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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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동현인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99년10월부터 12월초까지.. 있었던스케이트
선수요..00년여름이랑겨울에도 갔었죠아마..
그래두 제일기억나는건 99년인거같아요..
긴시간 동안 교회다니면서 마음이 제일
안정되었던 시간이거든요.. 기도 하면서
마음도편안해지고.. 시합도 탈때마다
좋은성적나와서 행복했어요.. 우리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캘거리 밤하늘과불빛이 너무 보고 싶어요..
몇일전에 형국이형이랑 만났어요.. 지금은 서로
멀리떨어져있지만 친형제처럼 생각하구 만나기도해요
근데 우리둘.. 지금 너무 힘들어요.. 너무 아픈시간을
이렇게 느껴가며 지내는게 너무 고통스러워요..
형이랑 영화본다음에 울었어요.. 서로 아무말없이..
서로 너무 힘들다는거.. 알고는 있었지만..
나중에 잘될거라는거 믿지만.. 지금이너무힘드네요..
얼마전에 저다쳤어요.. 그래서 운동두못하고있고..
아무것도 못하는내가 너무싫고.. 안다쳤을땐 몸이
이렇게 소중한것두 몰랐던 나두 너무 싫고..
이제 기도 할려구요... 99년 어느겨울날처럼..
99년10월부터 12월초까지.. 있었던스케이트
선수요..00년여름이랑겨울에도 갔었죠아마..
그래두 제일기억나는건 99년인거같아요..
긴시간 동안 교회다니면서 마음이 제일
안정되었던 시간이거든요.. 기도 하면서
마음도편안해지고.. 시합도 탈때마다
좋은성적나와서 행복했어요.. 우리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캘거리 밤하늘과불빛이 너무 보고 싶어요..
몇일전에 형국이형이랑 만났어요.. 지금은 서로
멀리떨어져있지만 친형제처럼 생각하구 만나기도해요
근데 우리둘.. 지금 너무 힘들어요.. 너무 아픈시간을
이렇게 느껴가며 지내는게 너무 고통스러워요..
형이랑 영화본다음에 울었어요.. 서로 아무말없이..
서로 너무 힘들다는거.. 알고는 있었지만..
나중에 잘될거라는거 믿지만.. 지금이너무힘드네요..
얼마전에 저다쳤어요.. 그래서 운동두못하고있고..
아무것도 못하는내가 너무싫고.. 안다쳤을땐 몸이
이렇게 소중한것두 몰랐던 나두 너무 싫고..
이제 기도 할려구요... 99년 어느겨울날처럼..
23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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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스케이트 훈련차 갔었던..
사진,자료실에두 우리팀과
교회분들이찍은 사진이있네요^^
암튼반가워요 글구 저아시는분
메일보내줘요~
스케이트 훈련차 갔었던..
사진,자료실에두 우리팀과
교회분들이찍은 사진이있네요^^
암튼반가워요 글구 저아시는분
메일보내줘요~
23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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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유학생회
이글은 캘거리 한인 실협회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의 교직생활 중에 있었던 넌픽션 스토리이죠, 6.25를 생각하면서 써보았답니
다. 읽는 이 마다 은혜받으시기 기원합니다. (글쓴이: 조슈아 리)
6 월은 호국보훈의 달, 육니오(6.25)가 있고 이승복 어린이와 공산주의가 생각나는 달이다. 김일성은 죽었지만 아직도 한반도에는 공산주의가 남아있는 채, 천만이산가족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인 정아엄마 이야기를 할까 보다.
그러니까 80 년대 후반 진양군의 한 시골학교(남녀공학고교)에 근무할 때다. 3 월초 가정방문차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반 정아네 집에 들렀을 때 처음으로 정아엄마의 삶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정아엄마는 1943 년 이북 평안도에서 태어났는데 해방이 된 후(1945) 김일성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1946) 남한과의 교류를 끊고 38도 선에 철조망을 세울 즘인 1948 년 봄에 부모님의 등에 업혀 비밀리에 월남하여 남한 서울근처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정아엄마가 6 살때인 이듬해(1949)봄에 정아 할아버지께서 이북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 와야겠다기에 정아 할머니가 지금 이북가면 철조망에 막혀 다시는 못 내려오니 가지 말라고 사정하셨지만 부모님을 이북에 두고 우리끼리 살수야 있나 하시며 마침내 떠나게 되는데 '떠날 때는 말없이'가 아니라 어린 정아엄마의 손을 꼭잡고 뽀뽀하고 사탕주면서 "아빠 곧 돌아올게" 하시더라나.
그때 어린 정아엄마는 엄마가 우니까 뭔가 불안해서 "아빠 가지마!" 하면서 함께 울었다는데. 그것이 아빠와의 마지막 이별이 되었을 줄이야......!
그때 월북한 뒤로 김일성은 38 선 철조망 경비를 대폭 보강하고 월남하는 자들을 무조건 총살토록 하였으며 곧이어 1950 년 6 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탕! 탕!....'6.25 를 일으켰으니......!
아빠를 그리다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잠못들고 헤매일 때 아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죠.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맨발로 끌며 절며 살아만 돌아오세요......외쳤건만 그로부터 수십년 정아 할머니는 생과부로 남편을 그리면서 아이들 키우시랴 고생고생하시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고 남한 땅에는 정아엄마와 남동생 하나만이 외롭게 남겨졌으니......
이제 어린 정아엄마의 한평생 소원은 이북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 뵈는 것......세월은 살같이 흘러 정아엄마도 결혼하여 이북과는 더욱 거리가 먼 '진주라 천리길' 진주땅 한구석에 소 몰고 논밭 가는 농부의 아내가 되어 1 남 1 녀를 낳게 되는데... 운명의 신은 더욱 가혹하여 정아아빠가 농약에 중독되어 그만 먼저 돌아가시게 되고 정아엄마는 할머니처럼 과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해진 이때에 동네 한 권사님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정아엄마의 마음속엔 천국이 자라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정아엄마는 기도 때마다 잊지 않고 `주님 살아 생전에 이북 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를 기도하게 되었다.
7~8 년째가 되어서 우연히 동네 면사무소 직원의 노력으로 통일원에 이산가족 생사확인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우여곡절끝에 북한당국으로부터 생존확인 통보를 받게 되는데...... 이제부터 정아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부디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계속하였다.
또다시 몇 해가 흘러 1980 년대 초에 이르러 분단이후 처음으로 정부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북한으로 보내기 위해 전국 천만 이산가족 중에서 가리고 또 가려서 50~60 명정도 뽑는데 거기에 뽑히게 되었다나...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원 고속버스를 타고 임진각 자유의 다리를 넘어 피양(평양)으로 갔는데 북한당국이 정아엄마의 인생이야기를 이미 전해 듣고 특별 배려를 하여 이산가족 중에서 제 1 착으로 꿈에도 그리고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는데 이때 아버지와 딸이 얼싸안고 대성통곡하던 모습을 남북한 취재기자들이 너도나도 찍어서 남북한 전국 일간지에 톱뉴스로 일제이 보도되고 전세계 주요 언론에도 토픽뉴스로 타전 되었으며 국내외 수백 수천 메스컴에 사진과 함께 인생이야기가 보도되었으니 바야흐로 정아엄마의 남북분단으로 인한 슬픈 인생스토리와 아버지를 안고 통곡하는 모습은 이산가족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전국 각처로부터 위로의 서신이 전해오고 도지사, 군수, 국회의원등 각종 유명인사들의 방문과 하사금(위로금)이 전해지고....정아엄마의 꼬박 10 년 기도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꿈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으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니라'는 말씀처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나중에 진호(정아오빠)는 공부를 착실히 하여 경북사대 역사과에 진학 하였고 그 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며 내가 담임했던 정아는 엄마 혼자 둘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가 너무 벅차기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산의 한 개인병원에 경리직원으로 일하다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내왓으며, 첫아들 낳고서 몇 달 뒤 전화가 와서 "선생님, 아이 기르기가 쉽지 않네요. 매일 목욕 시켜야 되고...(어쩌구)..."하기에 "그럼, 그러면서 키워준 부모의 은혜를 깨닫게 되지. 신랑말 잘 듣고 자주 고향에 어머님 뵈러 가거라. 갈 때마다 용돈도 꼭꼭 드려야돼!"하는 통화를 끝으로(내가 학교 옮기고 이사 다니는 통에)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당장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믿고 간구하고 기다리면 끝에는 응답이 오게 됩니다.
천사가 하나님께 갔다드릴 기도의 잔이 차야 된답니다.
단, 인간의 정욕과 욕심에 따라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을 구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Don't forget to remember!!!
휴~ 길기도 하다... 근데 다 읽었다!
정아는 지금 33세쯤 되는 아지매...학생때는 쬐에끔 날씬하고 예쁜편이였답니다.
정아네 후일담이 궁금하신분은 저에게 물어도 모릅니다~!!
이민온지 4년동안 연락을 못했습니다. 재송[sorry!] `끝`
저의 교직생활 중에 있었던 넌픽션 스토리이죠, 6.25를 생각하면서 써보았답니
다. 읽는 이 마다 은혜받으시기 기원합니다. (글쓴이: 조슈아 리)
6 월은 호국보훈의 달, 육니오(6.25)가 있고 이승복 어린이와 공산주의가 생각나는 달이다. 김일성은 죽었지만 아직도 한반도에는 공산주의가 남아있는 채, 천만이산가족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인 정아엄마 이야기를 할까 보다.
그러니까 80 년대 후반 진양군의 한 시골학교(남녀공학고교)에 근무할 때다. 3 월초 가정방문차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반 정아네 집에 들렀을 때 처음으로 정아엄마의 삶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정아엄마는 1943 년 이북 평안도에서 태어났는데 해방이 된 후(1945) 김일성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1946) 남한과의 교류를 끊고 38도 선에 철조망을 세울 즘인 1948 년 봄에 부모님의 등에 업혀 비밀리에 월남하여 남한 서울근처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정아엄마가 6 살때인 이듬해(1949)봄에 정아 할아버지께서 이북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 와야겠다기에 정아 할머니가 지금 이북가면 철조망에 막혀 다시는 못 내려오니 가지 말라고 사정하셨지만 부모님을 이북에 두고 우리끼리 살수야 있나 하시며 마침내 떠나게 되는데 '떠날 때는 말없이'가 아니라 어린 정아엄마의 손을 꼭잡고 뽀뽀하고 사탕주면서 "아빠 곧 돌아올게" 하시더라나.
그때 어린 정아엄마는 엄마가 우니까 뭔가 불안해서 "아빠 가지마!" 하면서 함께 울었다는데. 그것이 아빠와의 마지막 이별이 되었을 줄이야......!
그때 월북한 뒤로 김일성은 38 선 철조망 경비를 대폭 보강하고 월남하는 자들을 무조건 총살토록 하였으며 곧이어 1950 년 6 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탕! 탕!....'6.25 를 일으켰으니......!
아빠를 그리다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잠못들고 헤매일 때 아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죠.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맨발로 끌며 절며 살아만 돌아오세요......외쳤건만 그로부터 수십년 정아 할머니는 생과부로 남편을 그리면서 아이들 키우시랴 고생고생하시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고 남한 땅에는 정아엄마와 남동생 하나만이 외롭게 남겨졌으니......
이제 어린 정아엄마의 한평생 소원은 이북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 뵈는 것......세월은 살같이 흘러 정아엄마도 결혼하여 이북과는 더욱 거리가 먼 '진주라 천리길' 진주땅 한구석에 소 몰고 논밭 가는 농부의 아내가 되어 1 남 1 녀를 낳게 되는데... 운명의 신은 더욱 가혹하여 정아아빠가 농약에 중독되어 그만 먼저 돌아가시게 되고 정아엄마는 할머니처럼 과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해진 이때에 동네 한 권사님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정아엄마의 마음속엔 천국이 자라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정아엄마는 기도 때마다 잊지 않고 `주님 살아 생전에 이북 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를 기도하게 되었다.
7~8 년째가 되어서 우연히 동네 면사무소 직원의 노력으로 통일원에 이산가족 생사확인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우여곡절끝에 북한당국으로부터 생존확인 통보를 받게 되는데...... 이제부터 정아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부디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계속하였다.
또다시 몇 해가 흘러 1980 년대 초에 이르러 분단이후 처음으로 정부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북한으로 보내기 위해 전국 천만 이산가족 중에서 가리고 또 가려서 50~60 명정도 뽑는데 거기에 뽑히게 되었다나...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원 고속버스를 타고 임진각 자유의 다리를 넘어 피양(평양)으로 갔는데 북한당국이 정아엄마의 인생이야기를 이미 전해 듣고 특별 배려를 하여 이산가족 중에서 제 1 착으로 꿈에도 그리고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는데 이때 아버지와 딸이 얼싸안고 대성통곡하던 모습을 남북한 취재기자들이 너도나도 찍어서 남북한 전국 일간지에 톱뉴스로 일제이 보도되고 전세계 주요 언론에도 토픽뉴스로 타전 되었으며 국내외 수백 수천 메스컴에 사진과 함께 인생이야기가 보도되었으니 바야흐로 정아엄마의 남북분단으로 인한 슬픈 인생스토리와 아버지를 안고 통곡하는 모습은 이산가족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전국 각처로부터 위로의 서신이 전해오고 도지사, 군수, 국회의원등 각종 유명인사들의 방문과 하사금(위로금)이 전해지고....정아엄마의 꼬박 10 년 기도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꿈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으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니라'는 말씀처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나중에 진호(정아오빠)는 공부를 착실히 하여 경북사대 역사과에 진학 하였고 그 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며 내가 담임했던 정아는 엄마 혼자 둘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가 너무 벅차기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산의 한 개인병원에 경리직원으로 일하다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내왓으며, 첫아들 낳고서 몇 달 뒤 전화가 와서 "선생님, 아이 기르기가 쉽지 않네요. 매일 목욕 시켜야 되고...(어쩌구)..."하기에 "그럼, 그러면서 키워준 부모의 은혜를 깨닫게 되지. 신랑말 잘 듣고 자주 고향에 어머님 뵈러 가거라. 갈 때마다 용돈도 꼭꼭 드려야돼!"하는 통화를 끝으로(내가 학교 옮기고 이사 다니는 통에)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당장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믿고 간구하고 기다리면 끝에는 응답이 오게 됩니다.
천사가 하나님께 갔다드릴 기도의 잔이 차야 된답니다.
단, 인간의 정욕과 욕심에 따라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을 구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Don't forget to remember!!!
휴~ 길기도 하다... 근데 다 읽었다!
정아는 지금 33세쯤 되는 아지매...학생때는 쬐에끔 날씬하고 예쁜편이였답니다.
정아네 후일담이 궁금하신분은 저에게 물어도 모릅니다~!!
이민온지 4년동안 연락을 못했습니다. 재송[sorry!] `끝`
23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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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kyujang.co.kr/HTML/mission/loveletter/otherlist.html
출처 : http://www.kyujang.co.kr/HTML/mission/loveletter/otherlist.html
23 years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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