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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날짜:
2024/11/16
Title: 믿음대로, 행함대로, 말씀대로
말씀:
마16:27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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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들 중에 국문과 나오신 분 있습니까? 성가대 하시는 김형진 집사님이 국문과 출신이지요? 국문과 나오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카테고리:
청년유학생회
할렐루야 !
지난 주, 그리고 지 지난주 우리 교회에 오신 김동우, 김차란, 임중우, 김기훈 형제 자매님을 환영합니다. 여기 캘거리에 지내시면서 혹 어려운 일이 있으면 괜히 염려하지 마시고 언제든지 물어 보시고 도움도 요청하세요. 혼자서 어려운 문제도 여기 조금 더 오래 사신 분들에게는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잖아요 ?
그리고 회장 이상국 형제님이나 부회장 채혜영 자매님에게 물어보시고요. 그리고 청년 유학생을 지도하고 계시는 이승형 집사님도 도와주실 수 있고요. 아무튼 저희 교회에 왔으니 열심히 봉사도 하고 예배도 참석했으면 좋겠네요. 특별히 철야 예배는 청년들이 각종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드리는데 보기가 좋습니다. 철야 예배 마치고 집에 가는 것은 염려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이번 토요일 5시에 교회에서 청년 유학생들 식사 및 교제가 있겠다고 하는데... 물론 음식 준비도 자체적으로 하고... 연락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운동도 좋아하시면 교회에 있는 탁구대(얼마전 최상급으로 하나 더 장만했음)가 있으니 같이 운동도 하시고요. 혹 탁구 라켓은 식당 선반 위에나 아니면 식당 홀 벽쪽에 문을 열면 있고요. 그리고 배드민턴 콕과 라켓, 그리고 각종 공은 체육관 창고에 있고요. 아무튼 이곳 캘거리에 있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뜻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그리고 지 지난주 우리 교회에 오신 김동우, 김차란, 임중우, 김기훈 형제 자매님을 환영합니다. 여기 캘거리에 지내시면서 혹 어려운 일이 있으면 괜히 염려하지 마시고 언제든지 물어 보시고 도움도 요청하세요. 혼자서 어려운 문제도 여기 조금 더 오래 사신 분들에게는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잖아요 ?
그리고 회장 이상국 형제님이나 부회장 채혜영 자매님에게 물어보시고요. 그리고 청년 유학생을 지도하고 계시는 이승형 집사님도 도와주실 수 있고요. 아무튼 저희 교회에 왔으니 열심히 봉사도 하고 예배도 참석했으면 좋겠네요. 특별히 철야 예배는 청년들이 각종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드리는데 보기가 좋습니다. 철야 예배 마치고 집에 가는 것은 염려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이번 토요일 5시에 교회에서 청년 유학생들 식사 및 교제가 있겠다고 하는데... 물론 음식 준비도 자체적으로 하고... 연락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운동도 좋아하시면 교회에 있는 탁구대(얼마전 최상급으로 하나 더 장만했음)가 있으니 같이 운동도 하시고요. 혹 탁구 라켓은 식당 선반 위에나 아니면 식당 홀 벽쪽에 문을 열면 있고요. 그리고 배드민턴 콕과 라켓, 그리고 각종 공은 체육관 창고에 있고요. 아무튼 이곳 캘거리에 있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뜻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22 years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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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조슈아리 칼럼
직장을 몇 년마다(최장 5년) 옮기기에 부득이 교회도 한곳을 오래 섬기지 못하고 이곳저곳 옮기게 되었으나 가끔씩 고향에 오면 꼭 예전부터 다녔던 K장로교회(고신 측)에 출석하였었다.
당시 K장로교회는 성도가 한 200여명 되었고 P목사님께서 그곳에서 16년째 말씀을 증거하고 계셨다.
한번은 주말에 고향에 갔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목사님 되에 있는 십자가가 부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크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기겠구나' 하고 기도하던 중 서너 주가 지나서 들리는 소문에 K교회 성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 않겠다 하고 심지어 쫏아 내려고도 한다 하지 않는가?
사연을 알아본 즉 P목사님이 한 여집사와 몰래 다방에도 자주 들락거리고 멀리 동대구역 그릴(고급식당)에서 단 둘이 고기 뜯는 모습이 다른 여집사에게 들켰다지를 않나!
그래서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어서 (부풀리고 부풀려서) 목사님이 유부녀 상습간통범으로까지 몰리는 바람에 성도들이 크게 술렁이고 특히 한 장로님과 집사님 너댓가정이 성도들의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강경하게 목사님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목사님이 더이상 강단에 서지 못하고 주저않고 말았다.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해명해도 들어려고도 않았으며 해명을 해도 믿어줄 자세들도 아니었다. 참으로 모두들 이상하리 만큼 강퍅하게(Harden) 변하고들 말았다.
기나긴 15년 세월동안 주일낮예배로, 주일밤예배로, 매일 새벽기도회로 (당시 한국교회는 대부분 새벽제단을 지켰음, 그 뒤 계속 새벽제단에 불이 꺼지다가 IMF 이후 다시 새벽제단을 쌓는 교회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수요기도회로, 심방으로... 얼마나 많은 영의 양식을 주의 종으로부터 공급받았을텐가....
그동안 저네들의 영혼이 잘됨으로써 범사가 잘되고 강건(건강)하여져서 오늘의 부요에 이른 은혜를 어찌 엄수히(가벼이) 여기리요?
필자의 경우에는 목사님께서 바람 피우는 것을 직접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고 설사 보았다 할지라도 나 또한 어마어마한 죄인인데 어찌 정죄할 수 있으랴! 목사님께서 간음죄로 인해 정죄받는다면 나는 떳떳하다고 내세울만한 성도가 그 교회에 과연 몇이나 될텐가....
심지어 장차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께서도 간음한 여인을 보고서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 하시고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양떼들인 성도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따 !!
우리 속담에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지를 않나!
고마 조용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모든 일이 합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오죽이나 알아서 잘 처리하시겠나.
내가 속으로 "저녀석들 왜 저러나" ... 우리반 애들이라면 바싹 마른날 모조리 운동장에 불러내어 오리걸음, 쪼구려 뛰기, 원산폭격(양손은 뒤로 한채 머리를 땅에 박는 기합)으로 단체기합 시키고 그래도 부족해서 뺨떼기(뺨;Cheek) 대 여섯 대씩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죄송)
필자가 아무리 안타까워해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목사님은 K교회를 그만두고 멀리 타 노회의 한 시골마을로 가셔서 다시 힘겹게 개척하신다는 소문이 들렸다.
떠나시기 전에 필자가 목사님을 찾아서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슬퍼하였더니, 목사님께서는 내가 당신의 처지, 형편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무런 말씀도 해명도 않으시고 내손을 잡으시면서 오로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하는 한마디 말씀만 하시었다.
16년간 아니, 평생의 공든 탑이 무너진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이라니.... 그 당시는 조금 이해가 골란하였다. 급기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한마디 말씀이 그때 이후 지금까지 내 삶의 좌표(coordinate)가 될 줄을 그때는 몰랐었다.
나는 목사님을 정말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목사님이 간음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가슴만 아팠을 뿐이었다.
-+
자,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목사님이 떠나시고 K교회는 노회에서 목사를 쫏아낸 교회로 소문나는 바람에 새 목사님이 오시지 않아 장로님들과 전도사(신학생)가 힘겹게 설교를 이어가고 있었고 그 동안에 성도들이 한 두 가정씩 떠나가서 눈에 띄게 줄어들엇고 저들의 영혼이 궁핍하여지므로 범사가 잘되지 않거나 강건해지지 않는 역사가 보나마나 일어났을테다.
그후 세월이 3~4년쯤 지났을까....
당시 목사 사임을 강력히 주장했던 장로님이 제법 큰 사업(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급작스레 꼬여서 부도가 터지고 그러다가 '부정수표단속법 위반혐의'로 교도소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대구 MBC 지방뉴스에까지 구속되는 장면이 나오기에 어디 안면 있는 사람이다 싶어서 자세히 보니 바로 그 고향교회 장로님이 아니신가!
한 개인의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였다.
그 뒤에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목사 사임을 주도했던 집사 가정 중에 부부가 찢어지거나(divorce) 심지어 여집사의 경우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계획에도 없던 widow가 된 경우도 있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팍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Job 9:4). 참으로 무서운 징계가 교회와 일부 성도들께 내려졌던 것이다. 늦게라도 회개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끝없는 나락으로 꼬이고 꼬이고 또 꼬이기만 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노!" "아무리 기도해도 통 응답이 없다!" 고 하지만 여호와의 손이 짧아 도우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separation)를 내었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워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게 할뿐이니....
끝~
당시 K장로교회는 성도가 한 200여명 되었고 P목사님께서 그곳에서 16년째 말씀을 증거하고 계셨다.
한번은 주말에 고향에 갔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목사님 되에 있는 십자가가 부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크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기겠구나' 하고 기도하던 중 서너 주가 지나서 들리는 소문에 K교회 성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 않겠다 하고 심지어 쫏아 내려고도 한다 하지 않는가?
사연을 알아본 즉 P목사님이 한 여집사와 몰래 다방에도 자주 들락거리고 멀리 동대구역 그릴(고급식당)에서 단 둘이 고기 뜯는 모습이 다른 여집사에게 들켰다지를 않나!
그래서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어서 (부풀리고 부풀려서) 목사님이 유부녀 상습간통범으로까지 몰리는 바람에 성도들이 크게 술렁이고 특히 한 장로님과 집사님 너댓가정이 성도들의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강경하게 목사님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목사님이 더이상 강단에 서지 못하고 주저않고 말았다.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해명해도 들어려고도 않았으며 해명을 해도 믿어줄 자세들도 아니었다. 참으로 모두들 이상하리 만큼 강퍅하게(Harden) 변하고들 말았다.
기나긴 15년 세월동안 주일낮예배로, 주일밤예배로, 매일 새벽기도회로 (당시 한국교회는 대부분 새벽제단을 지켰음, 그 뒤 계속 새벽제단에 불이 꺼지다가 IMF 이후 다시 새벽제단을 쌓는 교회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수요기도회로, 심방으로... 얼마나 많은 영의 양식을 주의 종으로부터 공급받았을텐가....
그동안 저네들의 영혼이 잘됨으로써 범사가 잘되고 강건(건강)하여져서 오늘의 부요에 이른 은혜를 어찌 엄수히(가벼이) 여기리요?
필자의 경우에는 목사님께서 바람 피우는 것을 직접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고 설사 보았다 할지라도 나 또한 어마어마한 죄인인데 어찌 정죄할 수 있으랴! 목사님께서 간음죄로 인해 정죄받는다면 나는 떳떳하다고 내세울만한 성도가 그 교회에 과연 몇이나 될텐가....
심지어 장차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께서도 간음한 여인을 보고서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 하시고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양떼들인 성도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따 !!
우리 속담에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지를 않나!
고마 조용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모든 일이 합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오죽이나 알아서 잘 처리하시겠나.
내가 속으로 "저녀석들 왜 저러나" ... 우리반 애들이라면 바싹 마른날 모조리 운동장에 불러내어 오리걸음, 쪼구려 뛰기, 원산폭격(양손은 뒤로 한채 머리를 땅에 박는 기합)으로 단체기합 시키고 그래도 부족해서 뺨떼기(뺨;Cheek) 대 여섯 대씩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죄송)
필자가 아무리 안타까워해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목사님은 K교회를 그만두고 멀리 타 노회의 한 시골마을로 가셔서 다시 힘겹게 개척하신다는 소문이 들렸다.
떠나시기 전에 필자가 목사님을 찾아서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슬퍼하였더니, 목사님께서는 내가 당신의 처지, 형편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무런 말씀도 해명도 않으시고 내손을 잡으시면서 오로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하는 한마디 말씀만 하시었다.
16년간 아니, 평생의 공든 탑이 무너진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이라니.... 그 당시는 조금 이해가 골란하였다. 급기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한마디 말씀이 그때 이후 지금까지 내 삶의 좌표(coordinate)가 될 줄을 그때는 몰랐었다.
나는 목사님을 정말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목사님이 간음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가슴만 아팠을 뿐이었다.
-+
자,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목사님이 떠나시고 K교회는 노회에서 목사를 쫏아낸 교회로 소문나는 바람에 새 목사님이 오시지 않아 장로님들과 전도사(신학생)가 힘겹게 설교를 이어가고 있었고 그 동안에 성도들이 한 두 가정씩 떠나가서 눈에 띄게 줄어들엇고 저들의 영혼이 궁핍하여지므로 범사가 잘되지 않거나 강건해지지 않는 역사가 보나마나 일어났을테다.
그후 세월이 3~4년쯤 지났을까....
당시 목사 사임을 강력히 주장했던 장로님이 제법 큰 사업(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급작스레 꼬여서 부도가 터지고 그러다가 '부정수표단속법 위반혐의'로 교도소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대구 MBC 지방뉴스에까지 구속되는 장면이 나오기에 어디 안면 있는 사람이다 싶어서 자세히 보니 바로 그 고향교회 장로님이 아니신가!
한 개인의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였다.
그 뒤에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목사 사임을 주도했던 집사 가정 중에 부부가 찢어지거나(divorce) 심지어 여집사의 경우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계획에도 없던 widow가 된 경우도 있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팍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Job 9:4). 참으로 무서운 징계가 교회와 일부 성도들께 내려졌던 것이다. 늦게라도 회개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끝없는 나락으로 꼬이고 꼬이고 또 꼬이기만 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노!" "아무리 기도해도 통 응답이 없다!" 고 하지만 여호와의 손이 짧아 도우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separation)를 내었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워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게 할뿐이니....
끝~
22 years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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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리 칼럼
캘거리 한인실협회보에 게재된 글인데요... 일거보고 은혜 되었으면 조켓어요
쓴다고 고생 쫌 했어요. 기도도 마니 해야 되고...
케나다 중서부 대평원은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다.
한국에서는 산모퉁이 바로 돌면 송학사 있거들랑(김태곤) 송학사 돌고 나면 동네 나오고 동네 있으면 아이들 보이고 시골학교 보이건만…
내가 장사 시작하면서 이곳 하이웨이를 몇번 달리면 주님나라 가게 되나 계산을 한번 해보았더니 '매주 두 번씩 wholesale간다… 한 달에 8번… 일년에 8x12=96번… 그러면 은퇴 때까지 25년 잡고 96x25년=2400번 [이러면 내 귀한 나이가 감 잡힐 것 같아요!] 달리면 장사 손 놓고 조금 있다가 주님 나라 가겠다'고 위로(?)를 느끼곤 해왔는데 지금까지 약 240번 왕복하였으니 벌써 10% 달성한 셈이다. 할렐루야!
장사가 피곤하고 힘들 때마다 '주님 J군이 천국 갔을 때는 천사들이 예수님 땅에 내려 가실 때 다 되었다고 준비하느라 너무 바쁘다고 일러주던데 왜 아직 소식이 없나요?' 해보지만 주님께선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내가 곧 가리라'는 응답 뿐이다.
첫해에는 운전대만 잡으면 잠이 온다.
졸음운전 두시간이 예사다.
그래도 사고 한번 나지 않았다. (간결체)
이제는 아들녀석이 운전대를 교대해주니 한시름 놓고 있다.
이 녀석이 자기 장가가서도 나랑 살면서 늙어서도 내 손발이 되어 주겠다고 하니… 내가 "그래 이놈아 케나다 땅에 그런 얼빠진 여자(아내)가 어디 있겠냐? 빈말이라도 고맙다." 고 하면 "안 그러면 조 패버리던지 안 살죠, 뭐!" 한다.
그러면 "그래 좋은 여자 얻으려면 무엇보다 니가(너가) 하나님 말씀데로 살아야 되는기라(되는거야). 아예 결혼할 때까지 여자는 가까이 하지마. 때가 되면 필요하면 주님께서 주시게 되는기라" 하면 아들녀석은 언제나 "예" 하고 대답한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순복)하지 않고, 내가 교회에서 주의종에게 순종하지 않고, 내가 내 부모님께 순종(효도)하지 않고, 내가 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자식이 나에게 순종(효도)할 턱이 없다.
어릴 때는 힘이 약해 순종하는 것 같으나 커서는 반드시 순종하지 않게 된다.
뿌리는 데로 거두게 되어 있지 않는가?
(이크 여기서 잘못하다가 사회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편견을 가진 사람, 또는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항의 받지는 않을까… 휴우!)
이야기를 지평선 쪽으로 살짝 돌려버리자.
지평선 보고 달릴 때 해라도 마주치면 선글라스 없인 운전 못한다.
첫해 여름에 AVC다닐 때 만난 J교회 사모님께서 늘상 선글라스 끼고 오시기에 '맹인은 아닐 테고… 좀 튀는 아지메구나… 케나다니까 할 수 없지 뭐!' 하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 북미 땅에서는 선글라스가 필수품이잖아
i) 지형이 단조롭고
ii) 일조시간(sunshine duration)이 길고
iii) 대기가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태양빛이 한국보다 훨씬 강력하다나!
다음으로 이곳 지형을 살펴보면 태평양쪽에서부터 해안산맥 ? 산간분지 및 산맥 ? 록키산맥 주류 ? 그레이트 플레인즈 ? 플레리 ? 로렌시아 대지¼ 순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Great Plains란 록키의 동쪽 완사면에서부터 대략 서경 100°W 까지 알버타, 사스케찬, 메니토바 일부 지역에까지 해당된다.
해발고도는 록키동쪽 1500m 정도에서부터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져서 위니펙 부근에서는 200m 정도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이 지역에 내리는 비(precipitation) 는 자연히 남동쪽으로 흐르고 흘러 5대호의 가장 왼쪽인 위니펙호로 모이게 된다.
노아 홍수 직후 이 대륙이 약간 비스듬히 융기(erupt)하면서 느린 완경사의 평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한국에 비해 지질 × 지형학적으로 단순한 셈이다.
그런데 Prairie는 또 무엇인가?
필자가 예비고사 공부할 때도 이 두개 (Great Plains: Prairie) 가 혼동되었기에 나중에 아이들 가르칠 때 "야 너거들 (너희들) 이거 혼동하지마!" 하고 단속까지 하였으니... 이번엔 북미 땅에 와서 살고 있으니 아예 완전히 정리해 보아야지!
프레리는 Great Plains와 완전히 구별되는 지역 개념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대략 서경 100°W 을 기준으로 동쪽은 프레리, 서쪽은 Great Plains라 부르는데 가장 큰 차이는 강수량과 식생 (vegetation) 에 있다.
Great Plains는 연 강수량 500mm이하 지역으로 단초(短草: 짧은 풀)의 초원지대다. 추위와 건조에 강한 소의 방목 (放牧: pasturage) 및 밀 재배가 함께 주산업이 되어왔다.
반면에 Prairie는 연강수량 500mm 이상 지역으로 장초(長草: 긴 풀) 의 초원지대로서 토양이 더 비옥하고 (prairie soil) 강수량이 더 많기에 방목보다 농산물 재배 (밀, 옥수수, 감자) 위주이다.
미국에서는 서경 100°W 을 중심으로 지형과 기후(강수량)가 달라지지만 케나다는 록키 동부로부터 로렌시아 대지(퀘백주)까지 끝없는 평원이 펼쳐지고 미국과 달리 기후가 허드슨만과 북극해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Great Plains 지역범주 안에서도 Prairie 지역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Great Plains라는 말은 잘 안쓰고 그냥 Prairie지역이라고 한다는데, 지형학적으로 이곳은 어디까지나 미국 Great Plains의 연속이고 Prairie Soil (흑색부식토)이 부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예비고사 문제 아무리 꼬이게 나와도 안 틀릴 수 있겠다. 거기에다가 요즘처럼 수능(논술시험)이라면 요데로 베끼면 되고...
그건 그렇고 또 잘 시간 되었다. (바사삭)
새벽 2시! 잠자리에 누으면 하루가 깨어진다.
내일 또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가게 문 열어야 되고¼
그래도 한국에서 직장생활 할 때보다는 나은 것 같다.
장사 잘해서 언젠가 Hawaii 가서 야시시한 (sexxy) 원주민과 훌라춤 추어보고 와이키키 해변에설랑 '하와이 연정' (패티킴) 분위기 있게 불러보고....
끝! 재미있섰ㅉㅛ? 은혜도 되었ㅉㅛ?
이 글의 주제는 두글짜로... [0 0] 무었일까요?[조슈아 리]
쓴다고 고생 쫌 했어요. 기도도 마니 해야 되고...
케나다 중서부 대평원은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다.
한국에서는 산모퉁이 바로 돌면 송학사 있거들랑(김태곤) 송학사 돌고 나면 동네 나오고 동네 있으면 아이들 보이고 시골학교 보이건만…
내가 장사 시작하면서 이곳 하이웨이를 몇번 달리면 주님나라 가게 되나 계산을 한번 해보았더니 '매주 두 번씩 wholesale간다… 한 달에 8번… 일년에 8x12=96번… 그러면 은퇴 때까지 25년 잡고 96x25년=2400번 [이러면 내 귀한 나이가 감 잡힐 것 같아요!] 달리면 장사 손 놓고 조금 있다가 주님 나라 가겠다'고 위로(?)를 느끼곤 해왔는데 지금까지 약 240번 왕복하였으니 벌써 10% 달성한 셈이다. 할렐루야!
장사가 피곤하고 힘들 때마다 '주님 J군이 천국 갔을 때는 천사들이 예수님 땅에 내려 가실 때 다 되었다고 준비하느라 너무 바쁘다고 일러주던데 왜 아직 소식이 없나요?' 해보지만 주님께선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내가 곧 가리라'는 응답 뿐이다.
첫해에는 운전대만 잡으면 잠이 온다.
졸음운전 두시간이 예사다.
그래도 사고 한번 나지 않았다. (간결체)
이제는 아들녀석이 운전대를 교대해주니 한시름 놓고 있다.
이 녀석이 자기 장가가서도 나랑 살면서 늙어서도 내 손발이 되어 주겠다고 하니… 내가 "그래 이놈아 케나다 땅에 그런 얼빠진 여자(아내)가 어디 있겠냐? 빈말이라도 고맙다." 고 하면 "안 그러면 조 패버리던지 안 살죠, 뭐!" 한다.
그러면 "그래 좋은 여자 얻으려면 무엇보다 니가(너가) 하나님 말씀데로 살아야 되는기라(되는거야). 아예 결혼할 때까지 여자는 가까이 하지마. 때가 되면 필요하면 주님께서 주시게 되는기라" 하면 아들녀석은 언제나 "예" 하고 대답한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순복)하지 않고, 내가 교회에서 주의종에게 순종하지 않고, 내가 내 부모님께 순종(효도)하지 않고, 내가 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자식이 나에게 순종(효도)할 턱이 없다.
어릴 때는 힘이 약해 순종하는 것 같으나 커서는 반드시 순종하지 않게 된다.
뿌리는 데로 거두게 되어 있지 않는가?
(이크 여기서 잘못하다가 사회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편견을 가진 사람, 또는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항의 받지는 않을까… 휴우!)
이야기를 지평선 쪽으로 살짝 돌려버리자.
지평선 보고 달릴 때 해라도 마주치면 선글라스 없인 운전 못한다.
첫해 여름에 AVC다닐 때 만난 J교회 사모님께서 늘상 선글라스 끼고 오시기에 '맹인은 아닐 테고… 좀 튀는 아지메구나… 케나다니까 할 수 없지 뭐!' 하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 북미 땅에서는 선글라스가 필수품이잖아
i) 지형이 단조롭고
ii) 일조시간(sunshine duration)이 길고
iii) 대기가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태양빛이 한국보다 훨씬 강력하다나!
다음으로 이곳 지형을 살펴보면 태평양쪽에서부터 해안산맥 ? 산간분지 및 산맥 ? 록키산맥 주류 ? 그레이트 플레인즈 ? 플레리 ? 로렌시아 대지¼ 순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Great Plains란 록키의 동쪽 완사면에서부터 대략 서경 100°W 까지 알버타, 사스케찬, 메니토바 일부 지역에까지 해당된다.
해발고도는 록키동쪽 1500m 정도에서부터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져서 위니펙 부근에서는 200m 정도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이 지역에 내리는 비(precipitation) 는 자연히 남동쪽으로 흐르고 흘러 5대호의 가장 왼쪽인 위니펙호로 모이게 된다.
노아 홍수 직후 이 대륙이 약간 비스듬히 융기(erupt)하면서 느린 완경사의 평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한국에 비해 지질 × 지형학적으로 단순한 셈이다.
그런데 Prairie는 또 무엇인가?
필자가 예비고사 공부할 때도 이 두개 (Great Plains: Prairie) 가 혼동되었기에 나중에 아이들 가르칠 때 "야 너거들 (너희들) 이거 혼동하지마!" 하고 단속까지 하였으니... 이번엔 북미 땅에 와서 살고 있으니 아예 완전히 정리해 보아야지!
프레리는 Great Plains와 완전히 구별되는 지역 개념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대략 서경 100°W 을 기준으로 동쪽은 프레리, 서쪽은 Great Plains라 부르는데 가장 큰 차이는 강수량과 식생 (vegetation) 에 있다.
Great Plains는 연 강수량 500mm이하 지역으로 단초(短草: 짧은 풀)의 초원지대다. 추위와 건조에 강한 소의 방목 (放牧: pasturage) 및 밀 재배가 함께 주산업이 되어왔다.
반면에 Prairie는 연강수량 500mm 이상 지역으로 장초(長草: 긴 풀) 의 초원지대로서 토양이 더 비옥하고 (prairie soil) 강수량이 더 많기에 방목보다 농산물 재배 (밀, 옥수수, 감자) 위주이다.
미국에서는 서경 100°W 을 중심으로 지형과 기후(강수량)가 달라지지만 케나다는 록키 동부로부터 로렌시아 대지(퀘백주)까지 끝없는 평원이 펼쳐지고 미국과 달리 기후가 허드슨만과 북극해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Great Plains 지역범주 안에서도 Prairie 지역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Great Plains라는 말은 잘 안쓰고 그냥 Prairie지역이라고 한다는데, 지형학적으로 이곳은 어디까지나 미국 Great Plains의 연속이고 Prairie Soil (흑색부식토)이 부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예비고사 문제 아무리 꼬이게 나와도 안 틀릴 수 있겠다. 거기에다가 요즘처럼 수능(논술시험)이라면 요데로 베끼면 되고...
그건 그렇고 또 잘 시간 되었다. (바사삭)
새벽 2시! 잠자리에 누으면 하루가 깨어진다.
내일 또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가게 문 열어야 되고¼
그래도 한국에서 직장생활 할 때보다는 나은 것 같다.
장사 잘해서 언젠가 Hawaii 가서 야시시한 (sexxy) 원주민과 훌라춤 추어보고 와이키키 해변에설랑 '하와이 연정' (패티킴) 분위기 있게 불러보고....
끝! 재미있섰ㅉㅛ? 은혜도 되었ㅉㅛ?
이 글의 주제는 두글짜로... [0 0] 무었일까요?[조슈아 리]
22 years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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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리 칼럼
이글은 캘거리 한인 실협회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의 교직생활 중에 있었던 넌픽션 스토리이죠, 6.25를 생각하면서 써보았답니
다. 읽는 이 마다 은혜받으시기 기원합니다. (글쓴이: 조슈아 리)
6 월은 호국보훈의 달, 육니오(6.25)가 있고 이승복 어린이와 공산주의가 생각나는 달이다. 김일성은 죽었지만 아직도 한반도에는 공산주의가 남아있는 채, 천만이산가족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인 정아엄마 이야기를 할까 보다.
그러니까 80 년대 후반 진양군의 한 시골학교(남녀공학고교)에 근무할 때다. 3 월초 가정방문차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반 정아네 집에 들렀을 때 처음으로 정아엄마의 삶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정아엄마는 1943 년 이북 평안도에서 태어났는데 해방이 된 후(1945) 김일성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1946) 남한과의 교류를 끊고 38도 선에 철조망을 세울 즘인 1948 년 봄에 부모님의 등에 업혀 비밀리에 월남하여 남한 서울근처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정아엄마가 6 살때인 이듬해(1949)봄에 정아 할아버지께서 이북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 와야겠다기에 정아 할머니가 지금 이북가면 철조망에 막혀 다시는 못 내려오니 가지 말라고 사정하셨지만 부모님을 이북에 두고 우리끼리 살수야 있나 하시며 마침내 떠나게 되는데 '떠날 때는 말없이'가 아니라 어린 정아엄마의 손을 꼭잡고 뽀뽀하고 사탕주면서 "아빠 곧 돌아올게" 하시더라나.
그때 어린 정아엄마는 엄마가 우니까 뭔가 불안해서 "아빠 가지마!" 하면서 함께 울었다는데. 그것이 아빠와의 마지막 이별이 되었을 줄이야......!
그때 월북한 뒤로 김일성은 38 선 철조망 경비를 대폭 보강하고 월남하는 자들을 무조건 총살토록 하였으며 곧이어 1950 년 6 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탕! 탕!....'6.25 를 일으켰으니......!
아빠를 그리다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잠못들고 헤매일 때 아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죠.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맨발로 끌며 절며 살아만 돌아오세요......외쳤건만 그로부터 수십년 정아 할머니는 생과부로 남편을 그리면서 아이들 키우시랴 고생고생하시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고 남한 땅에는 정아엄마와 남동생 하나만이 외롭게 남겨졌으니......
이제 어린 정아엄마의 한평생 소원은 이북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 뵈는 것......세월은 살같이 흘러 정아엄마도 결혼하여 이북과는 더욱 거리가 먼 '진주라 천리길' 진주땅 한구석에 소 몰고 논밭 가는 농부의 아내가 되어 1 남 1 녀를 낳게 되는데... 운명의 신은 더욱 가혹하여 정아아빠가 농약에 중독되어 그만 먼저 돌아가시게 되고 정아엄마는 할머니처럼 과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해진 이때에 동네 한 권사님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정아엄마의 마음속엔 천국이 자라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정아엄마는 기도 때마다 잊지 않고 `주님 살아 생전에 이북 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를 기도하게 되었다.
7~8 년째가 되어서 우연히 동네 면사무소 직원의 노력으로 통일원에 이산가족 생사확인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우여곡절끝에 북한당국으로부터 생존확인 통보를 받게 되는데...... 이제부터 정아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부디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계속하였다.
또다시 몇 해가 흘러 1980 년대 초에 이르러 분단이후 처음으로 정부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북한으로 보내기 위해 전국 천만 이산가족 중에서 가리고 또 가려서 50~60 명정도 뽑는데 거기에 뽑히게 되었다나...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원 고속버스를 타고 임진각 자유의 다리를 넘어 피양(평양)으로 갔는데 북한당국이 정아엄마의 인생이야기를 이미 전해 듣고 특별 배려를 하여 이산가족 중에서 제 1 착으로 꿈에도 그리고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는데 이때 아버지와 딸이 얼싸안고 대성통곡하던 모습을 남북한 취재기자들이 너도나도 찍어서 남북한 전국 일간지에 톱뉴스로 일제이 보도되고 전세계 주요 언론에도 토픽뉴스로 타전 되었으며 국내외 수백 수천 메스컴에 사진과 함께 인생이야기가 보도되었으니 바야흐로 정아엄마의 남북분단으로 인한 슬픈 인생스토리와 아버지를 안고 통곡하는 모습은 이산가족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전국 각처로부터 위로의 서신이 전해오고 도지사, 군수, 국회의원등 각종 유명인사들의 방문과 하사금(위로금)이 전해지고....정아엄마의 꼬박 10 년 기도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꿈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으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니라'는 말씀처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나중에 진호(정아오빠)는 공부를 착실히 하여 경북사대 역사과에 진학 하였고 그 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며 내가 담임했던 정아는 엄마 혼자 둘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가 너무 벅차기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산의 한 개인병원에 경리직원으로 일하다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내왓으며, 첫아들 낳고서 몇 달 뒤 전화가 와서 "선생님, 아이 기르기가 쉽지 않네요. 매일 목욕 시켜야 되고...(어쩌구)..."하기에 "그럼, 그러면서 키워준 부모의 은혜를 깨닫게 되지. 신랑말 잘 듣고 자주 고향에 어머님 뵈러 가거라. 갈 때마다 용돈도 꼭꼭 드려야돼!"하는 통화를 끝으로(내가 학교 옮기고 이사 다니는 통에)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당장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믿고 간구하고 기다리면 끝에는 응답이 오게 됩니다.
천사가 하나님께 갔다드릴 기도의 잔이 차야 된답니다.
단, 인간의 정욕과 욕심에 따라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을 구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Don't forget to remember!!!
휴~ 길기도 하다... 근데 다 읽었다!
정아는 지금 33세쯤 되는 아지매...학생때는 쬐에끔 날씬하고 예쁜편이였답니다.
정아네 후일담이 궁금하신분은 저에게 물어도 모릅니다~!!
이민온지 4년동안 연락을 못했습니다. 재송[sorry!] `끝`
저의 교직생활 중에 있었던 넌픽션 스토리이죠, 6.25를 생각하면서 써보았답니
다. 읽는 이 마다 은혜받으시기 기원합니다. (글쓴이: 조슈아 리)
6 월은 호국보훈의 달, 육니오(6.25)가 있고 이승복 어린이와 공산주의가 생각나는 달이다. 김일성은 죽었지만 아직도 한반도에는 공산주의가 남아있는 채, 천만이산가족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인 정아엄마 이야기를 할까 보다.
그러니까 80 년대 후반 진양군의 한 시골학교(남녀공학고교)에 근무할 때다. 3 월초 가정방문차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반 정아네 집에 들렀을 때 처음으로 정아엄마의 삶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정아엄마는 1943 년 이북 평안도에서 태어났는데 해방이 된 후(1945) 김일성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1946) 남한과의 교류를 끊고 38도 선에 철조망을 세울 즘인 1948 년 봄에 부모님의 등에 업혀 비밀리에 월남하여 남한 서울근처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정아엄마가 6 살때인 이듬해(1949)봄에 정아 할아버지께서 이북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 와야겠다기에 정아 할머니가 지금 이북가면 철조망에 막혀 다시는 못 내려오니 가지 말라고 사정하셨지만 부모님을 이북에 두고 우리끼리 살수야 있나 하시며 마침내 떠나게 되는데 '떠날 때는 말없이'가 아니라 어린 정아엄마의 손을 꼭잡고 뽀뽀하고 사탕주면서 "아빠 곧 돌아올게" 하시더라나.
그때 어린 정아엄마는 엄마가 우니까 뭔가 불안해서 "아빠 가지마!" 하면서 함께 울었다는데. 그것이 아빠와의 마지막 이별이 되었을 줄이야......!
그때 월북한 뒤로 김일성은 38 선 철조망 경비를 대폭 보강하고 월남하는 자들을 무조건 총살토록 하였으며 곧이어 1950 년 6 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탕! 탕!....'6.25 를 일으켰으니......!
아빠를 그리다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잠못들고 헤매일 때 아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죠.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맨발로 끌며 절며 살아만 돌아오세요......외쳤건만 그로부터 수십년 정아 할머니는 생과부로 남편을 그리면서 아이들 키우시랴 고생고생하시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고 남한 땅에는 정아엄마와 남동생 하나만이 외롭게 남겨졌으니......
이제 어린 정아엄마의 한평생 소원은 이북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 뵈는 것......세월은 살같이 흘러 정아엄마도 결혼하여 이북과는 더욱 거리가 먼 '진주라 천리길' 진주땅 한구석에 소 몰고 논밭 가는 농부의 아내가 되어 1 남 1 녀를 낳게 되는데... 운명의 신은 더욱 가혹하여 정아아빠가 농약에 중독되어 그만 먼저 돌아가시게 되고 정아엄마는 할머니처럼 과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해진 이때에 동네 한 권사님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정아엄마의 마음속엔 천국이 자라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정아엄마는 기도 때마다 잊지 않고 `주님 살아 생전에 이북 가신 아버님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를 기도하게 되었다.
7~8 년째가 되어서 우연히 동네 면사무소 직원의 노력으로 통일원에 이산가족 생사확인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우여곡절끝에 북한당국으로부터 생존확인 통보를 받게 되는데...... 이제부터 정아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부디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계속하였다.
또다시 몇 해가 흘러 1980 년대 초에 이르러 분단이후 처음으로 정부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북한으로 보내기 위해 전국 천만 이산가족 중에서 가리고 또 가려서 50~60 명정도 뽑는데 거기에 뽑히게 되었다나...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원 고속버스를 타고 임진각 자유의 다리를 넘어 피양(평양)으로 갔는데 북한당국이 정아엄마의 인생이야기를 이미 전해 듣고 특별 배려를 하여 이산가족 중에서 제 1 착으로 꿈에도 그리고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는데 이때 아버지와 딸이 얼싸안고 대성통곡하던 모습을 남북한 취재기자들이 너도나도 찍어서 남북한 전국 일간지에 톱뉴스로 일제이 보도되고 전세계 주요 언론에도 토픽뉴스로 타전 되었으며 국내외 수백 수천 메스컴에 사진과 함께 인생이야기가 보도되었으니 바야흐로 정아엄마의 남북분단으로 인한 슬픈 인생스토리와 아버지를 안고 통곡하는 모습은 이산가족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전국 각처로부터 위로의 서신이 전해오고 도지사, 군수, 국회의원등 각종 유명인사들의 방문과 하사금(위로금)이 전해지고....정아엄마의 꼬박 10 년 기도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꿈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으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니라'는 말씀처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나중에 진호(정아오빠)는 공부를 착실히 하여 경북사대 역사과에 진학 하였고 그 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며 내가 담임했던 정아는 엄마 혼자 둘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가 너무 벅차기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산의 한 개인병원에 경리직원으로 일하다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내왓으며, 첫아들 낳고서 몇 달 뒤 전화가 와서 "선생님, 아이 기르기가 쉽지 않네요. 매일 목욕 시켜야 되고...(어쩌구)..."하기에 "그럼, 그러면서 키워준 부모의 은혜를 깨닫게 되지. 신랑말 잘 듣고 자주 고향에 어머님 뵈러 가거라. 갈 때마다 용돈도 꼭꼭 드려야돼!"하는 통화를 끝으로(내가 학교 옮기고 이사 다니는 통에)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당장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믿고 간구하고 기다리면 끝에는 응답이 오게 됩니다.
천사가 하나님께 갔다드릴 기도의 잔이 차야 된답니다.
단, 인간의 정욕과 욕심에 따라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을 구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Don't forget to remember!!!
휴~ 길기도 하다... 근데 다 읽었다!
정아는 지금 33세쯤 되는 아지매...학생때는 쬐에끔 날씬하고 예쁜편이였답니다.
정아네 후일담이 궁금하신분은 저에게 물어도 모릅니다~!!
이민온지 4년동안 연락을 못했습니다. 재송[sorry!] `끝`
22 years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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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리 칼럼
이 글은 캘거리 한인 실협회보 최근호에 게재된 글을 이 사이트에 맞게 약간 수정한 글입니다. 서로 읽고서 은혜받으시길 부탁 드립니다(글쓴이: 조슈아 리).
김영삼 대통령 당시 가정방문의 폐해(?)로 인해 정부 차원에서 교사 가정방문을 여러해 금지해 왔었지만 필자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해마다 가정방문으로 새학기를 시작하였다.
학급 50명 가운데 결손가정 학생이 보통 10~20%(5~10명)정도다. 학교에서 일년동안 아이들을 잘 지도해 보려고 애를 쓰고 아무리 상담해 봐도 단 한번의 가정방문보다 못하다. 가정방문을 해보면 학생의 환경이나 성격이나 비행이나 무엇이든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 마음이 결국은 아이를(아이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미사려구(flowery words and fine phrases)로 아이를 지도해 봤자 소리나는 꽹가리가 될 수 밖에 없다.
학기초 진철이네 집(식당)에 갔을 때다. 아빠는 진철이가 초등 3년때 암으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데리고 울산 세무서(반구동) 근처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처녀땐 울산교회(장로교)에 열심히 다녔으나 시집와서는 다니는둥 마는둥 하다가 아빠 돌아가시고는 낙심이 되어 아예 발길을 끊었단다.
내가 식당 뒷방에 들어가자마자 예배 드리자고 해서 먼저 찬송가 484장을 부르니 눈물이 나와서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진철이 엄마를 교회에 못다니게 하고, 진철이 아빠 먼저 데려가고, 진철이 가게 망하게 까지한 마귀가 너무도 미웠다.
진철이네가 이곳에서 몇해 전 식당을 처음 열었을 땐 세무서 직원이나 손님들이 점심 먹으러 자주 와서 그럭저럭 유지를 하였는데 작년부터 큰 가든식당이 새로 근처에 생기는 바람에 손님이 그쪽으로 다 가고 장사가 안되어서 식당을 닫을 수도 없고...닫으면 밑천이 없어서 다른 장사도 못하고...아이들은 계속 키워야 되고...누구하나 도와줄 사람은 없고...이래저래 깊은 근심에 쌓여 있었다.
내가 사연을 듣고서는 대뜸 "진철이 엄마, 왜 그동안 교회 안 다녔어요? 당장 이번 주부터 가까운 교회 나가시고 첫달부터 있건없건 십일조 바치세요. 십일조 바치면 가게 부도는 절대 안나요. 십일조 바쳐서 하나님이 도우시는지 안도우시는지 한번 테스트 해보세요!" 하고 강압적으로 권유하였다.
한참동안 마치 학생 대하듯 마구 윽박질렀더니 기가 죽어서 "그라지요 뭐...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데 선생님 말씀처럼 교회에 한번 나가 보께요." 하기에 내가 "한번이 아니라 무조건 빠지지 말고 나가셔야 되요. 갔다가 안갔다가 하면 하나님도 돕기 곤란하고 마귀들이 방해하여 영영 못가게 되요. 이번 주부터 안가시면 나한테 혼날줄 알아요!" 하고 엄포를 놓았으니...(참 이상한 선생님이였죠!)
주말에 가까운 교회 목사님께 연락하여 진철이 엄마 사정을 설명하고서 심방 한번 부탁하였더니 목사님의 방문을 받고부터는 쪼끔씩 교회에 다니게 되었단다.
월요일마다 진철이에게 "어제 엄마랑 교회 나갔냐?"고 물어서 안갔다고 하면 전화해서 또 꾸짖고 '예수님만 의지해라' '믿고 기도해라' '없어도 헌금 드려라' 고 하길 몇달째...진철이 엄마는 차차 교회와 목사님(성도님)께 정이 붙어 나중에는 주일 안빠진다고 나에게 자랑까지 하게 되었으니....
내가 일러준대로 진철이네 식당은 옆에 삣까뻔쩍한 가든식당이 몇개 더 들어서도 부도나지 않고 버티어 나가면서 진철이 동생까지 고등학교 무사히 진학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카나다로 떠나오게 되었다.
진철이네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십일조 계속 바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일용할 양식일랑 넉넉히 주셔왔음에 틀림이 없겠다.
이곳 카나다에 와서 몇해 살고 보니 비지니스 세계가 살벌하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다(사실 한국에서는 비지니스 전혀 몰랐걸랑요). 보증금 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권리금 주고 들어가니까 잘못하면 권리금 날린다.
권리금 날리면 돈 빌릴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도 별로 없다.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다
낙동강 오리알 안되기 위해서는 죽자사자 십일조 바치는 길 뿐이다.
필자가 비지니스 시작하기 전에는 소득이 없어서 계속 십일조를 못바치고 그냥 일반헌금만 하고 지냈더니 우리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소득(수입)이 없으면 생활비의 십일조라도 바쳐라'고 하시기에 그 말씀에 은혜 받아서 적으나마 생활비의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하였으니.... 이민온지 여러해 지금까지 온가족이 까딱없이 버텨오는 것은 다름아닌 십일조의 위력이다.
우리 청년 유학생들도 십일조를 한번 바쳐 보라!
먼저 바치고 나서, 식비내고 학원비 내고 밴프 가고 워터톤도 가보라!
하나님께서 기묘막측한 방법으로 채워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소득이 적거나 없을때 바치지 않으면 소득이 있어도 바칠줄 모르게 된다.
이 말씀에 은혜받아 짧은 인생 살 동안 꾸어줄지언정 꾸러 가지 않는 청년유학생이 캘거리에 차고도 넘치길 소망해본다. `끝`
긴 글이지만 끗까지 일거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 유학생들도 소득이 없따면서 헌금 드리기를 소흘히 하고 대신에 산으로 들로 밴프로 워터톤으로 강으로 바다로[이크, 이곳엔 바다가 없꾸나!] 놀러 다니는데 귀한 물찔[영어로 money!] 모두 소비하면 안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바치고 , 다음 우리를 위해 써야겠썸니다!!!
김영삼 대통령 당시 가정방문의 폐해(?)로 인해 정부 차원에서 교사 가정방문을 여러해 금지해 왔었지만 필자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해마다 가정방문으로 새학기를 시작하였다.
학급 50명 가운데 결손가정 학생이 보통 10~20%(5~10명)정도다. 학교에서 일년동안 아이들을 잘 지도해 보려고 애를 쓰고 아무리 상담해 봐도 단 한번의 가정방문보다 못하다. 가정방문을 해보면 학생의 환경이나 성격이나 비행이나 무엇이든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 마음이 결국은 아이를(아이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미사려구(flowery words and fine phrases)로 아이를 지도해 봤자 소리나는 꽹가리가 될 수 밖에 없다.
학기초 진철이네 집(식당)에 갔을 때다. 아빠는 진철이가 초등 3년때 암으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데리고 울산 세무서(반구동) 근처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처녀땐 울산교회(장로교)에 열심히 다녔으나 시집와서는 다니는둥 마는둥 하다가 아빠 돌아가시고는 낙심이 되어 아예 발길을 끊었단다.
내가 식당 뒷방에 들어가자마자 예배 드리자고 해서 먼저 찬송가 484장을 부르니 눈물이 나와서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진철이 엄마를 교회에 못다니게 하고, 진철이 아빠 먼저 데려가고, 진철이 가게 망하게 까지한 마귀가 너무도 미웠다.
진철이네가 이곳에서 몇해 전 식당을 처음 열었을 땐 세무서 직원이나 손님들이 점심 먹으러 자주 와서 그럭저럭 유지를 하였는데 작년부터 큰 가든식당이 새로 근처에 생기는 바람에 손님이 그쪽으로 다 가고 장사가 안되어서 식당을 닫을 수도 없고...닫으면 밑천이 없어서 다른 장사도 못하고...아이들은 계속 키워야 되고...누구하나 도와줄 사람은 없고...이래저래 깊은 근심에 쌓여 있었다.
내가 사연을 듣고서는 대뜸 "진철이 엄마, 왜 그동안 교회 안 다녔어요? 당장 이번 주부터 가까운 교회 나가시고 첫달부터 있건없건 십일조 바치세요. 십일조 바치면 가게 부도는 절대 안나요. 십일조 바쳐서 하나님이 도우시는지 안도우시는지 한번 테스트 해보세요!" 하고 강압적으로 권유하였다.
한참동안 마치 학생 대하듯 마구 윽박질렀더니 기가 죽어서 "그라지요 뭐...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데 선생님 말씀처럼 교회에 한번 나가 보께요." 하기에 내가 "한번이 아니라 무조건 빠지지 말고 나가셔야 되요. 갔다가 안갔다가 하면 하나님도 돕기 곤란하고 마귀들이 방해하여 영영 못가게 되요. 이번 주부터 안가시면 나한테 혼날줄 알아요!" 하고 엄포를 놓았으니...(참 이상한 선생님이였죠!)
주말에 가까운 교회 목사님께 연락하여 진철이 엄마 사정을 설명하고서 심방 한번 부탁하였더니 목사님의 방문을 받고부터는 쪼끔씩 교회에 다니게 되었단다.
월요일마다 진철이에게 "어제 엄마랑 교회 나갔냐?"고 물어서 안갔다고 하면 전화해서 또 꾸짖고 '예수님만 의지해라' '믿고 기도해라' '없어도 헌금 드려라' 고 하길 몇달째...진철이 엄마는 차차 교회와 목사님(성도님)께 정이 붙어 나중에는 주일 안빠진다고 나에게 자랑까지 하게 되었으니....
내가 일러준대로 진철이네 식당은 옆에 삣까뻔쩍한 가든식당이 몇개 더 들어서도 부도나지 않고 버티어 나가면서 진철이 동생까지 고등학교 무사히 진학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카나다로 떠나오게 되었다.
진철이네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십일조 계속 바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일용할 양식일랑 넉넉히 주셔왔음에 틀림이 없겠다.
이곳 카나다에 와서 몇해 살고 보니 비지니스 세계가 살벌하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다(사실 한국에서는 비지니스 전혀 몰랐걸랑요). 보증금 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권리금 주고 들어가니까 잘못하면 권리금 날린다.
권리금 날리면 돈 빌릴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도 별로 없다.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다
낙동강 오리알 안되기 위해서는 죽자사자 십일조 바치는 길 뿐이다.
필자가 비지니스 시작하기 전에는 소득이 없어서 계속 십일조를 못바치고 그냥 일반헌금만 하고 지냈더니 우리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소득(수입)이 없으면 생활비의 십일조라도 바쳐라'고 하시기에 그 말씀에 은혜 받아서 적으나마 생활비의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하였으니.... 이민온지 여러해 지금까지 온가족이 까딱없이 버텨오는 것은 다름아닌 십일조의 위력이다.
우리 청년 유학생들도 십일조를 한번 바쳐 보라!
먼저 바치고 나서, 식비내고 학원비 내고 밴프 가고 워터톤도 가보라!
하나님께서 기묘막측한 방법으로 채워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소득이 적거나 없을때 바치지 않으면 소득이 있어도 바칠줄 모르게 된다.
이 말씀에 은혜받아 짧은 인생 살 동안 꾸어줄지언정 꾸러 가지 않는 청년유학생이 캘거리에 차고도 넘치길 소망해본다. `끝`
긴 글이지만 끗까지 일거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 유학생들도 소득이 없따면서 헌금 드리기를 소흘히 하고 대신에 산으로 들로 밴프로 워터톤으로 강으로 바다로[이크, 이곳엔 바다가 없꾸나!] 놀러 다니는데 귀한 물찔[영어로 money!] 모두 소비하면 안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바치고 , 다음 우리를 위해 써야겠썸니다!!!
22 years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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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리 칼럼
아래의 글은 이곳 교민잡지인 `주간시티`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의 Freshman 시절 이야기를 재밋게 써봤어요.
읽는 이마다 은혜되시길 기원합니다. [글쓴이; 조슈아리]
오늘은 3월 5일, 한국에서는 일제히 입학식과 함께 새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몽매(夢寐: sleeping & dreaming)에도 그리던 대학... "이제는 지겨운 공부가 끝났다, 해방이다, 자유다!" 하면서 입학식을 기다렸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신입생은 전원 입학식 날부터 정해진 색깔과 모양의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 된다나...
당시는 유신(박정희 대통령) 말기라(end) 정부에서 대학생들의 반정부 데모를 막기 위해 입학 초기부터 때려 잡으려고(기를 꺾으려고) 온갖 묘책을 쓰던 중에 있었고 교복 입지 않으면 교수가 출석 인정을 해주지 않도록 되어 있었으며 교수 또한 반드시 강의시간 마다 출석을 부르도록 지시받고 있었기에 우리로선 꼼짝 없는 고등학교 4학년짜리 싸구려 대학생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또한 교련(군사훈련)이 엄청나게 강화 되어서 주당 4시간씩 논산훈련소 수준에 버금가는 군사훈련을 매주 받았는데 교육시간에 복장이나 태도가 불량하면 교관(대위)이 언제든지 출석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거기에다 결석 2회(4*2=8시간)만 하면 즉시 입영통지서가 날라 오도록 되어 있기에 언제 군대로 끌려갈지 모르는 평화 속의 긴장이 계속 되었으니....
어떤 정신없는 녀석들은 벤치에 않아 담배 물고 잡담하다가도 교관이 지나가면 벌떡 일어나 ROTC도 아니면서 "충성!"을 연발할 정도니 Campus 분위기가 이거 뭐 김일성 대학쯤 되었다고나 할까....
입학식하고 얼마 지나서 사대(Collage)의 고교 선배들이 신입생환영회를 해주는데 장소는 큼지막한 짜장면집, 짜장면 1그릇으로 저녁을 때우고 2차는 막걸리 일 잔씩 돌리면서 안주는 두루치기(된장 두부찌개?). 술이 조금씩 되어서는 모두들 젓가락 두드리면서 당시 잘나가던 '고래사냥(송창식)'을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네에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아~ 떠나자 동해바아-다로오~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오~오오오~
신화처럼 소리치며 고래 잡으러어~어어어~
(그목소리 가지고 복음성가나 불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이 미련둥이야!)
어느 곳에나 짜장면집 긴 식탁 모서리는 젓가락 자국이 무수히 패여 있었는데 나중에 가라오케(자동 반주기) 나올 줄을 그때는 몰랐었지....
술이 알쏭달쏭 되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한 시커먼(black) 선배가 일어나서 "자 우리 사대 교가 부르자!"하기에 '대학에도 교가가 있나'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웬걸 젓가락 소리에 '섬마을 선생님'이 터져 나오고 있으니....
주간시티 독자들을 위해서 잠깐 가사와 해설을 적어볼까나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海棠花:sweet brier는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잘 자란다고 해요.)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3월달에 신규 발령 받아왔다나. 그런데 진짜 '총각'인지 어떻게 알지?)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아따! 스무 살도 안된 계집애가 벌써부터 '끼'가 있기는...
바치긴 무얼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뭐 한번 그랬는거 갖고...영 부담스럽네...)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고마 가지 말고 살림하자는 뜻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친 김에 2절까지 적어보자.
구름도 쫓겨가는 섬 마을에
(원래 구름은 바다에서 생겨서 육지로 이동합니다-유식하기는 !)
무얼 하러 왔느냐 총각 선생님
(연애하러 왔지 머! 그리고 나 사실은 대학 때 과(科) 후배 계집
애 하고 좀 놀았걸랑...)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별빛이 총총한 해변에서 "선상님 싸랑해요!"를 듣는다!)
시름을 달래 보는 총각 선생님
(이거 어떡해야 되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울엘랑 가지를 마소, 가지를 마아아소~~~
이 노래는 당시 가사가 너무 퇴폐적이고 특히 교직(교사)에 대한 천박한 인상을 심어준다 해서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nevertheless) 사대생들이 먼저 '교가'라고 애창하고 다녔으니 반항심리에서 나온 irony일테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름방학 때는 전국 대학 1년생들이 모두 일주일간 병영집체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문무대인가 어딘가 하는 곳에 입영한다고 TV에까지 입소식을 중계해주고 요란했었지만 우리 지방에서는 뉴스도 타지 못하고 향토 50사단에 들어가서 글자 그대로 빡빡 기었다(죽도록 고생했다).
6일간의 훈련이었지만 너무도 고되어서 6일 후 퇴소하고 나오니 천지가 새롭게 보이고 한 몇년은 흘러간 기분이었다. 한 친구 녀석은 6일 동안 대변이 나오지 않았는데 집에 가서 누니까 까만 염소똥 같은 것이 똑똑 떨어지더라나.... 똥까지 다 타서 없어져 버릴 정도로 호되게 훈련시킨 것은 유신 정귄의 '대학생 데모방지' 작전이었다.
나중에 필자가 입영통지서를 받고 논산 훈련소에 가서 5주간 신병훈련을 받게 되는데 차라리 50사단에서의 6일간 집체훈련이 더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추억되고 있을 정도니....
자 문제는 이제부터다.
"주님 대학에만 합격시켜 주시면..."하면서 심지어 새벽기도까지 나가서 부탁부탁했었는데 막상 대학에 붙고 나서는 너무도 급속도로 주님을 잊어 가고 말았다. 우리 속담에 '똥누러 갈 때만 바쁘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다.
대학 들어가서 자취방 잡아놓고 각종 환영회 마치고 한가해져서는 그래도 신앙생활하던 가락이 있어서 주일날 가까운 교회로 어슬렁어슬렁 가보니 마침 신학교를 갓마친 젊은 전도사가 교회를 시작하고 계셨는데 새 신자 하나 왔다고(그것도 대학생이!)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그뒤 내가 점점 주일성수를 게을리 하니까 몇 번이나 자취방에 심방 오셔서 기도해주고 가셨지만 말씀은 들을 귀는 점점 막혀져가고....
심지어 내가 속으로 '저 전도사 내보다 수학정석 덜 풀어보았을 텐데...'하는 싸구려(값싸고 천한)교만이 자라기 시작하고... 거기에다 각종 모임(회식), 동문회, 서클, 행사...등에 쫓아다니면서 술에 취하고 담배에 찌들고 화투(또이또이 노름)에 멍들고....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따라 삼갈 것이니다 (시편 119: 9)]라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2학기가 되어서는 아예 교회에 발길을 끊고 말았다. 기도할 것(제목)도 별로 없고 예수님 없이도 살 것만 같았고 나 혼자서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나 혼자 몽땅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스스로 좋다하고 시작하다니....
그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도전과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응전(Challenge & response)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대한 철저한 간섭과 섭리로 인해 필자는 그 뒤 행한 인생의 수고가 '헛수고'로 끝나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였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한다면 주간시티 몇년동안 쓰고도 남음이 있겠다.
끝으로 잠깐, 필자는 한창 피끊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청춘예찬'이 아니라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면서 [너는 청년의 때 곳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
이 말씀을 외쳐주고 싶다. `끝`
꾀 긴 글이지만 끝까지 일거 주셔서 감사합니다.[단 일찌안코 그대로 쭉 내려왔으면 다시 끌고 올라가서 일거야됨! [must+ have to!!]
필자의 Freshman 시절 이야기를 재밋게 써봤어요.
읽는 이마다 은혜되시길 기원합니다. [글쓴이; 조슈아리]
오늘은 3월 5일, 한국에서는 일제히 입학식과 함께 새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몽매(夢寐: sleeping & dreaming)에도 그리던 대학... "이제는 지겨운 공부가 끝났다, 해방이다, 자유다!" 하면서 입학식을 기다렸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신입생은 전원 입학식 날부터 정해진 색깔과 모양의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 된다나...
당시는 유신(박정희 대통령) 말기라(end) 정부에서 대학생들의 반정부 데모를 막기 위해 입학 초기부터 때려 잡으려고(기를 꺾으려고) 온갖 묘책을 쓰던 중에 있었고 교복 입지 않으면 교수가 출석 인정을 해주지 않도록 되어 있었으며 교수 또한 반드시 강의시간 마다 출석을 부르도록 지시받고 있었기에 우리로선 꼼짝 없는 고등학교 4학년짜리 싸구려 대학생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또한 교련(군사훈련)이 엄청나게 강화 되어서 주당 4시간씩 논산훈련소 수준에 버금가는 군사훈련을 매주 받았는데 교육시간에 복장이나 태도가 불량하면 교관(대위)이 언제든지 출석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거기에다 결석 2회(4*2=8시간)만 하면 즉시 입영통지서가 날라 오도록 되어 있기에 언제 군대로 끌려갈지 모르는 평화 속의 긴장이 계속 되었으니....
어떤 정신없는 녀석들은 벤치에 않아 담배 물고 잡담하다가도 교관이 지나가면 벌떡 일어나 ROTC도 아니면서 "충성!"을 연발할 정도니 Campus 분위기가 이거 뭐 김일성 대학쯤 되었다고나 할까....
입학식하고 얼마 지나서 사대(Collage)의 고교 선배들이 신입생환영회를 해주는데 장소는 큼지막한 짜장면집, 짜장면 1그릇으로 저녁을 때우고 2차는 막걸리 일 잔씩 돌리면서 안주는 두루치기(된장 두부찌개?). 술이 조금씩 되어서는 모두들 젓가락 두드리면서 당시 잘나가던 '고래사냥(송창식)'을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네에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아~ 떠나자 동해바아-다로오~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오~오오오~
신화처럼 소리치며 고래 잡으러어~어어어~
(그목소리 가지고 복음성가나 불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이 미련둥이야!)
어느 곳에나 짜장면집 긴 식탁 모서리는 젓가락 자국이 무수히 패여 있었는데 나중에 가라오케(자동 반주기) 나올 줄을 그때는 몰랐었지....
술이 알쏭달쏭 되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한 시커먼(black) 선배가 일어나서 "자 우리 사대 교가 부르자!"하기에 '대학에도 교가가 있나'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웬걸 젓가락 소리에 '섬마을 선생님'이 터져 나오고 있으니....
주간시티 독자들을 위해서 잠깐 가사와 해설을 적어볼까나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海棠花:sweet brier는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잘 자란다고 해요.)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3월달에 신규 발령 받아왔다나. 그런데 진짜 '총각'인지 어떻게 알지?)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아따! 스무 살도 안된 계집애가 벌써부터 '끼'가 있기는...
바치긴 무얼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뭐 한번 그랬는거 갖고...영 부담스럽네...)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고마 가지 말고 살림하자는 뜻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친 김에 2절까지 적어보자.
구름도 쫓겨가는 섬 마을에
(원래 구름은 바다에서 생겨서 육지로 이동합니다-유식하기는 !)
무얼 하러 왔느냐 총각 선생님
(연애하러 왔지 머! 그리고 나 사실은 대학 때 과(科) 후배 계집
애 하고 좀 놀았걸랑...)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별빛이 총총한 해변에서 "선상님 싸랑해요!"를 듣는다!)
시름을 달래 보는 총각 선생님
(이거 어떡해야 되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울엘랑 가지를 마소, 가지를 마아아소~~~
이 노래는 당시 가사가 너무 퇴폐적이고 특히 교직(교사)에 대한 천박한 인상을 심어준다 해서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nevertheless) 사대생들이 먼저 '교가'라고 애창하고 다녔으니 반항심리에서 나온 irony일테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름방학 때는 전국 대학 1년생들이 모두 일주일간 병영집체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문무대인가 어딘가 하는 곳에 입영한다고 TV에까지 입소식을 중계해주고 요란했었지만 우리 지방에서는 뉴스도 타지 못하고 향토 50사단에 들어가서 글자 그대로 빡빡 기었다(죽도록 고생했다).
6일간의 훈련이었지만 너무도 고되어서 6일 후 퇴소하고 나오니 천지가 새롭게 보이고 한 몇년은 흘러간 기분이었다. 한 친구 녀석은 6일 동안 대변이 나오지 않았는데 집에 가서 누니까 까만 염소똥 같은 것이 똑똑 떨어지더라나.... 똥까지 다 타서 없어져 버릴 정도로 호되게 훈련시킨 것은 유신 정귄의 '대학생 데모방지' 작전이었다.
나중에 필자가 입영통지서를 받고 논산 훈련소에 가서 5주간 신병훈련을 받게 되는데 차라리 50사단에서의 6일간 집체훈련이 더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추억되고 있을 정도니....
자 문제는 이제부터다.
"주님 대학에만 합격시켜 주시면..."하면서 심지어 새벽기도까지 나가서 부탁부탁했었는데 막상 대학에 붙고 나서는 너무도 급속도로 주님을 잊어 가고 말았다. 우리 속담에 '똥누러 갈 때만 바쁘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다.
대학 들어가서 자취방 잡아놓고 각종 환영회 마치고 한가해져서는 그래도 신앙생활하던 가락이 있어서 주일날 가까운 교회로 어슬렁어슬렁 가보니 마침 신학교를 갓마친 젊은 전도사가 교회를 시작하고 계셨는데 새 신자 하나 왔다고(그것도 대학생이!)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그뒤 내가 점점 주일성수를 게을리 하니까 몇 번이나 자취방에 심방 오셔서 기도해주고 가셨지만 말씀은 들을 귀는 점점 막혀져가고....
심지어 내가 속으로 '저 전도사 내보다 수학정석 덜 풀어보았을 텐데...'하는 싸구려(값싸고 천한)교만이 자라기 시작하고... 거기에다 각종 모임(회식), 동문회, 서클, 행사...등에 쫓아다니면서 술에 취하고 담배에 찌들고 화투(또이또이 노름)에 멍들고....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따라 삼갈 것이니다 (시편 119: 9)]라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2학기가 되어서는 아예 교회에 발길을 끊고 말았다. 기도할 것(제목)도 별로 없고 예수님 없이도 살 것만 같았고 나 혼자서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나 혼자 몽땅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스스로 좋다하고 시작하다니....
그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도전과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응전(Challenge & response)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대한 철저한 간섭과 섭리로 인해 필자는 그 뒤 행한 인생의 수고가 '헛수고'로 끝나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였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한다면 주간시티 몇년동안 쓰고도 남음이 있겠다.
끝으로 잠깐, 필자는 한창 피끊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청춘예찬'이 아니라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면서 [너는 청년의 때 곳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
이 말씀을 외쳐주고 싶다. `끝`
꾀 긴 글이지만 끝까지 일거 주셔서 감사합니다.[단 일찌안코 그대로 쭉 내려왔으면 다시 끌고 올라가서 일거야됨! [must+ have to!!]
22 years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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