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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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찬양을 통해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된 자들이 모여 시작한 옹기장이 선교단은 2000년 현재 1기에서 8기까지 약 200명의 단원으로 이루어진 찬양단입니다. 철저한 영성훈련과 연습을 토대로 하여 이 시대가 요하는 정예의 주의 군사를 키워내는 옹기장이는 이 사역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옹기장이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며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이땅의 복음화를 위해 땅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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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찬양을 통해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된 자들이 모여 시작한 옹기장이 선교단은 2000년 현재 1기에서 8기까지 약 200명의 단원으로 이루어진 찬양단입니다. 철저한 영성훈련과 연습을 토대로 하여 이 시대가 요하는 정예의 주의 군사를 키워내는 옹기장이는 이 사역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옹기장이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며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이땅의 복음화를 위해 땅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22 years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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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송명희
" 송명희와 친구들" Love Concert가 지나 10월 29일부터 진행되어진 5번의 찬양예배를 통해서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연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송명희, 최덕신, 조하문, 최인혁, 방익수, 강태욱, 서영아, 강승민(피바디음대 재학중), 조준모교수(한동대학교), 김은정교수(숭실대)등 각 교회별 적게는 4팀에서 6침 찬양사역자들과 10여명이 넘는 코러스팀들, 그리고 심플하지만 그윽한 조명과 따뜻한 음향시스템으로 많은 성도님들을 은혝와 감동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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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송명희
" 송명희와 친구들" Love Concert가 지나 10월 29일부터 진행되어진 5번의 찬양예배를 통해서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연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송명희, 최덕신, 조하문, 최인혁, 방익수, 강태욱, 서영아, 강승민(피바디음대 재학중), 조준모교수(한동대학교), 김은정교수(숭실대)등 각 교회별 적게는 4팀에서 6침 찬양사역자들과 10여명이 넘는 코러스팀들, 그리고 심플하지만 그윽한 조명과 따뜻한 음향시스템으로 많은 성도님들을 은혝와 감동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22 years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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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
부흥찬양으로 이 땅에 영적 각성을 일으킨 장본인 고형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과 영혼을 향한 눈물의 기도와 애타는 부르짖음이 부흥의 불길을 세상에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부흥의 통로는 과연 누구입니까 ? 부흥은 왜 필요합니까 ? 영적 각성과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찬양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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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
부흥찬양으로 이 땅에 영적 각성을 일으킨 장본인 고형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과 영혼을 향한 눈물의 기도와 애타는 부르짖음이 부흥의 불길을 세상에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부흥의 통로는 과연 누구입니까 ? 부흥은 왜 필요합니까 ? 영적 각성과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찬양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22 years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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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유학생회
모두들 잘 지내셨어요??
여기 한국은 정말 월드컵때매 6월한달동안 정신없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요. ^^*
너무 뿌듯한거 있죠. 누구든 다 그러셨을거라 믿어요. 우리나라 너무 자랑스럽지 않아요??
캘거리 생각 많이 했었어요. 친구들,학교, 교회. 그런것들이 잊혀져가는만큼 추억도 다시 자리잡는것 같아요. 갑자기 또 교회 목사님, 집사님들, 청년부 생각나는거 보면요.
여기 들어와보니까 조용진 집사님께서도 답글 달아주셨던데 저 캘거리에 있을때 매주마다 데려다주시고 너무너무 감사했어요. 한국가면 캘거리눈 많이 그리울거라고 하셨었는데 진짜 그 눈 여기 퍼오구싶어요. ㅠ.ㅠ 정말 덥거든요 요즘. 헤헤^^
캐나다에서 가장 잘한거 꼽아보자면 영어보다두 교회열심히 나간거일거예요.
어찌생각해보면 많은 깨달음이 있으라고 그곳으로 하나님이 보내주셨을지도 모르구요. 그때 제가 결심한것중 하나가 한국에서는 그렇게 주일을 빠져서 속으로 늘 죄짓는 기분에 살았었는데 꼭 주일만은 지키자였었거든요. 그건 정말 이뤄낸것 같아서 기뻐요. 영어는 열심히 공부안해서 지금두 무지 속상하지만요. ^^ 여기서는 삼일교회라는 청년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많은 청년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오는걸 보면 아직 부족한 저를 깨달으며 더욱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게 된답니다.
와~ 벌써 2달이 훌쩍지났어요. 캘거리에도 여름은 오겠죠?
배구대회 준비도 잘하시구요!! 이번엔 절대 지지 마세요....
청년부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이승형 집사님, 그리구 재용이오빠두 늘 건강하시구 주님안에서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그럼 또 글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승혜올림.
여기 한국은 정말 월드컵때매 6월한달동안 정신없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요. ^^*
너무 뿌듯한거 있죠. 누구든 다 그러셨을거라 믿어요. 우리나라 너무 자랑스럽지 않아요??
캘거리 생각 많이 했었어요. 친구들,학교, 교회. 그런것들이 잊혀져가는만큼 추억도 다시 자리잡는것 같아요. 갑자기 또 교회 목사님, 집사님들, 청년부 생각나는거 보면요.
여기 들어와보니까 조용진 집사님께서도 답글 달아주셨던데 저 캘거리에 있을때 매주마다 데려다주시고 너무너무 감사했어요. 한국가면 캘거리눈 많이 그리울거라고 하셨었는데 진짜 그 눈 여기 퍼오구싶어요. ㅠ.ㅠ 정말 덥거든요 요즘. 헤헤^^
캐나다에서 가장 잘한거 꼽아보자면 영어보다두 교회열심히 나간거일거예요.
어찌생각해보면 많은 깨달음이 있으라고 그곳으로 하나님이 보내주셨을지도 모르구요. 그때 제가 결심한것중 하나가 한국에서는 그렇게 주일을 빠져서 속으로 늘 죄짓는 기분에 살았었는데 꼭 주일만은 지키자였었거든요. 그건 정말 이뤄낸것 같아서 기뻐요. 영어는 열심히 공부안해서 지금두 무지 속상하지만요. ^^ 여기서는 삼일교회라는 청년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많은 청년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오는걸 보면 아직 부족한 저를 깨달으며 더욱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게 된답니다.
와~ 벌써 2달이 훌쩍지났어요. 캘거리에도 여름은 오겠죠?
배구대회 준비도 잘하시구요!! 이번엔 절대 지지 마세요....
청년부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이승형 집사님, 그리구 재용이오빠두 늘 건강하시구 주님안에서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그럼 또 글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승혜올림.
22 years 5 months ago
이전 홈페이지
한국은 무지 덥지? 너도 알다시피 이젠 완연한 여름날씨다..
놀러 가기도 좋고 헤헤...아직 여행다운 여행 가지 못하고 있당.
같이 갈 사람이 있어야징..헤헤..
원래 내가 집에서 나가기 싫어하는거 잘 알지?
학교도 이제 끝나고 해서 또 당분간 놀아야겠당..
요즘 다시 밥해먹는 재미들였당..이제 캐나다 삶은 사는것 같어..
고기도 많이 먹고 일주일에 세번이상 고기 먹는것 같당..
곧 살도 찌겠지..암튼 한국에서도 교회 열심히 다니니깐 보기 좋다..
옵바가 그동안 승혜를 잊고 살았나보다..열심히 기도 해줘야 겠는걸..
암튼 잘 지내고 언제 또 여유가 있음 함 놀러와라..
참 진우가 8월초에 캐나다에 잠깐 들른다고 하더라..
한국에서 서로들 연락하는지 모르겠네..암튼 잘 지내고..
좋은 소식 있음 또 들려줘~~!!
항상 우리 순복음 교회를 위해 기도 해주고...곧 부흥이 있을것 같은데..
옵바 기도가 부족한것 같당..헤헤..
베트남 국슈가..
주님안에서 승리하길..(찬양이 그립쥐?)헤헤..
놀러 가기도 좋고 헤헤...아직 여행다운 여행 가지 못하고 있당.
같이 갈 사람이 있어야징..헤헤..
원래 내가 집에서 나가기 싫어하는거 잘 알지?
학교도 이제 끝나고 해서 또 당분간 놀아야겠당..
요즘 다시 밥해먹는 재미들였당..이제 캐나다 삶은 사는것 같어..
고기도 많이 먹고 일주일에 세번이상 고기 먹는것 같당..
곧 살도 찌겠지..암튼 한국에서도 교회 열심히 다니니깐 보기 좋다..
옵바가 그동안 승혜를 잊고 살았나보다..열심히 기도 해줘야 겠는걸..
암튼 잘 지내고 언제 또 여유가 있음 함 놀러와라..
참 진우가 8월초에 캐나다에 잠깐 들른다고 하더라..
한국에서 서로들 연락하는지 모르겠네..암튼 잘 지내고..
좋은 소식 있음 또 들려줘~~!!
항상 우리 순복음 교회를 위해 기도 해주고...곧 부흥이 있을것 같은데..
옵바 기도가 부족한것 같당..헤헤..
베트남 국슈가..
주님안에서 승리하길..(찬양이 그립쥐?)헤헤..
2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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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안녕하세요 저는 밴쿠버 Youth With A Mission(예수전도단)에서 사역하는
이원엽 선교사라고 합니다.올 가을에 저희 선교단체에서 열리는 학교에 대한 안내를 위해 귀 교회의 홈 페이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을 참조하시길 바라며, 귀 교회 위에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작년과 올해 2번의 CDTS를 마치고 올 가을에 열리는 세번째 밴쿠버 CDTS의 학생들을 모집합니다. 아래의 CDTS에 대한 안내를 보시고 많은 분들의 지원을 부탁 드립니다.
::: CDTS란 무엇인가? :::
이 학교는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 갈림길; Crossroad )에 있는 35세 이상의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DTS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선교하는 삶 가운데 영적인 재무장, 새로운 방향, 새로운 vision등을 세우기 원한다. 결혼한 사람이면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들어올 수 있다. 인생의 Half Time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과 훈련이다.교육과정은 DTS와 동일하며 12주의 강의와 12주(혹은 8주)의 전도여행 (Outreach; field Assignment )으로 구성되어 있는 핵심적인 기독교 훈련이다.
::: CDTS의 목적 :::
CDTS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품의 개발과 하나님과의 관계, 세상 속의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과 가정이 되도록 훈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한다.
[2002년 CDTS가을학기 안내]
▣ 일 정1) 강의기간: 2002년 9월 6일 - 11월 28일
2) 전도여행 : 2002년 11월 28일 - 2003년 1월 31일
▣ 대 상: 만 30세에서 60세까지 의 주님을 사모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또는 가정
▣ 훈련장소:벤쿠버의 근교에 마련된 훈련장소
▣ 훈련비 미화 $4,500(강의 12주, 선교여행 8주 포함)
/ 캐나다 항공료, 자녀들 비용은 별도로 받습니다.
:: 강의 주제들 :::(한국어 및 영어통역 강의)
■ 묵상 (Meditation)
■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 (Hearing God's Voice)
■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Fear of God)
■ 하나님을 아는 삶, 친밀감(Knowing God)■ 예배(Worship)
■ 다림줄(Plumb Line)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Father heart of God)
■ 영적성숙(Spiritual Maturity)
■ 주 안에서의 신분/권리포기(Identity in Christ)
■ 재정/지도력(Finance/Leadership)■ 세계관(World View)
■ 영적전쟁 (Spiritual Warfare)■ 성령론 (Holy Spirit)
■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
■ 전도, 선교 (Evangelism & Mission)
::: 전도 여행 (CDTS Field Assignment) :::
CDTS의 2학기 과정으로 약 12주(최소 8주)동안 타 문화권에서 전도 여행을 하는 기간을 갖는다. 이 기간은 강의 기간에 배웠던 것들을 적용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데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함으로써 전도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연결시키는 기간이다.
[ 목적 ]
전도여행의 목적은 3개월의 강의 및 원리원칙을 현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적용하기위한 현지적응 훈련으로 최소단위의 팀을 구성하여 현지 적응 및 적용 훈련 한다.
[ 전도여행 지역]
■ 이집트 무슬림권을 중심한 사역의 확장과 영적전쟁 및
중보기도사역
■ 캐나다 원주민 사역 화해와 용서의 사역
■ 남미 인디오 부족들을 향한 사역과 현지의 복음사역
[원서 접수 안내]
▣ 원서다운로드 원서다운: http://www.ywamvan.org/tr_appdown.php
▣ 원서 보내실 곳베이스 사무실 주소:
YWAM-Vancouver, KMC 훈련 DPT#1-529 East Broadway, Vancouver, B.C. V5T 1X4 Canada
▣ 원서 접수비
1. 해외:(한국이외 전지역)미화 50불을 Cheque 또는 Money Order로
원서와 함께 보내 주시면 됩니다
2. 한국:외환은행에서 미화 50불을 송금수표를 발행 받아 원서와
함께 보내 주시면 됩니다.
▶수취인 이름(Order to): YWAM-AIIM MISSIONS SOCIETY
▣ 문의전화 베이스:1-604-484-2397(사무실)/
1-604-484-2398(베이스 Fax)
한국에서 통화시 한국시간 오전6시-9시 사이에 전화하시면
통화가 가능합니다
▣ E-mail 훈련 dpt. 메일: ywamvantraining@hanmail.net
베이스 메일: ywamvankmc@hotmail.com
※ 자세한 내용은 저희 홈 페이지에 들어오셔서
보시고 문의 바랍니다.
홈 페이지 www.ywamvan,org
이원엽 선교사라고 합니다.올 가을에 저희 선교단체에서 열리는 학교에 대한 안내를 위해 귀 교회의 홈 페이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을 참조하시길 바라며, 귀 교회 위에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작년과 올해 2번의 CDTS를 마치고 올 가을에 열리는 세번째 밴쿠버 CDTS의 학생들을 모집합니다. 아래의 CDTS에 대한 안내를 보시고 많은 분들의 지원을 부탁 드립니다.
::: CDTS란 무엇인가? :::
이 학교는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 갈림길; Crossroad )에 있는 35세 이상의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DTS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선교하는 삶 가운데 영적인 재무장, 새로운 방향, 새로운 vision등을 세우기 원한다. 결혼한 사람이면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들어올 수 있다. 인생의 Half Time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과 훈련이다.교육과정은 DTS와 동일하며 12주의 강의와 12주(혹은 8주)의 전도여행 (Outreach; field Assignment )으로 구성되어 있는 핵심적인 기독교 훈련이다.
::: CDTS의 목적 :::
CDTS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품의 개발과 하나님과의 관계, 세상 속의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과 가정이 되도록 훈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한다.
[2002년 CDTS가을학기 안내]
▣ 일 정1) 강의기간: 2002년 9월 6일 - 11월 28일
2) 전도여행 : 2002년 11월 28일 - 2003년 1월 31일
▣ 대 상: 만 30세에서 60세까지 의 주님을 사모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또는 가정
▣ 훈련장소:벤쿠버의 근교에 마련된 훈련장소
▣ 훈련비 미화 $4,500(강의 12주, 선교여행 8주 포함)
/ 캐나다 항공료, 자녀들 비용은 별도로 받습니다.
:: 강의 주제들 :::(한국어 및 영어통역 강의)
■ 묵상 (Meditation)
■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 (Hearing God's Voice)
■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Fear of God)
■ 하나님을 아는 삶, 친밀감(Knowing God)■ 예배(Worship)
■ 다림줄(Plumb Line)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Father heart of God)
■ 영적성숙(Spiritual Maturity)
■ 주 안에서의 신분/권리포기(Identity in Christ)
■ 재정/지도력(Finance/Leadership)■ 세계관(World View)
■ 영적전쟁 (Spiritual Warfare)■ 성령론 (Holy Spirit)
■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
■ 전도, 선교 (Evangelism & Mission)
::: 전도 여행 (CDTS Field Assignment) :::
CDTS의 2학기 과정으로 약 12주(최소 8주)동안 타 문화권에서 전도 여행을 하는 기간을 갖는다. 이 기간은 강의 기간에 배웠던 것들을 적용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데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함으로써 전도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연결시키는 기간이다.
[ 목적 ]
전도여행의 목적은 3개월의 강의 및 원리원칙을 현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적용하기위한 현지적응 훈련으로 최소단위의 팀을 구성하여 현지 적응 및 적용 훈련 한다.
[ 전도여행 지역]
■ 이집트 무슬림권을 중심한 사역의 확장과 영적전쟁 및
중보기도사역
■ 캐나다 원주민 사역 화해와 용서의 사역
■ 남미 인디오 부족들을 향한 사역과 현지의 복음사역
[원서 접수 안내]
▣ 원서다운로드 원서다운: http://www.ywamvan.org/tr_appdown.php
▣ 원서 보내실 곳베이스 사무실 주소:
YWAM-Vancouver, KMC 훈련 DPT#1-529 East Broadway, Vancouver, B.C. V5T 1X4 Canada
▣ 원서 접수비
1. 해외:(한국이외 전지역)미화 50불을 Cheque 또는 Money Order로
원서와 함께 보내 주시면 됩니다
2. 한국:외환은행에서 미화 50불을 송금수표를 발행 받아 원서와
함께 보내 주시면 됩니다.
▶수취인 이름(Order to): YWAM-AIIM MISSIONS SOCIETY
▣ 문의전화 베이스:1-604-484-2397(사무실)/
1-604-484-2398(베이스 Fax)
한국에서 통화시 한국시간 오전6시-9시 사이에 전화하시면
통화가 가능합니다
▣ E-mail 훈련 dpt. 메일: ywamvantraining@hanmail.net
베이스 메일: ywamvankmc@hotmail.com
※ 자세한 내용은 저희 홈 페이지에 들어오셔서
보시고 문의 바랍니다.
홈 페이지 www.ywamvan,org
22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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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통한 위대한 승리..(동영상)
아래 사진은 이영표,송종국 선수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아래 사진은 이영표,송종국 선수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22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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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내 꿈은 오로지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 산악훈련을 간 적이 있었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산을 오르내리는 고된 훈련이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가 뾰족한 바위모서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는데, 옷은 찢어지고, 다리와 무릎에는 온통 시퍼런 멍이 들었다. 더 이상 산을 오를 수가 없었다. 나만 남고 다들 열심히 올라갔다. 감독선생님은 내가 다친 것도 모르고, 꾀를 부린다며 야단을 치셨다. 나는 너무 억울하고 슬펐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아버지께 말씀 드렸다. 크게 꾸중이라도 하실 것 같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빠, 저 축구 하기 싫어요."
하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놀라거나 화내시지 않고,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다. 그리고는 "태욱아, 많이 힘들지?"
아버지의 한 마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태욱아, 축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란다.
인생에는 때로는 산의 고개처럼 높은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깊은 골짝도 있어. 그래서
그 산을 넘으려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골짝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거든."
말할 것도 없이 그 뒤로 나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치열하게 나와의 싸움에 당당히 나서게 되었다. 그 때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월드컵에 출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적이 한 번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과 프로구단을 놓고 어디로 가야할 지 고민을 했을 때였다. 나는 대학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이 마음에 걸리고, 미리 프로의 세계에 뛰어 들어 실력을 쌓고 싶은 마음에 안양LG에 고졸 선수로는 최고의 계약금을 받고 당당히 들어갔다. 그때 내가 받은 계약금은 1억 8천 만원으로 생전 처음보는 커다란 액수의 돈이었다. 구단으로부터 계약금을 받던 날, 제일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른 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얼른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께 통장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아버지께 통장을 드리면서
"아버지, 그 동안 고생하셨죠? 이젠 제가 호강시켜 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감격하셨는지 한참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통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으며,
"태욱아, 아버지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집안 형편 생각해서 프로 구단에 들어간 것도 고맙고... 또, 미안하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통장이 마치 '가보'라도 되는 듯이 소중하게 만지시며 서랍 깊숙이 넣어 두셨다. 그날은 우리 집에서 막내인 내가 갑자기 장남이라도 된 듯이 어깨가 으쓱해 진 날이었다.
그날 밤 자기 전에 나는 매일 쓰는 기도 노트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축구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큰 돈을 받고 프로에 입단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실 것 같았다. 내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나를 인도 해 오신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은 또 다른 아버지였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십일조를 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통장은 모두 아버지께 맡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는 교회 얘기만 꺼내도 이마를 찡그리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어릴 적 교회 다니던 어떤 분이 우리 아버지한테 사기를 치고 도망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불신은 대단했다. 이런 형편에 내가 십일조를 내겠다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 아버지께선 불같이 화를 내실 것이다. 어쩌면 그 동안 눈감아 주셨던 교회 다니는 것조차 반대하실 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저어... . "
"뭔데, 그렇게 꾸물대냐? 사내녀석이... "
"아버지, 저 돈이 좀 필요해서요."
"그래? 통장 줄 테니 필요한 만큼 꺼내 써라."
이렇게 선뜻 내어 주실 줄은 몰랐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천 만원이라는 큰 돈을 찾았다. 얼른 헌금하고 싶은 마음에 일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주일 예배시간, 내 앞에 헌금함이 오자 마자 두 손을 모아 2천만원이 든 하얀 봉투를 넣었다.
' 아, 이렇게 기쁠 수가... . '
돌아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던지 평소 즐겨 부르던 찬양을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는 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태욱아!" 화가 잔뜩 나신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는 통장을 한손에 들고 계셨는데 나를 보자 그 통장을 내 앞으로 던지시며 버럭 소리를 치셨다.
"그 돈, 교회에 갖다 바쳤지? "
아버지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아버지는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외투를 걸치시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셨다.
아버지는 곧장 교회로 가서 목사님께
"부모 허락도 없이 어린 얘가 내는 큰 돈을 받아도 되는 거요?"
하시며 큰소리로 따지셨다고 했다. 목사님께서는
"그 돈은 태욱이가 하나님께 드린 돈이니까, 태욱이가 직접 와서 설명하면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하셨단다. 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신 채 집으로 돌아오셔서는
"당장, 그 돈 찾아와라."
하며 내게 고함을 치셨다. 평소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는 나였지만, 그때만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제가 방황했을 때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건, 하나님 때문이에요. 저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씀드렸다.
"제가 왜 헌금을 했는지, 앞으로 지켜보시면 아실 거에요."
아버지는 나의 당당한 태도에 놀라셨는지,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고개만 끄덕이시는 게 아닌가?
그 후 나는 내 당당한 발언(?)처럼 더욱 축구에 매진 할 수 있게 되었고,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국가 대표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3차례 평가전(세네갈-크로아티아-미국 전)에서 줄곧 스타팅 맴버로 뛸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십일조 사건 이후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이제 꼬박 꼬박 십일조를 챙겨주시기 까지 하신다.
지금의 축구 선수 최태욱이 있기까지 나에게는 두 분의 아버지가 계셨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고, 한 분은 내 마음에 참 생명과 평안을 주신 분이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분께 월드컵 16강이라는 기쁨을 안겨 드리고 싶다.
- 최태욱 선수는 현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이며, 안양 LG 소식이다. 성실한 플레이로 히딩크 감독의 신뢰를 받고 있다.
- 낮은 울타리 중에서 -
그런데, 처음으로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 산악훈련을 간 적이 있었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산을 오르내리는 고된 훈련이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가 뾰족한 바위모서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는데, 옷은 찢어지고, 다리와 무릎에는 온통 시퍼런 멍이 들었다. 더 이상 산을 오를 수가 없었다. 나만 남고 다들 열심히 올라갔다. 감독선생님은 내가 다친 것도 모르고, 꾀를 부린다며 야단을 치셨다. 나는 너무 억울하고 슬펐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아버지께 말씀 드렸다. 크게 꾸중이라도 하실 것 같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빠, 저 축구 하기 싫어요."
하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놀라거나 화내시지 않고,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다. 그리고는 "태욱아, 많이 힘들지?"
아버지의 한 마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태욱아, 축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란다.
인생에는 때로는 산의 고개처럼 높은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깊은 골짝도 있어. 그래서
그 산을 넘으려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골짝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거든."
말할 것도 없이 그 뒤로 나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치열하게 나와의 싸움에 당당히 나서게 되었다. 그 때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월드컵에 출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적이 한 번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과 프로구단을 놓고 어디로 가야할 지 고민을 했을 때였다. 나는 대학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이 마음에 걸리고, 미리 프로의 세계에 뛰어 들어 실력을 쌓고 싶은 마음에 안양LG에 고졸 선수로는 최고의 계약금을 받고 당당히 들어갔다. 그때 내가 받은 계약금은 1억 8천 만원으로 생전 처음보는 커다란 액수의 돈이었다. 구단으로부터 계약금을 받던 날, 제일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른 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얼른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께 통장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아버지께 통장을 드리면서
"아버지, 그 동안 고생하셨죠? 이젠 제가 호강시켜 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감격하셨는지 한참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통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으며,
"태욱아, 아버지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집안 형편 생각해서 프로 구단에 들어간 것도 고맙고... 또, 미안하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통장이 마치 '가보'라도 되는 듯이 소중하게 만지시며 서랍 깊숙이 넣어 두셨다. 그날은 우리 집에서 막내인 내가 갑자기 장남이라도 된 듯이 어깨가 으쓱해 진 날이었다.
그날 밤 자기 전에 나는 매일 쓰는 기도 노트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축구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큰 돈을 받고 프로에 입단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실 것 같았다. 내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나를 인도 해 오신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은 또 다른 아버지였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십일조를 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통장은 모두 아버지께 맡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는 교회 얘기만 꺼내도 이마를 찡그리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어릴 적 교회 다니던 어떤 분이 우리 아버지한테 사기를 치고 도망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불신은 대단했다. 이런 형편에 내가 십일조를 내겠다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 아버지께선 불같이 화를 내실 것이다. 어쩌면 그 동안 눈감아 주셨던 교회 다니는 것조차 반대하실 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저어... . "
"뭔데, 그렇게 꾸물대냐? 사내녀석이... "
"아버지, 저 돈이 좀 필요해서요."
"그래? 통장 줄 테니 필요한 만큼 꺼내 써라."
이렇게 선뜻 내어 주실 줄은 몰랐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천 만원이라는 큰 돈을 찾았다. 얼른 헌금하고 싶은 마음에 일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주일 예배시간, 내 앞에 헌금함이 오자 마자 두 손을 모아 2천만원이 든 하얀 봉투를 넣었다.
' 아, 이렇게 기쁠 수가... . '
돌아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던지 평소 즐겨 부르던 찬양을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는 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태욱아!" 화가 잔뜩 나신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는 통장을 한손에 들고 계셨는데 나를 보자 그 통장을 내 앞으로 던지시며 버럭 소리를 치셨다.
"그 돈, 교회에 갖다 바쳤지? "
아버지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아버지는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외투를 걸치시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셨다.
아버지는 곧장 교회로 가서 목사님께
"부모 허락도 없이 어린 얘가 내는 큰 돈을 받아도 되는 거요?"
하시며 큰소리로 따지셨다고 했다. 목사님께서는
"그 돈은 태욱이가 하나님께 드린 돈이니까, 태욱이가 직접 와서 설명하면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하셨단다. 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신 채 집으로 돌아오셔서는
"당장, 그 돈 찾아와라."
하며 내게 고함을 치셨다. 평소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는 나였지만, 그때만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제가 방황했을 때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건, 하나님 때문이에요. 저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씀드렸다.
"제가 왜 헌금을 했는지, 앞으로 지켜보시면 아실 거에요."
아버지는 나의 당당한 태도에 놀라셨는지,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고개만 끄덕이시는 게 아닌가?
그 후 나는 내 당당한 발언(?)처럼 더욱 축구에 매진 할 수 있게 되었고,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국가 대표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3차례 평가전(세네갈-크로아티아-미국 전)에서 줄곧 스타팅 맴버로 뛸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십일조 사건 이후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이제 꼬박 꼬박 십일조를 챙겨주시기 까지 하신다.
지금의 축구 선수 최태욱이 있기까지 나에게는 두 분의 아버지가 계셨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고, 한 분은 내 마음에 참 생명과 평안을 주신 분이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분께 월드컵 16강이라는 기쁨을 안겨 드리고 싶다.
- 최태욱 선수는 현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이며, 안양 LG 소식이다. 성실한 플레이로 히딩크 감독의 신뢰를 받고 있다.
- 낮은 울타리 중에서 -
22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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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히딩크의 황태자'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쑥스럽고 낯선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근사한 집에서 살아본 적도, 자랑할 만한 것도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는 내가 '황태자'라니 어울리지 않는 소리다.
나는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대가리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가리'라는 이름처럼 우리 집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얼마나 높은 곳이었는지 나는 집에 가려면 매번 웃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나는 그 곳이 좋았다. 동네 아이들과 마음껏 산과 개울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겨울이면 내리막길을 따라 신나게 눈썰매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게 오르던 대가리의 우리 집 덕분에 축구선수가 되는 오르막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포기하지 않고 내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내가 축구를 하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송종국! 너 축구부에 들어와라!"
우리 학교 축구부였던 진섭이 형(박진섭)의 제안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한창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공놀이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학교의 특활 시간에도 축구를 하고 싶어서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때가 바로 축구를 향한 오르막길의 첫걸음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 축구화를 신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인다. 마치 축구화에 날개라도 달린 것 마냥 나는 그날 온종일 하늘을 붕붕 떠 다녔다. 축구화를 신고,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내 머리 속에서 이미 나는 그 유명한 '데이빗 베컴'(내가 제일 좋아하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들어올 때까지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축구 선수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온 후 축구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 한 게 아니었다.
"야! 송 땜방, 얼른 일어나!"
나는 말 그대로 땜방이었다. 부상선수가 생겨야만 불리워 지는 내 이름, 축구장에서 아주 가끔 내 이름이 불리면 나는 두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정해진 포지션도 없이 빈곳만 메워야 하는 땜방, 스위퍼, 중앙수비, 오른쪽 윙백에다 플레이 메이커까지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였다. 마치 이집 저집 넘나들며 셋방살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처음 가졌던 축구선수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꿈은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청소년 대표 시절, 경기가 끝나면 수많은 기자단이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플래시가 번쩍이고 운동장은 삽시간에 인터뷰 장이 되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 나와 숙소로 걸어갔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쓸쓸히 걸어가는 동안,
'앞으로 축구를 계속해야 하나?'
'나는 원래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가끔 친구들이
"종국아, 너는 언제 경기에 나와? 너 축구 선수 맞아?"
하고 농담처럼 이야기할 때면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청소년대표였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해 나는 알아주는 기자도 관객도 없는 무명선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기회는 왔다. 화려한 플레이도, 눈에 띄는 실력발휘도 없었지만 94년 배재고시절, 대통령배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한 경력 덕분에 당시 국가대표팀감독이었던 허정무감독의 주목을 받아 올림픽 대표선수로도 선발되었다. 오랜만에 대표선수로서 멋진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전날 연습경기에서 혼신을 다해 그라운드를 달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더 이상 한발자국도 뛰지 못하고, '휘청'하고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내 무릎을 파고들었다. 어릴 적부터 약했던 무릎은 축구를 하는 내게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그 시절 나는 축구를 향해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고,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다고 했던가? 휴식과 꾸준한 치료로 재작년 말부터 무릎통증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고, 나의 가능성을 믿어준 감독님 덕분에 월드컵국가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난해 2월,아랍에미리트 전을 하루 앞 둔 날이었다. 자체 연습경기를 하고 있는데, 히딩크 감독님께서 내게 호통을 치시며 다가 오셨다.
"Do not play fucking gallery game(그 따위 보여주기 위한 플레이는 하지 마라)!"
감독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내 플레이에 대해서 심하게 꾸짖으셨다. 그 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날 심하게 야단을 맞은 나는 잔뜩 움츠러든 마음으로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님께서 급하게 나를 부르시더니
"종국아, 이번 경기에 한 번 나가 볼래?"
하고 물으셨다. 부상선수를 대신해서 내가 뛰게 된 것이었다. 태극마크를 달던 순간! 내 온몸은 터질 것 같은 흥분과 기쁨으로 휩싸였다. 나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러나 전반 24분, 우리 팀은 아랍에미리트의 주마에게 첫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렇게 질 수는 없다!' 나는 한 순간도 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몸을 부딪혀 가며 상대선수를 피해 볼을 몰아갔다. 그때마다 상대선수도 필사적으로 따라 붙었다. 종료 시간이 임박해 오자, 선수들은 점점 더 급박하고 빠른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했다. 치열한 대결이었다. 전반 종료 1분을 남기고 있는 찰나, 짧은 틈이 있었고, 나는 거의 각도가 없어 보이는 골문을 향해 강슛을 날려버렸다.
"골인!!!"
관중들은 천둥같은 함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동점골이었다. 목이 메이고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운동장에서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외롭게 뛰던 시간이 떠올랐다. '땜방인 내가 골을 넣다니... .'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감독님은 내게 잊을 수 없는 말을 해 주었다.
"종국아, 전지훈련에서 나는 너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기대를 했고, 결국 너는 해냈구나!"
처음 대표팀에 뽑히고,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기가 죽어있는 나를 감독님은 멀리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명시절, 땜방 역할을 하면서 익혀 두었던 다양한 플레이가 히딩크 감독의 관심을 끌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 월드컵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월드컵이 축구를 향한 오르막 길의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르막 길의 한 지점이고, 나는 그 곳을 향해 힘껏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힘들 때 마다 나와 함께 걸어 주셨던 그 분,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을 때 도 나와 함께 하셨던 그 분께 감사드리고 싶다.
-송종국은 현재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이며, 부산 아이콘스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백상 체육 대상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낮은울타리중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쑥스럽고 낯선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근사한 집에서 살아본 적도, 자랑할 만한 것도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는 내가 '황태자'라니 어울리지 않는 소리다.
나는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대가리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가리'라는 이름처럼 우리 집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얼마나 높은 곳이었는지 나는 집에 가려면 매번 웃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나는 그 곳이 좋았다. 동네 아이들과 마음껏 산과 개울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겨울이면 내리막길을 따라 신나게 눈썰매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게 오르던 대가리의 우리 집 덕분에 축구선수가 되는 오르막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포기하지 않고 내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내가 축구를 하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송종국! 너 축구부에 들어와라!"
우리 학교 축구부였던 진섭이 형(박진섭)의 제안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한창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공놀이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학교의 특활 시간에도 축구를 하고 싶어서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때가 바로 축구를 향한 오르막길의 첫걸음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 축구화를 신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인다. 마치 축구화에 날개라도 달린 것 마냥 나는 그날 온종일 하늘을 붕붕 떠 다녔다. 축구화를 신고,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내 머리 속에서 이미 나는 그 유명한 '데이빗 베컴'(내가 제일 좋아하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들어올 때까지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축구 선수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온 후 축구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 한 게 아니었다.
"야! 송 땜방, 얼른 일어나!"
나는 말 그대로 땜방이었다. 부상선수가 생겨야만 불리워 지는 내 이름, 축구장에서 아주 가끔 내 이름이 불리면 나는 두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정해진 포지션도 없이 빈곳만 메워야 하는 땜방, 스위퍼, 중앙수비, 오른쪽 윙백에다 플레이 메이커까지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였다. 마치 이집 저집 넘나들며 셋방살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처음 가졌던 축구선수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꿈은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청소년 대표 시절, 경기가 끝나면 수많은 기자단이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플래시가 번쩍이고 운동장은 삽시간에 인터뷰 장이 되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 나와 숙소로 걸어갔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쓸쓸히 걸어가는 동안,
'앞으로 축구를 계속해야 하나?'
'나는 원래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가끔 친구들이
"종국아, 너는 언제 경기에 나와? 너 축구 선수 맞아?"
하고 농담처럼 이야기할 때면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청소년대표였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해 나는 알아주는 기자도 관객도 없는 무명선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기회는 왔다. 화려한 플레이도, 눈에 띄는 실력발휘도 없었지만 94년 배재고시절, 대통령배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한 경력 덕분에 당시 국가대표팀감독이었던 허정무감독의 주목을 받아 올림픽 대표선수로도 선발되었다. 오랜만에 대표선수로서 멋진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전날 연습경기에서 혼신을 다해 그라운드를 달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더 이상 한발자국도 뛰지 못하고, '휘청'하고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내 무릎을 파고들었다. 어릴 적부터 약했던 무릎은 축구를 하는 내게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그 시절 나는 축구를 향해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고,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다고 했던가? 휴식과 꾸준한 치료로 재작년 말부터 무릎통증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고, 나의 가능성을 믿어준 감독님 덕분에 월드컵국가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난해 2월,아랍에미리트 전을 하루 앞 둔 날이었다. 자체 연습경기를 하고 있는데, 히딩크 감독님께서 내게 호통을 치시며 다가 오셨다.
"Do not play fucking gallery game(그 따위 보여주기 위한 플레이는 하지 마라)!"
감독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내 플레이에 대해서 심하게 꾸짖으셨다. 그 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날 심하게 야단을 맞은 나는 잔뜩 움츠러든 마음으로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님께서 급하게 나를 부르시더니
"종국아, 이번 경기에 한 번 나가 볼래?"
하고 물으셨다. 부상선수를 대신해서 내가 뛰게 된 것이었다. 태극마크를 달던 순간! 내 온몸은 터질 것 같은 흥분과 기쁨으로 휩싸였다. 나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러나 전반 24분, 우리 팀은 아랍에미리트의 주마에게 첫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렇게 질 수는 없다!' 나는 한 순간도 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몸을 부딪혀 가며 상대선수를 피해 볼을 몰아갔다. 그때마다 상대선수도 필사적으로 따라 붙었다. 종료 시간이 임박해 오자, 선수들은 점점 더 급박하고 빠른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했다. 치열한 대결이었다. 전반 종료 1분을 남기고 있는 찰나, 짧은 틈이 있었고, 나는 거의 각도가 없어 보이는 골문을 향해 강슛을 날려버렸다.
"골인!!!"
관중들은 천둥같은 함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동점골이었다. 목이 메이고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운동장에서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외롭게 뛰던 시간이 떠올랐다. '땜방인 내가 골을 넣다니... .'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감독님은 내게 잊을 수 없는 말을 해 주었다.
"종국아, 전지훈련에서 나는 너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기대를 했고, 결국 너는 해냈구나!"
처음 대표팀에 뽑히고,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기가 죽어있는 나를 감독님은 멀리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명시절, 땜방 역할을 하면서 익혀 두었던 다양한 플레이가 히딩크 감독의 관심을 끌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 월드컵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월드컵이 축구를 향한 오르막 길의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르막 길의 한 지점이고, 나는 그 곳을 향해 힘껏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힘들 때 마다 나와 함께 걸어 주셨던 그 분,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을 때 도 나와 함께 하셨던 그 분께 감사드리고 싶다.
-송종국은 현재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이며, 부산 아이콘스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백상 체육 대상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낮은울타리중에서-
22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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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유학생회
4강이 치루어지기전 6/20일자 프리챌에서 게시판에 뜬 글입니다.
[펌] 당신은 한국팀을 응원할 자격이 있습니까?
전 축구에 대해 잘 모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냥 한국팀이 잘 해주는 것에 대해 기쁘기만 합니다.
골 넣었다며 다들 펄쩍펄쩍 뛰며 얼싸안고 기뻐하는 사이로
잽싸게 티비 보며 "야~ 누가 넣었어~"
라고 말해주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축구에 대해 정말 문외한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제 이탈리아전을 할 때 학원 수업이 있었던 지라 전반전을 놓치고 서둘러 친구들이 있는 술집으로 갔습니다. 갔더니 다들 얼굴 표정들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어째서 그러냐고 했더니, 우리나라가 1:0으로 지고 있으며 안정환이 패널티킥을 놓쳤고,거기다가 설기현은 번번히 골을 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단 제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옆 자리나 뒷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너무 못한다,
우리나라 졌다, 이게 무슨 축구냐는 식의 반응들이 계속 연거푸 튀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설기현의 골, 그리고 안정환의 골든골.
사람들은 약 30분 전에 했던 모든 말들을 잊어버린듯 설기현과 안정환의 칭찬을 침튀기며 해댔고 저는 그 사이에서 약간은 어안이벙벙하게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 설기현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만 축구 경기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울어버려야 했습니다.
골 세레모니가 너무 싱겁지 않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너무 오랫동안 골을 넣지 못해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는 그의 멋적은 말에 울컥하고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탔었을까요.
그가 미국전, 포르투갈전에서 매번 2∼3차례 골찬스를 무위로 날려버리자 그를 빼버려야 한다는 말이 하늘을 찔러댔죠.
그는 만삭의 아내에게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전화도 할 수 없었답니다. 안정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칭찬을 받고 있지만 만약 우리가 이탈리아에게 그대로 져버렸다면 안정환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감독인 히딩크가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비난했을 테지요.
끊임없이 우리들은 안정환 빼라, 제발 좀 빼라,
쟤는 후반에 넣는 게 훨씬 낫다라는 말들을 해댔죠.
이제 겨우 두번째 전후반 경기를 뛰는 선수였습니다.
히딩크는 그를 믿어주었구요.
안정환 인터뷰에서 그러더군요.
히딩크 감독이 만약 교체시켰다면 그 패널티킥 실축이 두고 두고 마음에 평생토록 앙금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중간에 히딩크가 그를 빼버렸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며옵니다.
그것 외에도 이탈리아에게 져서 우리나라에서 채이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또 말도 안 되는 서러움을 벤치 한 구석에서 당하고 있을 안정환 선수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찔해집니다.
어제 열기가 어느정도 가라앉은 후 친구들끼리 이야기하기를, 만약 안정환이 못 넣었으면 천하의 '매국노'나 '역적'이 되었을 거라고 멋적은 얼굴들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이탈리아전을 졌으면 어땠을까요.
각종 언론들에서 또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물론 16강을 이뤘으니 크게 나무라진 못하겠지만, 아직도 강팀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직도 골결정력은 너무도 미약하다.
덩달아 지난 미국전 때 이을용의 패널티킥 실축 장면까지 더해져서 실축에 대한 비판이 각 방송마다, 신문마다 가득 메워졌겠지요.
결국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16강이라는 염원을 달성했고 그것도 더해 8강까지 갔습니다.
스페인을 이기면 4강이라는, 꿈에도 보지 못했던 그런 현실을 맛보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페인전을 질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설기현은 또 다시 하늘로 공을 차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을용, 안정환 선수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페널티킥을 실축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골을 넣은 황선홍 선수나 박지성 선수, 유상철 선수도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똑같이 죽여라, 살려라 욕을 하시겠습니까?
그들의 경기에 대해서 아쉬워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반 45분, 후반 45분을 뛰는 것은 술집에 앉아 맥주를 즐기며 보거나 거리에 앉아 응원하는 우리가 아니라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도 모자라 이리저리 부딪혀 오는 덩치큰 외국 선수들에게 치이면서도 둥근 공 하나를 발 끝에 매달고 미친 듯이 달리는 우리의 선수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누구 친구하나가 우리 머리를 때리거나 어딘가 부딪혔을 때 얼마나 아픈지를......
그것을 90분 내내, 혹은 120분 내내 당하면서도 또 뛰어야 하는 우리 선수들을 말입니다.
저는 응원 구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괜찮아! 괜찮아!"입니다.
이을용 선수가 그랬다지요.
지난 미국전 패널티 킥을 실축했을 때 풀이 죽어 돌아오면서
"국민들이 아마 날 죽이려 들겠지?"라고 했다는 말.
이 말을 들으시고도 마음이 정말 찢어질 듯 아프지 않으시다면 한국팀 응원을 중지하십시오.
잘할때만 아끼시고 못할때는 여지없이 내치시는 당신은 축구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실수에 대해 용서할 수 없으시다면
붉은 옷을 벗고 태극기를 내려놓으십시오.
정말 우리 한국팀을 사랑하신다면 혹 이번 스페인전에서 지게되더라도 있는 힘껏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아"를 소리 높여 외쳐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하나, 둘씩 더해져서 우리보다 더욱 슬퍼하고 있을 우리 멋진 한국 선수들에게 들릴 수 있도록, 대한 민국이 하나 가득 한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아"로 울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바뀌는것에 두려워 마시고, 도전하세요. 화이팅~!
[펌] 당신은 한국팀을 응원할 자격이 있습니까?
전 축구에 대해 잘 모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냥 한국팀이 잘 해주는 것에 대해 기쁘기만 합니다.
골 넣었다며 다들 펄쩍펄쩍 뛰며 얼싸안고 기뻐하는 사이로
잽싸게 티비 보며 "야~ 누가 넣었어~"
라고 말해주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축구에 대해 정말 문외한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제 이탈리아전을 할 때 학원 수업이 있었던 지라 전반전을 놓치고 서둘러 친구들이 있는 술집으로 갔습니다. 갔더니 다들 얼굴 표정들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어째서 그러냐고 했더니, 우리나라가 1:0으로 지고 있으며 안정환이 패널티킥을 놓쳤고,거기다가 설기현은 번번히 골을 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단 제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옆 자리나 뒷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너무 못한다,
우리나라 졌다, 이게 무슨 축구냐는 식의 반응들이 계속 연거푸 튀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설기현의 골, 그리고 안정환의 골든골.
사람들은 약 30분 전에 했던 모든 말들을 잊어버린듯 설기현과 안정환의 칭찬을 침튀기며 해댔고 저는 그 사이에서 약간은 어안이벙벙하게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 설기현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만 축구 경기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울어버려야 했습니다.
골 세레모니가 너무 싱겁지 않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너무 오랫동안 골을 넣지 못해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는 그의 멋적은 말에 울컥하고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탔었을까요.
그가 미국전, 포르투갈전에서 매번 2∼3차례 골찬스를 무위로 날려버리자 그를 빼버려야 한다는 말이 하늘을 찔러댔죠.
그는 만삭의 아내에게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전화도 할 수 없었답니다. 안정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칭찬을 받고 있지만 만약 우리가 이탈리아에게 그대로 져버렸다면 안정환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감독인 히딩크가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비난했을 테지요.
끊임없이 우리들은 안정환 빼라, 제발 좀 빼라,
쟤는 후반에 넣는 게 훨씬 낫다라는 말들을 해댔죠.
이제 겨우 두번째 전후반 경기를 뛰는 선수였습니다.
히딩크는 그를 믿어주었구요.
안정환 인터뷰에서 그러더군요.
히딩크 감독이 만약 교체시켰다면 그 패널티킥 실축이 두고 두고 마음에 평생토록 앙금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중간에 히딩크가 그를 빼버렸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며옵니다.
그것 외에도 이탈리아에게 져서 우리나라에서 채이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또 말도 안 되는 서러움을 벤치 한 구석에서 당하고 있을 안정환 선수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찔해집니다.
어제 열기가 어느정도 가라앉은 후 친구들끼리 이야기하기를, 만약 안정환이 못 넣었으면 천하의 '매국노'나 '역적'이 되었을 거라고 멋적은 얼굴들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이탈리아전을 졌으면 어땠을까요.
각종 언론들에서 또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물론 16강을 이뤘으니 크게 나무라진 못하겠지만, 아직도 강팀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직도 골결정력은 너무도 미약하다.
덩달아 지난 미국전 때 이을용의 패널티킥 실축 장면까지 더해져서 실축에 대한 비판이 각 방송마다, 신문마다 가득 메워졌겠지요.
결국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16강이라는 염원을 달성했고 그것도 더해 8강까지 갔습니다.
스페인을 이기면 4강이라는, 꿈에도 보지 못했던 그런 현실을 맛보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페인전을 질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설기현은 또 다시 하늘로 공을 차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을용, 안정환 선수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페널티킥을 실축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골을 넣은 황선홍 선수나 박지성 선수, 유상철 선수도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똑같이 죽여라, 살려라 욕을 하시겠습니까?
그들의 경기에 대해서 아쉬워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반 45분, 후반 45분을 뛰는 것은 술집에 앉아 맥주를 즐기며 보거나 거리에 앉아 응원하는 우리가 아니라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도 모자라 이리저리 부딪혀 오는 덩치큰 외국 선수들에게 치이면서도 둥근 공 하나를 발 끝에 매달고 미친 듯이 달리는 우리의 선수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누구 친구하나가 우리 머리를 때리거나 어딘가 부딪혔을 때 얼마나 아픈지를......
그것을 90분 내내, 혹은 120분 내내 당하면서도 또 뛰어야 하는 우리 선수들을 말입니다.
저는 응원 구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괜찮아! 괜찮아!"입니다.
이을용 선수가 그랬다지요.
지난 미국전 패널티 킥을 실축했을 때 풀이 죽어 돌아오면서
"국민들이 아마 날 죽이려 들겠지?"라고 했다는 말.
이 말을 들으시고도 마음이 정말 찢어질 듯 아프지 않으시다면 한국팀 응원을 중지하십시오.
잘할때만 아끼시고 못할때는 여지없이 내치시는 당신은 축구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실수에 대해 용서할 수 없으시다면
붉은 옷을 벗고 태극기를 내려놓으십시오.
정말 우리 한국팀을 사랑하신다면 혹 이번 스페인전에서 지게되더라도 있는 힘껏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아"를 소리 높여 외쳐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하나, 둘씩 더해져서 우리보다 더욱 슬퍼하고 있을 우리 멋진 한국 선수들에게 들릴 수 있도록, 대한 민국이 하나 가득 한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아"로 울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바뀌는것에 두려워 마시고, 도전하세요. 화이팅~!
22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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