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1-3 버리고 따르라
중국 송나라 때 이방이란 사람이 지은 ‘태평어람’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을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처녀에게 두 집에서 동시에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한 집은 굉장히 부잔데 총각의 생긴 모습이 참으로 못생겼습니다. 그런데 둘째 청혼이 들어온 집은 굉장히 가난한데 총각의 인물이 너무나 잘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을 택하기가 어려워진 처녀의 부모는 딸의 생각을 직접 알아볼 요량으로 딸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혼처를 정하기가 쉽지 않구나. 네가 보기에는 어느 집이 좋으냐? 만일 동쪽 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손을 들고, 서쪽 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왼손을 들어라.”
그러자 딸은 잠시 망설이더니 두 손을 동시에 번쩍 들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모가 “아니, 너 왜 두 손을 들었느냐?” 하고 그 이유를 물으니까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동쪽 집은 부자니까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싶고, 서쪽 집은 신랑이 잘생겼으니까 잠은 서쪽 집에서 자고 싶어요.”
여러분, 바로 여기에서 한자어인 ‘동가식 서가숙’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즉 한 가지만 택하고 한 가지는 버려야 하는데 욕심으로 인하여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하는 인간의 성품을 표현한 말입니다. 한국말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좀 속어 같지만 ‘양다리 걸친다’는 표현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그렇지요. 어찌 처녀가 동시에 두 집의 총각과 결혼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바로 이 처녀와 같습니다. 축복과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니까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세상 재미와 쾌락은 마귀가 가져다주니까 마귀와 더불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양다리 걸치고 살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겸하여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을 버려야만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이 말씀을 받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고, 그 아내 사라의 나이도 65세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치안이 제대로 서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라고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갈등이 생깁니다. 그 다음 구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좋은데, 먼저 버리라고 하는 명령은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냥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번창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면 좋은데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버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치르는 대가가 있습니다. 먼저 옛 삶을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버려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도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떠나지도 않고 하늘나라도 함께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즉 앞서 말한 처녀처럼 두 손을 동시에 들면서 ‘동가식 서가숙’을 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옛 삶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위대한 결단을 합니다. 물론 그가 고향 땅을 떠나므로 그에게 당장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고향을 떠나 외국 땅에서 살면서 기근이 다가왔고, 아내를 애급 왕에게 빼앗기는 수치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여러 왕들을 상대로 전쟁도 치르는 위험도 당하게 되었고, 나그네로 생활하면서 토착민들에게 왕따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후 그는 꿈에도 그리던 독자 이삭을 100세에 낳을 수가 있었고, 여러 가지 하나님의 축복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므로 그는 진짜 하나님이 약속한대로 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예화를 드는 인물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당신에게도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실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당신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버릴 때 그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이 비로소 성취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버리라고 하는 것을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와 전투를 앞두고 행군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그가 뒤따라오는 군사들을 지켜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도무지 싸울 군인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이전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을 잔뜩 짊어진 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대왕은 부하들의 마음이 전투가 아니라 전리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행군을 멈추게 한 뒤 군사들이 메고 온 전리품을 모두 불에 태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군사들은 크게 불평을 하고 원망을 했지만 대왕의 명령이라 순종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전부다 불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홀가분해 졌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의 마음도 없어지고, 무거운 짐도 다 벗고 난 다음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을 대면해서 대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적은 군사로써 대군인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고, 전리품은 불에 태운 것보다 더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잔뜩 짊어지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우리가 적군과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마귀하고 못 싸웁니다. 세상 짐 풀어놓고, 세상 사랑 제켜 놓고 나가야 마귀와 싸워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즉 축복이란 버려야 얻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세상을 버리지 않고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천국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그대로 계시면서 이 땅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그 영광과 그 보좌와 그 권세를 다 버리시고 초라한 나사렛 동리의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사람으로 태어나야 되었습니다. 엄청난 희생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40일 금식을 하신 후에 마귀가 나타나 세상을 받아들이도록 유혹합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마귀는 예수님에게 다가와 네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도, 하나님의 영광도 상관없이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식욕조차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명예욕으로 예수님을 세상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명예욕도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마귀가 세상 권세와 영광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버려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인간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려야 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재물로 내어주지 않고는 세상의 영혼들을 구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도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을 가지셨습니다. 사람이기에 당연히 죽지 않고 살고 싶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여기서 이 잔이란 세상 사람을 위해서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는 것인데, 예수님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이면 나를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바로 생명의 애착조차 버리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의 큰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생명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주님도 살고 세상을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셔야 세상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어 놓고 못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에 보면 이와 같이 자기를 버리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지극히 큰 축복을 주신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얻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면 그로써 주님이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로 11절에 보면 그로 인하여 이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버리고 따르신 예수님이기에 이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셔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면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어지고 맙니다. 물론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버린다는 것은 고통이 따릅니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으므로 불명예스럽게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결단을 할수록 우리에게는 더욱 큰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자 그에게는 놀라운 축복과 함께 100살에 독자 이삭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17살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또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독자 아들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려가서 몸을 칼로 조각내고 태워 드리는 제사로 드려라.” 아니,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말씀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행복해지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질투와 시샘의 하나님입니까 뭡니까? 도대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렇게 괴롭히는 것입니까?
자, 이제 아브라함은 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옛날처럼 또 버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이삭만큼은 정말 안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양보하시지요.” 하고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할 것인가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까지 버리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마침내 죽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그 결론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하나님의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창22:9-10, 12, 16-17)
올해 우리는 하나님께 정말로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버려야 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27-30)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의 것들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굉장히 고민스럽습니다. 그럴 때 과감히 결단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는 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이와 같이 버리고 따르는 가운데 얻는 축복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버리고 따르라
날짜:
200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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