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예수님

날짜: 
2018/04/14
말씀: 
히4:14-16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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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있습니다. 신성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모든 것을 아시며(전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고(전능), 모든 일에 정직하고, 모든 일에 공의롭고, 성품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하신 분이십니다. 불완전한 인간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반면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도 있습니다. 그는 육체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졸리면 주무셔야 하고, 배고프면 잡수셔야 하고, 급하면 화장실도 가야했습니다.
어느 성도님이 자기 교회의 목사님에게 크게 시험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목사님은 화장실에 가시지 않는 아주 거룩한 분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화장실에서 너무나 인간적으로 용무를 보시는 목사님을 보고 크게 시험에 들은 것입니다. 그렇게 크게 시험에 들어서 그 성도님이 교회에 나오지 않자 목사님이 찾아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시험에 들었습니까?”
그러자 그 성도님이 “아- 제가 불행하게도 그만 목사님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응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목사님에 대해서 신뢰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참 뭐해서 이 성도님이 그냥 대충 대답을 했습니다. “뭐 특별한 이유가 없어요. 목사님 잘못이 아니에요.”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과 같은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하는 네 명의 친 남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닌 가족으로서 예수님의 인성을 너무나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동네 사람인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어렸을 적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요즘처럼 수영장이 별로 없었던 시기라 그냥 동네 냇가에서 또래들과 고추를 내놓고 벌거벗고 놀았습니다. 당시에는 수영복도 사기도 쉽지 않던 아주 가난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니- 그때에는 수영복이 어떻게 생긴 지도 아예 모르고 지냈던 시기였습니다.
생각건대 예수님의 어렸을 적의 모습도 그랬을 겁니다. 특히 예수님이 자라났던 나사렛이란 곳도 아주 가난한 촌동네였습니다. 옛날 한국의 가난한 시골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런 곳에서 예수님의 어렸을 적의 모습을 본 같은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서 구세주 노릇을 하니까 믿지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보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 기왕이면 성경에 예수님의 인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면 좋았을 걸! 그리고 완전한 신성만 보였으면 사람들이 더 잘 믿었을 텐데!” 마치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멋있게 꾸며 놓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인성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나타냅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도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대제사장(오늘날의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몸에 상처 났을 때의 아픔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갑자기 화장실에 가야만 되는 인간의 긴박함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의 인성에 오히려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나와 같은 연약함을 겪었기 때문에 나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아실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도 능히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실 수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나와 같이 연약함을 겪고 아시는 것하고, 겪지 않고 아시는 것에는 공감대의 형성이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경험하셨기에 우리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의 어려운 때를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에게 담대히 나아가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인성이 시험의 조건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조건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히브리서 5장에 보면 구약의 대제사장을 설명하면서 그도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에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그도 역시 죄를 짓는 한 불완전한 인간이요, 그러기에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도 속죄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2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라.“ 즉 과부사정 홀아비가 알아주고, 노처녀의 마음 노총각이 알아준다는 말처럼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기에 남의 연약함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목사님들 중에는 이런 인간의 연약함에 싸여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성자라고 하는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해 많은 주의 종들이 죽을병에 걸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목사님들은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알아줄 수 있습니다. 또한 목사님들 중에 전직이 조폭, 깡패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은 형무소에 가서 전도를 하면 잘 먹힙니다. 형무소에 오신 분들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 받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은 나의 인간적인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에게 솔직하게 의논하기 원하고, 그 분에게 나의 모든 사정을 털어놓기 원합니다. 외국 땅에서 겪는 외로움과 고통과 문제와 스트레스와 우울함과 답답함도 예수님에게 아뢰보십시오. 그 분은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는 분이십니다.
외국 땅에서 외롭습니까? 우울합니까? 예수님께 그 모습 그대로 아뢰십시오. “주님, 제가 많이 외로워요. 예수님도 돌아가실 때의 나이가 33세이셨는데 그 동안 노총각으로 있으면서 외로울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아, 참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므로 하나님이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외롭지는 않으셨겠네요. 그런데 주님, 저는 솔직히 많이 외로워요. 외롭다요. 슬프다고요. 엉엉-“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동물들을 창조하실 때 다 암수씩 짝으로 만드셨는데 처음 인간인 아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밤이 되면 늘 혼자 쓸쓸히 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아담의 외롭고 슬픈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구나!” 하면서 그에게 하와라고 하는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혹시 처녀 총각들 중에 짝이 없어서 외로운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외로운 모습을 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짝을 주셨듯이 여러분에게도 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십시오. 그런데 아 이건 뭡니까? 결혼을 했는데도 여전히 외롭다고요. 아- 기러기 기족이라 그럽니까? 아니 그런 것도 아닌데 분명 배우자가 옆에 있는데 여전히 외롭다고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 나의 사정, 너의 사정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그 분에게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와 대화가 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돌멩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인격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육체로 계실 때 나와 모양이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옛날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강아지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하면 강아지가 고개를 꺄우뚱하며 빤히 쳐다봅니다. 지금 주인님이 무슨 말을 하는데 이해를 하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저도 강아지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답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강아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야- 말을 해봐. 말을!” 그러면 강아지는 말합니다. “멍멍멍!” “아니 그런 말 말고 내가 알아듣는 말을 하라고 이 바보야! 아이고- 답답해!” 개도 답답하고 인간인 나도 답답합니다.
그럴 때는 내가 차라리 강아지가 되어서 강아지랑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는 서로 대화하기에 갭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려는데 답답합니다.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제는 인간 대 인간입니다. 뭔가 통할 수 있겠지요? 할렐루야!
어떤 사람들 중에, 특히 이단들을 보면 예수님이 결혼을 하시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결혼한 사람들의 사정을 잘 모른다고 하며, 그래서 그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으셨습니다. 맞지요? 이런 면에 있어서 결혼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예수님, 당신은 결혼해 본 경험이 없으니 내가 결혼해서 겪는 고통을 잘 모르시죠?” 하고 예수님을 깔보고 신뢰하지 않는 행위는 좀 맞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겪어도 모르는 경우가 있지만 예수님은 겪지 않아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을 한 사람이 다 겪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는 여자가 애 낳는 고통을 겪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애 낳는 고통을 겪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예수님도 인간이기에 우리와 같은 고통을 어느 정도 겪었고, 자신이 겪지 못한 것은 신의 성품으로 충분히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통하여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도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다같이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다 같이 시험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 특히 예수님도 나와 같이 인간으로서 고통을 겪었다고 하는 데에 더욱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