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이러한 위로와 용기의 말을 듣고 바울은 어려워도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요14:16) 여기서 한자어인 '보혜사'를 풀어보면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원어인 헬라어로 풀어보면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파라'는 '곁에'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는 '위로하고 도와주고 변호하고 보호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은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평안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6-27)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 사는 것이 좀 힘드십니까? 어떤 때는 많이 힘이 듭니까? 여러분 곁에, 여러분 안에 여러분을 위로를 주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그 분을 인정하십시오.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위로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두려움과 근심과 스트레스를 떨쳐내십시오. 놀라운 평안을 소유하십시오. 초대 교회 때 그 억센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성도님들이 줄기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성령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최근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회를 하는데 너무너무 괴로워서 이제 목회를 그만두면 좋겠다고 싶었는데, 하루는 한 나이 드신 할머니 성도님이 다가와서 "아이고! 우리 목사님 너무나 고생하십니다!" 하고,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주는데, 여기서 그 목사님이 큰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한 분을 위해서라도 나는 남아서 목회 하겠다." 그런 결심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위로가 필요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위로가 필요하고, 아내는 남편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 외국 땅에 부모로부터 납치를 당하다시피 끌려와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인종과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며 공부하는 우리 자녀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위로가 필요합니다. 학부모들이여, 제발 부탁합니다. 자녀들에게 공부 못한다고 야단치지 마십시오. 낙제했다고 인상짓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십시오.

사도행전 9:3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즉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성령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나눠주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즉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위로도 더 많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고난과 위로'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따릅니다. 고난을 부인하면 신앙은 가짜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아무리 세도 우리들에게는 그것을 이길 만한 위로가 있습니다. 고난의 쓴물이 다가오면 위로의 단물도 다가옵니다. 고난의 슬픔이 다가오면 위로의 기쁨도 다가옵니다. 고난으로써 마음이 답답하면 위로로써 마음이 상쾌할 수 있습니다. 이 위로가 성령님을 통해서 오고, 말씀을 통해서 오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위로가 있기에 우리들이 숨 쉬고 아직 살고 있습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하면 엘리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많은 기적을 베풀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분이었습니다. 갈멜산에 바알 선지자 450명과 결투를 하여 승리를 했던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온 곳에 비가 오도록 한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후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도 지치고 피곤할 때 협박을 받으니까 그만 여인의 시험에 거꾸러졌습니다.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밑에 앉아서 엉엉 울면서 "하나님이여! 이제 나는 못 견디겠습니다. 나의 생명을 거둬주시옵소서. 나는 선조보다 못합니다. 나는 죽기를 원합니다." 하고 한없이 나약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 엘리야의 얼굴을 천사가 나타나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냥 만져 준 것이 아니라 마치 어머니가 울고 지친 아기를 어루만져 주듯이 그렇게 어루만져서 위로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과 떡을 먹여주고 말합니다. "그래, 피곤하지! 그래, 힘들지! 한 숨 더 자라."

그렇게 한숨을 더 재우고 난 다음 일어나면 천사가 또 어루만져 주고, 또 떡과 물을 먹여 주고... 그러니까 엘리야가 살아나서 다시 원래의 엘리야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야가 넉넉한 위로를 받으니까 그가 힘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베풀기 위해서 호렙산으로 그 먼 길을 걸어가도 피곤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엘리야 같은 사람도 낙심할 때 위로를 받았는데 하물며 이 외국 땅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위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인생을 살 수 있고, 그래야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기쁘게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러분! 요즘의 사람들은 비판과 비난은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넉넉하게 비난합니다. 비난이요? "많이 묵었다 아이가!" 그러니 이제 비난과 욕은 절제하시고 위로와 용기를 먹여서 살려야 합니다. 충분한 위로로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넉넉하게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각자가 들으십시오. 삶의 현장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넉넉한 위로를 받고 나도 그들을 넉넉하게 위로하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