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고독을 느껴본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이곳 외국 땅 캐나다의 추운 캘거리에 살면서 6개월간의 긴 겨울을 지내다 보면 늦어서야 해가 뜨고, 일찍 해가 지는 가운데, 어두움의 시간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긴 어두움 속에서 때로는 “아- 내가 혼자구나. 외롭다. 춥다. 쓸쓸하다. 적막하다. 허전하다. 캄캄하다.”라는 고독의 단어들이 떠오르고 고독의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고독의 감정을 달래주지 못하고, 그 허전함을 메워주지 못하는 것을 깨달을 때는 더욱 그 고독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깊은 고독이 여러분에게 찾아올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그 고독을 통해 자신의 삶이 더욱 하나님의 뜻에 맞는 좋은 모습으로 나아갑니까? 아니면 고독의 함정에 깊이 빠져 하나님과 자꾸 멀어져만 가는 안 좋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까? 즉 고독을 통하여 발전하는 사람입니까? 고독을 통하여 후퇴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경우는 어느 쪽입니까? 고독이 여러분에게 좋게 작용합니까? 나쁘게 작용합니까? 고독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까? 고독이 유익하고 괜찮은 편입니까?
영어에 보면 ‘고독’이란 단어를 표현할 때 ‘loneliness'와 ’solitud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혼자 있어서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는 ‘loneliness'라고 하고, 혼자 있어서 평온하고 안락한 상태를 ’solitude'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고통스런 ‘loneliness' 고독에 빠지는 편입니까? 평온한 상태의 ’solitude' 고독을 즐기는 편입니까?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고독에 관한 명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중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명언 몇 개를 소개합니다. “고독한 것이 두렵다면 결혼을 하지 마라. -체호프(19세기 러시아 문학가)” 아니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보통은 혼자 지내다가 외롭고 쓸쓸하니까 결혼을 하는데, 이 말은 결혼을 하면 도리어 더 고독해질 수 있으니까 고독이 무섭다면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때요? 이미 결혼하신 여러분, 이 말이 명언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혼자 지낼 때보다 더 외롭고 고독합니까? 아니면 아내와 자녀가 있어 고독할 틈이 없습니까? 지금 옆에 남편과 아내가 앉아있는데 ‘그렇다’고 대답하면 배우자의 기분이 몹시 상할 수 있으니까 그냥 말 안하고 있는 거지요? 하여간 이게 명언이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공감했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명언입니다. “고독 속에서 강한 자는 성장하지만, 나약한 자는 시들어버린다. -칼릴 지브란(20세기 레바논계 미국인 철학자)” “내가 고독할 때 나는 가장 고독하지 않다. -키에르 케고르(19세기 덴마크 철학자)” “고독은 나의 좋은 친구다.” 이 말은 누가 했지요? 몰라요?
아- 방금 제가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저도 철학자 기질이 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제가 해놓고 나서 진짜 이 말을 제가 처음 했는지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조선 후기 시인이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말을 이미 하셨더라고요. (에이,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좋은 말을 내가 처음 했을 리가요.)
하여간 저의 경우는 목사이다 보니까 설교 준비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늘 조용한 시간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오랫동안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설교 한편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고독은 목사인 저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삶의 일부분입니다.
즉 저는 고독을 매우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 출신의 샹송 가수 중에 ‘조르주 무스타키’라는 분이 있는데 그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독은 나의 친구, 고독과 함께라면 나는 결코 외롭지 않네.” 와- 이 사람도 철학자 기질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노래가 좋습니다.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말도 발견했습니다. “태초에 고독이 있었다.” 이거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창세기 1장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있고, 이어서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를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고독의 환경이 먼저 있었습니다. 이를 내 삶에 대입해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깊은 고독 속에 빠졌다고, 내 삶이 empty하다고, 공허하고, 어둠이 캄캄하다고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 고독으로부터 출발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빛이 있으라.“ 하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하나하나 만들어 가면 되는 겁니다. 동물들의 경우 개나 하이에나, 개미와 꿀벌들의 경우는 같이 모여서 지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나 호랑이, 쿠거와 같은 동물들은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혼자 따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울려 지내든지, 혼자 지내든지 간에 그것이 본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도 더 좋게 작용해야만 합니다.
제 시대 때의 인기 가수 중에 ‘차중락’이란 분의 노래 중에 ‘사랑의 종말’이라고 하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 첫마디가 이렇습니다. “외로워 외로워서 못살겠어요.” (이 노래 한번 틀어보실래요. 3분 1초 - 1L분 35초까지만) 그렇게 그는 외로움을 절규하다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그는 무명의 가수가 아닙니다. 꽤 인기도 있었고, 돈도 있는 유명 가수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고독하고 외로워서 못살겠다는 겁니까? 이 노래가 히트를 친 이유는 너도 나도 사람들이 다 고독하고 외롭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정호승’이란 시인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제목의 시집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아가라.”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깊은 산속 절간의 스님처럼 그렇게 일생동안 산속에 처박혀 홀로 고독하게 도를 닦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평생 백성들과 같이 계셨고, 베드로가 높은 산속에서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할 때에도 말없이 제자들을 이끌고 다시 산 아래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한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가족들을 떠나 홀로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계시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사역을 하시면서 종종 마음이 답답하거나, 영력이 딸리거나, 군중 속에서 영육 간에 피곤함을 느낄 때면 홀로 고독한 장소를 찾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14:23) 여러분, 우리들도 때로는 예수님처럼 조용한 장소, 고독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더욱 깊게 교통하는 기도의 시간, 묵상의 시간, 자기 성찰의 시간, 영적 무장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고독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도리어 고독을 통하여 영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보다 나은 즐거움이고행복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신이 쓰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고독의 장소, 고독의 환경, 고독의 시간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 시오. 하나님은 애급의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지내던 그의 인생을 심히 꼬이게 만드셨습니다. 결국 그는 살인자가 되어 황급히 광야로 도망을 쳐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고독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요셉도 보십시오. 부자인 아버지 집에서 혼자 채색 옷을 입고 홀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애급의 종으로 인신매매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 외국 땅에서 감옥살이도 3년을 하고, 그곳에서 국무총리가 될 때까지 13년간의 긴 고독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서러운 일,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보십시오. 그는 가이사랴에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또 로마에서도 2년간 가택 연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답답한 감옥의 고독함 속에서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라는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즉 크리스천의 고독은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고독의 시간에 마음이 슬퍼지고, 눈물이 흐르고, 자기의 존재가 너무나 처량하여 때로는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 고독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됩니다. 고로 저는 고독이 좋습니다.
물론 저는 목사입니다. 목자가 양들과 늘 같이 지내야 하듯이 목사인 저도 성도님들과 늘 같이 지내야 합니다. 고로 저는 이곳 캘거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27년간 지내는 동안 두 주 이상 교회를 비운 적이 없습니다. 이빨치료인 임플란트를 위해 한국에 가야할 것 같기도 한데, 그러면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이 저에게 맡겨준 백성들이 있고, 그들을 돌봐야 할 책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외국 땅 좁은 동네에서, 한곳에 오랫동안 어디 가지도 않고 지내는 것이 어찌 보면 매우 지루하고, 답답하고, 어떤 때는 심히 고독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비결은 제가 나름대로 고독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좋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고독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고독은 단지 나를 파괴하는 도구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독은 나에게 있어 꽤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이 외국 땅에서 고독을 느낄 때, 그 고독을 잘 활용하십시오. 고독을 기회로 삼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결국 고독이 큰 즐거움과 행복으로 승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당신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고독하고, 슬프고, 괴로웠을 텐데, 이제는 도리어 하나님 안에서 고독조차도 즐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인생의 고독 속에서도 더 주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과 우리가 더 큰 행복에 거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