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은혜로 알면

날짜: 
2014/07/27
말씀: 
왕상3:4-15
말씀구절: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왕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15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설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은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나 선물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한없이 겸손해지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 은혜가 베풀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또 그 은혜가 떠났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보십시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왕 자리는 원래 솔로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위계승서열로 치자면 그는 세 손가락 안에도 낄 수 없었습니다. 압살롬과 암논, 아도니야가 그의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의 둘은 죽고 아도니야는 미리 왕이 되려다 내쳐졌습니다.

더욱이 아버지 다윗과 자기 생모인 밧세바는 제대로 된 부부사이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셨던지 그 둘 사이에 처음 생겼던 아이는 죽이셨습니다. 솔로몬 역시 자기 형 따라 죽었어야만 했는데, 죽기는커녕 살아서 왕까지 된 겁니다. 이런저런 일을 돌아보자니 이 모든 일이 솔로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격 없고 아무 한일도 없는 자기에게 어떻게 이런 선물이 베풀어졌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것 외에는 이것을 설명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때입니다. 솔로몬의 처음 얘기를 읽다보면 그의 마음은 온통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천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저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도 일천번제를 드리는 성도들이 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나 지금 성도들이 드리는 일천번제나 하나님께 드린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차이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는 거기에 뭘 바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받은 은혜를 주체할 수 없어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일천번제는 주로 목적으로 드립니다. 마음의 소원하는 바를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드린다는 겁니다. 합격을 시켜달라든지, 승진을 하게 해달라든지, 병을 낳게 해달라든지 하는 등등의 제목을 가지고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얼마나 다급하면 그렇게라도 간구하겠습니까?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한번 냉정히 생각해보십시다.

신앙의 본질은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깨닫고 거기에 감사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나에게 뭘 더 주시지 않아도, 이미 주신 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격하고 찬양하는 겁니다. 그러나 뭘 바라고 드렸다가 만약 그걸 못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칫 실망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어떤 목적 때문에 드리는 일천번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겁니다.

번제란 제물의 배를 갈라서 뼈는 뼈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각을 떠서 불에 태우는 제사법입니다. 완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법 중에 가장 번거롭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제사입니다. 그런 제사를 일천 번을 드렸다는 겁니다. 하루에 한번을 드렸는지, 아니면 제사장을 바꿔가면서 일천 번을 연속으로 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천 번이라는 수는 우리가 그냥 세기에도 힘든 숫자입니다. 만약 하루에 한번 드렸다면 3년 가까운 시간입니다.

여러분! 뭘 하든 잠깐은 쉽습니다. 한 두 번은 즐겁게 할 수 있고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함없이 장기간 계속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솔로몬이 왕이 돼서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런데도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겁니다. 하나님은 일천번제가 끝나갈 즈음에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말하라.”

그때 솔로몬은 왕으로서 백성을 잘 다스릴 줄 알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기특하게 생각합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하고 물으실 때 여러분은 대답할 말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대답하는 그 말이 오늘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것입니까? 내가 그토록 열심히 간구하는 것이 정말 주님 마음에 꼭 드는 것입니까? 어떤 소설 가운데 이런 스토리가 나옵니다. 대주교가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하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냐, 무엇을 고하려느냐?”

이 소리에 깜짝 놀란 대주교는 “하나님! 정말 제 기도를 듣고 계셨군요.” 하면서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체크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괜찮습니까? 아니면 자기만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구함입니까?

하나님은 당신 맘에만 들면 뭐든 주시는 분입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뿐 아니라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부와 영광을 모두 누렸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었던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은 적이 없었고, 영토는 가장 커졌습니다. 하나님이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친히 그 울타리를 넓히신 까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얼마나 뛰어났던지 주변 나라는 물론이고 먼 나라까지 알려졌습니다.

만약 우리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도 솔로몬처럼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것까지도 받게 될 겁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일천번제의 시작은 바로 은혜를 은혜로 바로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호래자식이 됩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모르거나 은혜를 저버리면 그때부터 못된 사람이 됩니다. 은혜를 알면 사람이요, 은혜를 모르면 짐승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그 후 솔로몬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비극적인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오래도록 끝까지 간직한다는 건 정말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어느 순간 솔로몬에게 있었던 처음 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성전을 짓는 데는 9년이 결렸는데, 자기가 살 궁전을 짓는 데는 14년을 쏟았습니다. 그리곤 이방여인을 무려 1000명이나 들이고 아내로 삼았습니다. 온갖 사치로 국고를 축내고 백성들은 온갖 부역으로 너무나 힘겨워합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이제 솔로몬의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서 함께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오늘의 본문 14절이 가르쳐줍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여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길로 가지 않으면, 즉 주신 은혜를 몽땅 까먹는다면 너는 곧장 망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잠언, 전도, 아가서 같은 성경을 쓴 장본인입니다. 그 말씀들은 얼마나 휘황찬란한 말씀입니까? “모든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이 말도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얘기를 자기가 지키질 못한 겁니다. 그 주옥같은 잠언과 전도서, 아가서의 말씀이 왜 정작 저자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까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말한 것도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왜 진작 자신은 멸망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처음의 일천번제를 드렸던 그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로 없는 나를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도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감격이 사라지면, 그리고 그 은혜를 망각하면 그때부터 인생은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면 마귀가 가까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일들은 솔로몬의 말기 인생과 같이 되고 맙니다.

결론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 잠시 그 은혜를 잊었다면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늘 간직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기특하게 여기시어 이것저것을 계속 은혜로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