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2:1-2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하나님을 믿다 보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나요? 왜 마귀가 하와를 시험하도록 하셨나요?” 이 같은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다 한 번씩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믿음이 있는 분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와 같이 변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고 마귀가 시험하게 한 것은 사람을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느냐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변명을 하고 설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만 이 대답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실 것도 알고 계셨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 이에 대한 대답이 궁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유독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삼으셨습니까? 그리고 유대민족을 가나안 땅에 심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살았던 일곱 민족을 다 전멸시켰습니까? 심지어 어린아이나 노인과 여인까지 다 멸절시킨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가나안에 있는 일곱 민족은 우상을 섬기고,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있는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워서 정결한 신앙과 행동을 하는 민족으로 삼으셨고, 이와 같은 믿음의 민족을 통해서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 대답도 가만히 생각하면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누구는 사랑하고 용서해주고, 누구는 미워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린이들과 여인까지 학살하라는 명령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또한 “왜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6백만 유대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나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이와 같이 설명을 합니다. “마태복음 27:24-25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찌어다 하거늘’”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때 빌라도가 “나는 책임이 없으니 너희들이 책임을 지라.”고 하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래,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대답을 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책임을 물어 그 자손 600만 명을 히틀러에 의해 학살을 당하게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답은 그리 신통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그 말을 꼬투리 잡고, 그 책임을 자손들에게까지 전가하는 옹졸한 하나님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게슈타포에게 사형을 당한 괴들러(Goedler) 박사의 수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개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계실까? 나는 그것을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미쳐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포의 풀무불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릴 때 손끝 하나 꼼짝하지 않고 죽게 버려두셨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우리 크리스천 역시 이러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개인생활에도 “왜 이 고통이 내게 다가옵니까? 왜 이 슬픔이 다가옵니까? 왜 나는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살아야 됩니까? 왜 나는 병들었습니까? 왜 내가 망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배신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내가 낭패를 당해야 됩니까?”라는 질문을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며 이렇게 몸부림을 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22:1-2)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독생자 예수님이 물으시면 그래도 한 마디 응답을 하시는 것이 정상인데 왜 하나님은 쌀쌀맞게 한 마디 대답도 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런 고통 속에서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 그것도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이 시원스럽게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의 이유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를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써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겨우 1, 2, 3, 4, 5, 6, 7, 8, 9, 10을 깨달은 유치원 아동이 선생님께 찾아가서 고등수학을 묻습니다. “선생님, 미분과 적분이 뭐예요. 좀 가르쳐 주세요.” 그럴 때 선생님은 그 유치원 아동을 도저히 이해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그 아동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허허, 참 똘똘하구나! 지금은 설명해줘도 네가 이해할 수가 없으니 조금 더 장성하면 가르쳐주마.”라는 말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유치원 아동이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가서 “아인슈타인 박사님, 상대성원리가 뭐예요.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하면 아마 아인슈타인 박사는 그 아동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싱긋이 웃으시고 고개만 끄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동은 그러한 것을 이해할만한 지혜와 총명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식으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고로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룻배가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듯이 인간의 조그만 가슴에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다 담을 수 없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조그만 나룻배가 그 많은 바닷물을 어찌 그 속에다 다 담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우주를 다 이해하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어찌 다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이해하고 믿기보다는 믿고 나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답일 것입니다. 실지 하나님의 일들을 모두 이해해야만 믿는다고 하면 우리가 믿을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금이 가고 조금 깨어진 오래된 물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다른 항아리와 함께 그 깨어진 항아리를 가지고 물을 긷는데 사용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주인이 깨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사용하므로 깨어진 항아리는 항상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온전치 못해서 주인님께 폐만 끼치는구나! 나로 인해 그토록 힘들게 구한 물이 새어 버리는데 아직도 나를 사용해 주시다니!”
그래서 하루는 깨진 항아리가 용기를 내어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왜 저를 버리고 온전한 새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별 쓸모가 없을 텐데요.” 그 말에 주인은 싱긋이 웃고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깨어진 항아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 항아리를 사면 좋겠는데... 왜 주인은 나같이 금가고 깨어져서 물이 줄줄 새는 나를 왜 사용하시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고 주인과 같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만에 주인이 깨어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애야, 너 우리가 걸어온 뒷길을 한번 돌아보아라.” 깨어진 항아리가 뒷길을 돌아보니까 아름다운 많은 꽃들이 길에 피어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애야, 이제 네가 깨닫느냐? 네가 깨어진 물 항아리가 되어서 물을 줄줄 흘렸기 때문에 저 꽃들이 다 살고 아름답게 피어있단다. 만약 네가 물을 한 방울도 안 흘렸으면 저 꽃들은 다 말라 죽었을 것이다.” 그러자 깨어진 항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이해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깨진 항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해를 했지만 우리의 삶은 오히려 이해를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이므로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냥 웃고 침묵할 따름입니다. “하나님, 왜요?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라고 수없이 묻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웃으시고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먼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25년간 기다려서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17살 정도 될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거기서 그를 조각내고 불로 태우는 번제로 드려라.”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왜요?”라고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이해시키려고 설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나는 믿는다. 고로 나는 순종한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니까 나중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했는지 아브라함을 이해를 시켜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사랑이고 절대 선이시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되게 해주시는 것을 믿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자세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과정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형들이 자기를 잡아서 발가벗겨 우물물에 던져 넣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가? 왜 형들이 자기를 건져서 미디안의 대상에게 팔아 넘겨서 종으로 팔리게 하는가? 왜 자기가 보디발 장군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서 고생해야 하는가? 그리고 겨우 가정 총무가 되어 살만하니까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참소를 받아서 억울하고 답답하게 누명을 덮어 씌고 감옥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썩어야 하는가?”
도저히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전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국무총리가 되어서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국마다 그 모든 것이 국무총리가 되는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깨달음은 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라온 이후에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깨닫고 난 다음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고 순종하고 난 다음 이후에 깨닫게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의 거울은 요즘의 거울처럼 뒤에 수은을 입힌 맑은 거울이 아닙니다. 단지 구리를 광을 내서 사용했습니다. 고로 거울의 모습이 희미했습니다.
즉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구리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알고 부분적으로 알고 완전히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그제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펼쳐 보여 주시면서 “그때는 네가 이해할 만한 지성이 없었기 때문에 설명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설명해 주마.” 하고 우리의 모든 질문에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설명해 주시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성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그때까지 로마서 8:28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혹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고 묻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그 날에는 모두 다 알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초초하고 불안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신뢰하며 순종하고 따라가 보십시오. 얼마 후 당신의 입에서 “아하! 그렇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하나님의 솜씨를 보며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날짜:
200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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