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3:6
『전 유부녀입니다. 애가 둘이 있습니다. 근데 직장동료인 8살 연하남이 저를 사랑한데요. 그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저는 중졸입니다. 전 한쪽 눈이 사시예요. 외모는 어려보이고 귀엽단 소릴 들어요. 사랑하는 남녀들한테는 정말 아무 조건이 필요 없나요? 첫사랑 이후로 제겐 이 남자가 두 번째 사랑입니다. 아직 데이트를 해보진 않았지만... 회사에서도 그와 제가 서로 좋아하는 걸 알아요. 상사 분은 그에게 유부녀인 저를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제 결혼생활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제가 납치를 당하여 3일 감금당하는 중에 애가 생기므로... 전 이제까지 제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이틀이 멀다하고 구타하고 잔소리하고 생활력도 없죠. 그래도 애들보고 살았어요. 이젠 저도 행복해지고 싶은데 어떡하죠? 답 좀 부탁드려요. 제 나이는 35살입니다. 글구 제 남편도 제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아요. 저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단 하루라도 사랑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우린 이혼하려고 법원도 몇 번 갔었어요. 근데 남편이 안 해주더군요. 차라리 제게 도망가라고 하면서...
직장 동료인 그가 정말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걸까요? 때론 그렇게 느낄 때도 있어요. 문젠 제가 그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 사람 생각이 잠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어쩌죠? 저는 이제 그 사람이 없으면 못살 것 같아요.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답변을 기대합니다. 사랑의 아픔을 겪는 유부녀로부터...』
여러분, 이 글을 들으시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지난주 주일 설교 제목을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지난주의 설교 제목은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보다 폭넓게 사랑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장애가 되는 편협한 생각을 허물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잘못 오해하면 지금 읽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자칫 옹호하는 내용으로 비추어지기 쉽습니다. 즉 유부녀와 연하남의 사랑에도 국경이 없으니 얼마든지 해도 괜찮다. 특히 이 글의 유부녀는 남편으로부터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하면 어떠냐? 목사님도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했잖아요?
여러분, 왜 이런 오해가 생깁니까? 다름 아닌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유부녀의 이야기는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불륜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성경도 이런 스토리의 주인공들을 서로 사랑하는 자로 부르지 않고 불륜을 저지르고 간통을 하는 자로 부릅니다. 물론 당사자들이 들으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겠지요.
비단 이 스토리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청소년들도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즉 사랑과 불륜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기 전에 동거를 하거나 혼전성관계를 가집니다. 그리고 남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육체관계를 갖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연스런 현상이지 않느냐? 괜히 우리를 질투하지 마라.”
여러분, 남녀가 결혼 전에 성적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 역시 간음이요 죄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보면 결혼 전에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까지 하며 혼전 성관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혼전 성관계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면서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수많은 간음의 죄를 지은 사람도 사랑이라는 단어만 있으면 회개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저는 사랑한 죄 밖에 없어요. 사랑한 것이 죄가 되나요?” 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기가 막히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성경이 말하는 고귀한 사랑을 아주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마귀가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을 오해하게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 죄악과 불의를 저지르는데 아주 용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TV 연속극에 보면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불륜을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천은 사랑을 소재로 한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사랑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 그와 같은 매체에 자주 접촉하면 자신의 마음속에 세속적 가치관이 자라게 됩니다. 분명 음행을 저지르고도 사랑이라는 달콤한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감추거나,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거나,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인간의 심리를 사단은 교묘히 이용합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포장지를 주므로 사람들을 쉽게 타락시키고 사단의 역사를 쉽게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사랑의 정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사랑은 불의가 아닙니다. 간음과 같은 불의를 저지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갖다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은 불의에게 용기를 주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두 어린이가 싸웠습니다. 한 어린이가 다른 아이를 못살게 굴고 때렸습니다. 그런데 때린 아이가 내 아이고 맞은 아이가 남의 아이입니다. 이런 경우 당신이 부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고, 내 새끼, 참 용감하다. 그래 사나이는 남에게 맞아서는 안되는 거야. 남을 때려야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자기의 자녀를 사랑스럽게 껴안아 준다거나, 혹은 “그 녀석 장차 장군이 되겠네!” 하고 묵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럴 때 자기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기 자녀의 불의함을 지적하고, 다시는 그러한 불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바르게 교육하고 징계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자기 자녀가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남에게 수많은 피해를 주는 데도 가만히 방치하고, 도리어 옆에서 박수를 쳐주고 자꾸 부추기는 모습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불의를 보면 애통해하고 그것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또한 본문에 보면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은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지 거짓되고 미혹된 사상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무엇을 믿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교리가 어떠하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무하고 손잡고, 아무하고나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가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Ecumenical 운동의 기본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주교가 이런 점에서는 조금 심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행사가 있으면 불교와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습니다. 그래서 법당으로 초청을 받아서 가기도 하고, 또 그 사람들을 성당으로 초청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과연 사랑입니까? 그들은 사랑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요한은 요한이서 1:10-11에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잘못된 교리를 신봉하며 그것으로 미혹하는 자들은 아예 상종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을 외치고 싶습니까? 먼저 진리와 불의를 구별하십시오. 먼저 자신이 진리 위에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더 나아가 이웃들도 진리 위에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언제나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항상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떠난 사랑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맛이 아닙니다. 진리와 정의가 수반되지 않는 사랑은 변질된 사랑이요, 결국 악취가 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 사랑을 하기 원하십니까? 진리를 끼고 사랑을 하십시오. 정의를 가지고 사랑을 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정의와 진리와 함께하는 사랑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사랑을 나타낼 때 좋은 방법을 사용하십시오. 오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대할 때 우쭐대는 마음을 가지지 마십시오. 그들의 무식함을 비판하거나 멸시하지 마십시오. 좀더 참고, 좀더 인내하십시오.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 바로 잡혀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개구리 올챙이 시절도 생각하며 그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사단은 자신의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불의를 정의처럼 보이게 위하여 최고로 좋은 포장지를 사용합니다. 사단은 말을 부드럽게 합니다. 인자하게 웃음을 짓습니다. 사랑의 사도로 가장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깨달으면서도 그 사랑을 나타낼 때 포장지를 잘못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에게 인상을 쓰고 눈을 부라리며 “사단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하면서 정떨어지게 행동을 합니다. 그 결과 남편은 예수님이라면 이를 갑니다. 물론 남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큰 소리로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남편이 코앞에 있으면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십시오. 좋은 말을 골라서 사용하십시오. 최대한 친절을 베푸십시오.
술집에 가보면 여자들이 남자들을 꾑니다. 그녀들의 말은 애교가
철철철철 넙칩니다. 말 한 마디로 남자의 간장을 녹이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보고 “자기야! 오빠!“라고 부르는 것과 술집 여자가 ”자기야! 오빠!“라고 부르는 말에는 같은 말이라도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그러한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목소리와 애교에 남자들은 미혹이 되어 돈을 갖다 바치고 마음을 송두리째 주고 맙니다. 결국 불친절한 아내는 남편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 남편을 빼앗겼어요? 나 어떡해요?” 하고 눈물을 찔찔 짭니다.
정작 크리스천들은 진리와 정의와 함께하는 바른 사랑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이 틀려 거짓과 불의의 사단에게 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귀한 것을 사단에게 빼앗깁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주기 위하여 친절을 몸에 배는 것이 좋습니다. 말도 부드럽게 하고, 표정도 인자하게 짓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가식을 떨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귀한 사랑이 오해당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포장과 디자인의 중요성도 깨달아 진짜 사랑을 효과적으로 전파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순결해야 합니다. 불륜과 불의와 거짓이 아닌 바른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정의와 진리에 입각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서 좀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한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도록 다함께 노력하십시다.
사랑에 대한 오해
날짜:
2005/08/28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