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초대 받은 사람들

날짜: 
2006/12/24
설교: 

요11:11 구유에 초대 받은 사람들
어느덧 2006년도 거의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절 이브입니다. 성탄절은 참으로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참 의미를 모르고 괜히 흥분과 축제와 야단스러움으로만 보낸다고 참된 성탄 축하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년 중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달은 12월이며, 그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날은 바로 성탄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가장 경건해야할 날인데 오히려 그 날에 마귀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죄악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탄절에 주인공이신 예수님 없이 우리들만 좋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며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과 삶에 모시는 진정한 성탄절이 되기를 원하며, 이에 관련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1. 처음 성탄절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11절 말씀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온 인류가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리던 창조주이시며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축복을 가득 담아서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려 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렸고, 그에게 무관심하였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학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헤롯대왕은 예수님을 죽이려했고, 베들레헴 성민들은 예수님에게 방 한 칸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만삭이 된 임산부인 마리아에게 특별히 배려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이나 로마의 군인들, 돈 많은 사람들, 특수층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방은 있었지만 요셉과 마리아가 거할 방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냄새나고 더럽고 시끄럽고 춥고 어두컴컴한 짐승 우리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 마구간이 바로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인심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너무 푸대접했다는 극단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영접도 포근한 환영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모든 축복을 가지고 자기 땅에 왔지만, 오히려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성탄절의 상황이었습니다.
2. 오늘의 성탄절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예수님을 그렇게 푸대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간에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혹 내 마음이 이미 세상의 다른 것들로 가득차있어서 “아이고 예수님, 죄송하지만 제 안에 지금 머무를 방이 없습니다. 저쪽 구석에 좀 가시지요?”라고 말을 해야 할 형편은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방은 좋은 호텔, 화려한 궁전, 따뜻한 온돌방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방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이미 세상 욕심과 이기심, 교만과 허영, 세상자랑과 세상재미로 가득차있다면 참으로 이전의 성탄절과 똑같은 상황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방문해 보시고 “아- 여기는 찬양도 있고, 선물도 있고, 기쁨도 있고, 축하행사도 있고, 크리스마스트리도 있는데 내가 들어가 머물 마음의 방은 없구나!” 하실까 염려가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의 방에 영접지 않고 오히려 문 밖에 세워두면서 성탄절 축하행사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탄절 이브라고 밤중까지 혹은 밤을 꼬박 새며 서로 떠들며 웃고 즐기고 먹고 마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란한 노래 소리, 화려한 장식, 외형적인 축하행사와 예수님의 성탄절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 좋아하는 즐거움으로 성탄절을 보낸다면 교회 밖에서 흥청망청하는 그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마음의 방에 모시지도 않고 술집에서, 혹은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몸을 흔들어 대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진정한 성탄절을 맞이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고, 에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분의 삶을 묵상해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심으로써 예수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강과 위로에 동참하면서 그 분께 다시 한 번 무릎 꿇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기뻐해야 될 것에 무감각하고, 참된 은혜에 무표정하고, 참된 사랑에 무반응적인 단지 행사위주의 성탄절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탄의 참의미를 모르고 남이 요란스럽게 떠드니까 나도 떠들어야 된다는 식의 성탄절을 맞이하면 비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이 없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은 참된 성탄절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여러분, 성탄이란 죄로 말미암아 사형언도를 선고받은 사형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면하고 영생문서를 안겨 주시는 기쁨의 팡파르가 울린 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탄의 의미를 잊은 채 성탄절을 통해 오히려 범죄만 더해 가는 이 패륜, 이 오류, 이 무례에서부터 우리는 정말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내 마음속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깨끗한 방을 준비해야 합니다.
1994년 두 명의 미국인이 러시아 교육부의 초청을 받아서 러시아로 갔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교도소나 사업장, 소방서나 경찰서, 심지어 큰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윤리 도덕을 가르쳤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신앙적인 관점에서 가르쳐도 된다는 허락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탄절이 가까워져 왔을 때 큰 고아원을 방문해서 원생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고아원에는 100 여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모두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학대를 받고서는 정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조사를 하기 위해 고향인 베들레헴 땅에 왔지만 비어있는 여인숙이 없어서 짐승들이 잠자는 축사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며, 만삭이 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서 구유에 놓았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고아들은 물론이고 고아들을 돌보는 직원들까지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말에 경청했습니다.
이제 예수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 마친 다음에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모습을 공작으로 재현해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마분지 세 개를 나누어주면서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구유, 즉 여물통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동네에서는 색종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란 냅킨에서 잘라낸 조그마한 정사각형 종이도 아이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지시를 따라서 종이를 찢어서 지푸라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그 조각들을 구유 안에 흩어 놓았습니다.
또 어떤 미국 여자가 러시아를 떠나면서 버린, 다 낡아빠진 나이트가운에서 잘라낸 작은 헝겊조각들을 아기 예수를 감싸는 강보, 즉 담요처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는 두 사람이 미국에서 가져온 어떤 가죽제품을 오려서 인형처럼 만들어 쓰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두 사람의 미국 선생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열심히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샤(Misha)라는 이름을 가진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만든 구유는 이상했습니다. 구유 안에 아기 예수 혼자 누운 것이 아니고 두 아이가 함께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미국 선생님 한 분이 물었습니다. "아니, 너는 구유에
왜 아기를 둘씩이나 뉘여 놓았니?" 그러자 미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구유에 뉘였을 때 갑자기 예수님이 저를 쳐다보셨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저에게 머무를 빈방이 있는지 물으셨어요. 저는 예수님께 대답했어요.‘예수님, 저는 아빠도 엄마도 아무 일가친척도 없는 고아라서 예수님을 모실 빈방이 없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구나!' 하시면서 저와 같이 있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 그건 안됩니다. 저는 돈도 없어서 예수님께 선물도 사드릴 수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어떻게 저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세요?' 하면서 만류했어요. 그러나 저는 예수님과 꼭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저와 함께 계실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추운 날씨에 구유에 누워 계시니 얼마나 추우실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어 드릴 수는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또 여쭈었지요.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따뜻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은데... 그것이 예수님께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미샤야, 네가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란다.'(Misha, if you keep me warm, that will be the best gift anybody ever gave me.)
그래서 저는 주저하지 않고서 예수님께서 누워 계신 말구유에 들어가서 함께 누웠지요. 둘이 함께 누워 있으면 온기로 따뜻해지잖아요? 제가 구유에 들어가서 예수님 곁에 누웠더니 예수님께서 저를 쳐다보시면서 '미샤야, 고맙구나. 이제는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어주마' 하고 말씀해주셨어요."
어린 미샤가 이 말을 끝냈을 때 미국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고아 소년은 그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자기를 버리지도 않고
학대도 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샤는 바로 그런 사람을 구유에 누워 있는 예수님을 통하여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유 속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생각에서 구유 안에 인형 두 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 아기는 예수님이고, 또 다른 아이는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위에 떨 아기 예수님을 자기 체온으로 녹여주어서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반대로 이 고아 소년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해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을 따뜻하게 만들어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고아 소년 미샤가 그랬던 것처럼 냄새나는 짐승의 구유 안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떨어지지 않고, 주님 역시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구유에 있기를 거부합니까?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닌 엉뚱한 곳에서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구유가 아닌 술집이나 나이트클럽, 파티나 쇼핑몰 등에서 기쁨을 찾고 위로를 찾고 희망을 찾습니다. 물론 그런 곳들이 우리에게 일시적인 기쁨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참 기쁨은 주지 못합니다. 잠시 잠깐 동안의 위로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지속되는 위로는 주지 못합니다. 금방 있다가 사라질 희망은 안겨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희망은 안겨주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찾았다면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기점으로 마구간의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구유에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뜻하게 만들어드립니다. 예수님의 구유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포근함과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계신 구유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초라하고 냄새나고 추운 곳이지만 그곳에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은 따스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성탄절에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쇼핑몰로 달려가지도 말고, 술집이나 향락의 장소로 달려가지도 말고, 예수님이 계신 구유로 달려가십시다. 겨울 추위에 떨고 계신 아기 예수님은 여러분의 따뜻한 체온을 그리워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구유에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단 하루만이라도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그 구유에 함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 역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