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원수를 사랑하라

날짜: 
2016/11/20
말씀: 
마5:43-48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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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수많은 귀중한 말씀을 남기셨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귀중한 말씀을 꼽는다면 바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덕목이요, 가장 귀중한 진리요, 최고의 가치와 최고의 선을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가운데 ‘원수사랑’은 모든 사랑 중에서 극치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철학가와 종교가가 나타났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를 든다면 예수님의 삶 속에는 바로 이러한 원수 사랑의 완전한 성취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인간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셔서 인간들과 같이 시험과 고통을 당하셨으며 쓰라린 상처와 배신을 맛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수많은 상처를 당하고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상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상처와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미움과 증오가 끓어오릅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도 이런 쓰라린 상처를 맛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이란 사람을 보세요. 자기의 형 가인보다 좀더 잘났다는 이유로, 좀더 의롭다는 이유로 그만 질투의 대상이 되어 피를 같이 나눈 형에게 돌에 맞아 처절히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이라는 사람을 보세요. 많은 형제들이 있지만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역시 질투의 대상이 되어 피를 같이 나눈 형들의 손에 은 20냥에 인신매매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다윗을 보세요. 자기의 장인인 사울왕에게 그토록 충성을 했지만 오히려 장인 사울왕이 계속 죽이려고 덤빕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외로운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 역시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부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 은 30냥에 배신을 당해 팔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말세가 되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공중전화 한 번 길게 썼다고 목에다가 칼을 대는 무정한 세상입니다. 부모가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방에다가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비정한 세상입니다. 부부간, 형제간, 부모 자식간에도 사랑은커녕 철천지원수가 되는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쓰라린 고통의 눈물을 흘립니다. 때로는 분노의 이빨을 갈기도 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도 생길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호세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정을 들어보십시오. 이 남자, 음란하고 끼가 많은 여인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2남 1녀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가 싶다만 이게 웬일입니까? 봄바람이 살랑거리자 이 여자 그만 끼가 발동합니다. 남편이 사다준 금가락지 은가락지 끼고 아양과 교태를 부리며 꾸미더니 그만 외간 남자와 놀아납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을 팽개쳐 버리고 가출까지 하고 결국은 창녀로 전락되고 맙니다.
도대체 누가 이 호세아라는 남편의 마음을 알아주겠습니까? 호세아는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창녀촌에 찾아가 아내를 위하여 은 15냥을 주고 다시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고 다시 사랑해줍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입니까? 이 여자 다시 창녀촌이 그리워 집을 나가고 맙니다. 이때 호세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나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 여자를, 그 남자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이것이 종교와 철학으로 가능합니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철학 그 이상의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갑자기 저쪽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그 쪽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휘어잡고 그 여자를 예수님의 발아래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사색이 되었고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말을 합니다. “예수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끄러미 바라보시고 허리를 굽혀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기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쓰셨겠습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이 바리새인들, 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만 여우인 줄 알았더니 예수님께서 쓰신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니 자신은 늑대였습니다. 자신은 돼지였습니다. 자신은 독사의 새끼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부끄러워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떠나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여자여, 너를 돌로 치려던 자가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그래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야할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한 배신자 베드로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한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여섯 명의 남편을 갈아치운 행실이 못된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인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리고 주님은 비유로 말씀합니다. “누가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이때 어떻게 하겠느냐 ? 나는 선한 목자라. 그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있노라.”
여러분, 우리는 내 아들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만 예수님은 원수의 자식, 배반의 자식, 마귀의 자식인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사정없이 예수님을 휴지조각처럼 꾸기고 팽개쳤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문둥병자처럼 온몸이 문드러져 모든 사람이 징그러워 멀리하는 소외된 사람을 예수님은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또한 혈루병자처럼 영혼과 육신에 상처를 입고 오늘도 피 흘리며 고통당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 내가 뭔데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그렇게 묻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오기만 하면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라.“(시27:1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세상에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느니라.“(롬8:35,39)
그런데 여러분, 왜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이 없다고 자꾸 고집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막혔던 죄악의 담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러나 여러분,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을 믿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의 자범죄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대하여 또다시 죄악의 담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번엔 무슨 죄의 담을 쌓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미움입니다. 여러분, 미움이 자라면 증오가 되고, 증오는 복수를 일으키고, 그 결과는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고 맙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마26:52)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우리는 주님께 반문합니다. “아니 주님,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요? 내가 지금 당하는 이 고통, 이 신세가 누구 때문인데요?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합니까?”
이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야,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해 주시리라.“(마6:14) ”그러므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3-14)
“아니 하나님,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합니까? 나는 끝까지 선으로 대했건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악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합니까? 하나님, 세 번은 용서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은 못해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 못해요.”
그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근시안적으로 좁게 바라보지 말고 멀리 바라보아라.” “아니 어디를 멀리 바라보라는 것이에요?” “저 쪽 서쪽하늘 붉은 노을이 영문 밖을 비추는 골고다 언덕 위를 바라보아라. 그곳에서 2000년 전에 내가 원수된 너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누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 한발자국 두 발자국 올라가셨습니까? 누구 때문에 피눈물 쏟으시고 가진 포악 당하셨습니까? 바로 원수된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나는 그 원수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왜 사랑하지 못합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여러분, 만약 그 사람을 사랑하기 힘이 들면 먼저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만약 기독교에서 용서와 사랑이 빠지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철학과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은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용서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 사랑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다윗왕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된 이유는 자기를 죽이려고 덤비는 사울왕을 향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끝까지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원수를 사랑했기에 그는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 왕이요,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누가 진짜 위대한 사람입니까?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은 부자입니까? 지위가 높으신 어르신네입니까? 아니면 모르는 것이 없는 박사입니까? 진짜 위대한 사람, 진짜 행복한 사람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도 바로 그 분은 원수를 철저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구세주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분은 단지 이스라엘의 시골에 한낱 목수쟁이요, 학자요, 종교가요, 철학가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주님을 좇아갑니까? 예수님이 돈과 명예를 주었기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주님이 원수 같은 나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만약 내 마음 속에 사랑이 없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없으면 천국의 기쁨과 행복도 존재하지 않고 지옥과 같은 날들 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천국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희망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무리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해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누군데 사랑 하냐고요? 그 분은 단순한 종교가가 아닙니다. 철학가가 아닙니다. 그 분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시요, 원수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내놓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오시면 나도 그 분과 같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죽지 않으셨습니까? 비록 부활했다할지라도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19)
여러분, 사랑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분을 오늘 우리가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만질 수 없다할지라도 그 분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분과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외칠 수가 있습니다. “아- 나는 믿노라. 해가 비치지 않더라도 해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노라. 사랑을 만질 수 없더라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지라도 여전히 그 침묵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 저는 똑같은 죄를 짓고 똑같은 감방에서 똑같은 형기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감방에 있는 동안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저주하고, 배반한 친구를 미워하며, 복수의 칼을 갈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한탄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열심히 책을 읽고, 조그만 창살을 통해서 비춰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원한에 사무친 그 사람을 용서하면서 찬양을 부르며 지냈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이 출감하는 날 한 사람은 정신병원으로 실려 갔고, 한 사람은 인생의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70-80의 짧은 인생을 마치는 날 여러분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천국입니까? 아니면 지옥입니까? 만약 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여러분에게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미움을 버리지 않는다면, 원한을 풀지 않는다면 결국 지옥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행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천국은 바로 오늘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원수 사랑이 있다면 천국은 저와 여러분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원수 사랑이 있다면 천국의 기쁨과 행복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원수 사랑을 통하여 실제로 나에게 경험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