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대신 평강을

날짜: 
2019/03/03
말씀: 
빌4:6-7
말씀구절: 

...

설교: 

사람들은 누구나 근심대신 평강을 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평강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어쩌면 이곳 캐나다에 이민을 오는 것도 더 나은 평강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도 깨어지고, 자연과의 평화도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평강을 누릴 힘이 없습니다. 평강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셔야만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돈도 주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평강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기 자녀들이 부요하게 사는 것도 원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근심이 없고 평강을 누리며 사는 것을 더욱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된 우리가 매일 매일 평강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평강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구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29:11)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오리다"(사26:12) “주께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1:79)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은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사단이 가져다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외국 생활을 하다보면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법률이 다르고, 여러 가지 요건으로 인하여 조그만 일에도 괜히 근심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근심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약하게 하고, 나아가 우리의 행복을 파괴합니다. 고로 이 외국 땅에서 근심대신 평강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강을 누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성경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시인인 W.H. 오우든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 혹은 '염려의 시대'라고 합니다. 사실 엄청난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거에 비해서 살기가 편리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편리함은 과거에 없었던 고민과 염려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과거는 힘들게 산에 가서 나무를 주어다가 밥을 해먹던 시대에서, 지금은 부엌에 있는 조그만 스위치만 켜도 가스가 나와 밥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없었던 가스 폭발 사고라는 고민이 새롭게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걸어서 여행을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여 손쉽게 여행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없었던 자동차 사고, 기차 탈선 사고, 비행기 추락사고 등을 염려합니다. 과거에는 손수 소나 돼지를 길러 그것으로 식탁을 꾸미고, 텃밭에서 손수 기른 채소를 뜯어다가 어렵게 식탁을 꾸몄지만, 요즈음은 식품점에 가서 돈만 내면 얼마든지 사다가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너무 편리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이 농약을 친 콩나물인지, 톱밥을 섞은 고춧가루인지, 이상한 것을 집어넣었는지 불안해하며 과거에 없던 새로운 염려할 것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염려할 상황이 아닌데도 염려를 한다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먹어도, 누구를 만나도, 항상 염려합니다. 염려해선 안되는데 하면서 다시 염려합니다. 현대인들은 염려 병에 걸렸습니다. 여러 가지 육체의 질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염려를 하는데, 오히려 염려라고 하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염려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염려의 특징은 비생산적입니다. 염려는 엄청난 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염려란 헬라어 원어 '메림나오'는 '쪼갠다', '나눈다'라는 뜻의 '메리조'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누스'가 합해진 말입니다. 즉 염려란 마치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쪼개지고, 나누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미군은 약 20만 명이었고, 같은 기간 동안 미국 국내에서 총20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200만 명 중에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사람보다, 염려로 인해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5배나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가 무섭습니다. 염려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를 안개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말해 의하면, 서울 광화문 일대를 지상에서 높이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잔의 물이 600억 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 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를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염려를 계속하다보면,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염려를 하다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 풍자적인 기독교 작가는 어린이들을 위한 인상 깊은 한 이야기를 지었습니다. <참새와 물새의 대화>라는 제목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새야, 저 아래 땅위에서 허덕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봐. 저 아우성치며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인간들의 꼴을 보란 말이야." 그 옆에 있던 참새가 말합니다. "물새야, 아마 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모양이지!"
여러분, 왜 그렇게 걱정하며 염려하십니까? 만약에 염려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성경은 날마다 깊은 염려를 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 하면 염려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 잠자지 못하게 합니다. 한숨만 나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개 염려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염려해도 소용이 없는 것들을 가지고 염려합니다. 과거에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을 되새기며 묵상하듯이 염려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것들을 염려한다고 과거가 바뀝니까? 사업에 실패한 것 다시 생각한다고 실패한 사업이 돌이켜집니까? 공부하지 않아 시험에 낙방한 것, 고민한다고 시험 성적이 올라갑니까? 아닙니다. 과거를 염려한다고 지나간 날들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또 미래에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사건을 가정해서 미리 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내일 일을 미리 오늘로 가져다가 염려한다고 미래가 보장됩니까? 아닙니다. 미래에 아직까지 일어나지 아니한 일들을 미리 염려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 나누어놓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온갖 근심과 고민과 염려를 모두 내어 던져버리시기 바랍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목사님, 염려하지 않는다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됩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염려를 내려놓는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해 애써 무관심으로 대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평강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6절을 보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러분, 기도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샘 속에 잠기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독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아뢰라고 했는데, 기도라는 말과 간구라는 단어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기도란 말은 <프로슈케>라는 헬라어로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께 향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간구란 말은 <데에세이>라는 헬라어는 '필요한 것을 요청하다' '도움을 요청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먼저 내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심령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주위와 환경을 바라보던 시각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바뀌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문제를 바라보던 시각이 전능하신 하나님,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비로소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아니하고 간구부터 하면 오히려 문제에 눌려 버립니다. 이것은 과녁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화살을 정확히 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지 아니하면 염려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평강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을 아뢰기보다, 먼저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는 사람은 의심 없이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간구는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3. 감사함으로 아뢰라
여러분, 너희 구할 것으로 어떻게 아뢰라고 합니까?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합니다. 비록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응답해 주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즉 미리 감사입니다. 아직 기도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며 예물을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의 집안에 있었던 간증입니다. 대략 30년 전의 일입니다. 아버님이 건축업을 하시는데 도무지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구청 직원도, 상급 직원도 건축허가가 나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건축을 담당할 모든 것을 준비해 났는데 허가가 계속 나오지 않자 저희 아버님이 근심이 너무 심했습니다. 큰 근심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가 아버님이 계시는 현장에 내려갔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제가 아버님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아버님, 이제는 사람만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허가를 위해 사람에게 쓰신 돈이 많은데 이제는 하나님에게도 좀 써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저의 아버님이 별 믿음은 없지만 하도 허가가 안 나오고 근심이 되니까 당시 10만 원짜리 수표를 건네면서 “이것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 좀 해봐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속으로 “에이, 사람에게는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 돈을 쓰는데 왜 하나님에게는 이렇게 작게 내노?” 하면서도 그래도 그것을 들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철야예배에 갔습니다. 그리고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갑자기 제 배에서 “됐다!” 하는 소리가 나오며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저의 어머님도 같이 예배에 갔는데 예배를 마치고 제가 “됐어요! 어머님!” 하니까 저의 어머님도 “그래, 됐다!” 하고 같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침에 아버님이 현장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야, 허가가 나왔다!” “할렐루야!”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은 “아이고, 하나님도 돈 되게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또 돈 내라고 하네. 기복신앙이다.” 하고 판단을 할런지 모릅니다. 애니웨이(Anyway : 어쨌든) 저는 간증합니다. 듣고서 은혜가 되면 받으시고 안 되면 받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듯이 인격을 갖춘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미리 감사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역사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만약 간구를 하면서도 “혹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면 안 되는데.... 그러면 큰일 나는데... 아이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냐?“ 하고 기도를 하면, 기도하면서도 불안해지고 맙니다. 즉 기도는 하되 믿음의 기도가 아닌 불신의 기도로는 아무리 해도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고로 기도와 간구 시에 확실히 내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고 하는 믿음과 함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이 말씀대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으면 감사가 자연히 나오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받은 줄로 믿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올 수 있고, 그래야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빌4:6)을 가지고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직 사랑과 은혜가 충성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간구하였으면 응답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넘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