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존심, 나의 자존심

날짜: 
2006/08/15
설교: 

고후5:17 하나님의 자존심, 나의 자존심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하루는 저의 누님과 함께 ‘순이’라는 젊은 중년의 여인이 갑자기 저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이 여인은 언뜻 보기에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히 있었고, 옷도 아주 허름하게 입고 있었습니다. 저의 누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으니까 저의 누님과 상당히 가까운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조금 더 대화를 들으니까 저의 누님과 동창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순이라는 여인은 학창시절에 상당히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으로 인하여 친구들이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고 동창회장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순이라는 여인이 중매결혼을 하고 난 후 갑자기 동창회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저의 누님이 길거리를 가다가 번데기 장수가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번데기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저의 누님이 번데기 장수를 하는 아줌마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했습니다. “아줌마, 번데기 좀 주세요.”
그렇게 말을 하고 그 번데기 장수를 하는 아줌마를 바라본 순간 저의 누님이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머, 너 순이 아니니?” 그러자 그 순이는 너무도 당황하여 그 번데기 장사 리어카를 버리고 얼굴을 가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저의 누님이 달려가서 그 순이를 대하니 순이는 말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 순이라는 여인은 저의 누님에게 자신의 인생의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중매결혼을 한 자기 남편은 정도 채 들기 전에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늘 구타를 했습니다. 물론 이혼도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자녀가 이미 2명이나 생겨 이혼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이가 자라나 양육비와 교육비가 많이 들어가는데도 남편은 여전히 돈을 벌어오지 않고 술과 도박에 빠져있으니, 이 순이라는 여인은 할 수 없어 추운 겨울날 길거리에서 번데기 장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합니다. “애, 내가 이 모양을 하고 어떻게 동창회에 나갈 수가 있겠니?” 이렇게 사연을 이야기한 순이는 저의 누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애, 내가 이렇게 번데기 장사를 하는 것을 절대 동창들에게 말하지 말아라.”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자존심이 센 사람이 있고, 자존심이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만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도 자존심이 있고, 노인들도 자존심이 있고, 청년들도 자존심이 있고, 남편도 아내도 다 자존심이 있습니다. 이 순이라는 여인이 동창회에 나가지 않은 이유도 다름 아닌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어른이나 애들이나 자신이 가까운 친구들보다 아주 못났거나, 아주 덜 배웠거나,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덜 갖추었다고 생각되면 이로 인한 자존심으로 인하여 스스로 우울해지고 불행을 느끼며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 사춘기 학생시절에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용모에 신경을 쓰다 보니 남자로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팔뚝이 너무 가늘고 허약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팔을 내놓고 다니는 학생복인 하복입기가 싫었고, 빨리 겨울이 와서 긴 팔 소매가 있는 동복을 입기를 고대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팔뚝을 굵게 해보겠다고 열심히 운동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가냘픈 나의 팔뚝을 보이기 싫어서 버스에서 조차 손잡이를 잡지 않고 있다가 차가 급정거하자 넘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중학교 야구부원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학교 팀은 제법 야구를 잘해서 전국 대회 준결승전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학교 수없을 중지하고 응원을 나왔습니다. 그 당시 우리 팀이 상대 팀에게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타석에서 상대 피처로부터 그만 데드볼을 맞았습니다. 우리 학교 응원팀은 드디어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떨고 좋아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1루에서 투수 견제구에 걸려 그만 아웃을 당하여 귀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게임을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말합니다. “아이고, 띨띨하게(바보같이) 그게 뭐냐?”
저도 그 일로 인하여 상당히 자존심에 상처를 당하고 있었는데 친구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저의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오랫동안 그 추억은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언뜻 그 일이 생각나면 갑자기 저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한 순간의 자존심의 상처가 나를 파괴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그 사건으로 인하여 친구를 만나도 괜히 불안해지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존심의 상처 때문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지만 그 자존심의 상처로 인한 파괴력은 너무도 대단합니다.
제가 한국의 기도원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한 중년 부인이 기도원에서 제법 오래 있었는데 그 여인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매무새도 단정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늘 말이 없이 허공을 쳐다보고 가끔씩 이상하게 혼자 조용히 웃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굴 바탕을 보면 언뜻 굉장한 미모의 여인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기도원에서 같이 사역하고 있는 나이 많이 드신 한 여전도사님과 같이 기도원 길을 걷다가 그 여인을 길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나이 많이 드신 여전도사님을 알아보고 조용히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제법 멀리 지나가고 난 후 그 여전도사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쯧쯧쯧, 참 안됐어!” 그, 말을 듣고 제가 좀 여쭈어 보았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죠?” 그러자 그 여전도사님이 그 여인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몇 년 전 그 여인이 어느 한적한 공중 화장실에 들어갔었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나 목에 면도칼을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서 강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 결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져 기도원에 들어와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살다 보면 큰 일 혹은 작은 일로 인하여 자존심에 상처를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비단 인간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인격을 갖추신 분이기에 그 분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에게도 자존심의 상처를 당하는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걸작품 중의 걸작품이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자녀이었고, 하나님의 자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바라보면 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단이 하나님의 자존심이 아담과 하와를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고, 사단의 말을 듣게 했습니다. 즉 하나님 편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의 편으로 전락하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편에 서자 그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떳떳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수치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존심의 상처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피하여 숨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존심인 아담과 하와가 이렇게 파괴를 당하자 하나님의 자존심도 역시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아담아, 누가 너를 이 모양,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누가 너의 자존심, 나의 자존심을 이렇게 파괴했느냐?” 하나님은 깨어진 자신의 자존심인 아담과 하와를 회복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감싸주고, 치료해주며,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그들의 가난을 부요로, 그들의 저주를 축복으로, 그들의 사망을 생명으로,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서 그들의 파괴된 자존심을 회복시키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단은 죄의 삯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이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자존심이 파괴당하고, 처절히 버림을 받아 나무에 달려 죽어야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살려보아도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죄 없는 분이 나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려고 자기의 자존심을 스스로 파괴당하는 길을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사형장으로 끌려가서 자기의 자존심을 모두 십자가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는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고,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려고 양 손과 발에 대못을 박히셨고,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려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며 신음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발가벗겨져 나무에 매달려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분은 오늘도 외칩니다. “내가 너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노라. 그러므로 다시는 자존심의 파괴를 당하지 말아라. 나는 이미 너의 죄 값을 다 치렀노라.”
제가 기독교 성화를 보다가 잊지 못하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 밑에서 한 여인이 주저앉아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울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표정을 보니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기쁘고 감사해서 감격에 겨워 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 이 여자 미인박명이라더니 일찍부터 자존심의 상처를 당하여 고달픈 인생을 살았구나!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 후 파괴당했던 자존심을 회복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구나! 이 여인 이제 너무도 감격하여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구나!”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감격과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잃었던 에덴동산의 기쁨을 회복하고, 깨어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여러분, 예수님은 단순한 종교와 형식이 아닙니다. 단순한 도덕과 법률이 아닙니다. 단순한 철학과 사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와 나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시키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세상에 누가 나의 깨어진 자존심, 무너진 자존심, 파괴된 자존심, 찢겨진 자존심을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두 팔 벌려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노라. 내가 너를 위하여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큰 상처를 받았노라. 내가 너를 위하여 나의 귀한 자존심을 버렸노라.”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이제 예수님 안에 들어와 그 동안 파괴당했던 자존심을 회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히 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이 기쁨과 환희의 사람으로 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당신이 당하는 자존심의 상처는 곧 하나님의 자존심의 상처요, 당신의 회복은 곧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이곳 외국 땅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많은 자존심의 상처를 당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의 상처를 순간순간 치료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곳 살기 좋은 캐나다에서도 여전히 불행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고로 명심하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반드시 회복하십시오. 새로운 피조물도 변화되는 은혜를 반드시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 외국 땅에서 행복의 주인공이 반드시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