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7:20-22 피해의식을 극복하며
요즘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살인사건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더구나 33명을 죽인 살인자가 23세의 버지니아 공대에 다니는 한국학생이라는 것으로 알려져 같은 한국인으로서 참으로 죄송스럽고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제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 아이도 교회에 다니거나 예수님을 믿는 아이가 아닐까?”
여러분,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최근에 한국 연예인 가운데 두 분이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건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두 분이 부모님과 같이 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었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이 자살을 하는 것을 보면서 혹시 이번 살인 사건을 저지른 학생도 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아이 역시 버지니아의 한 한인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외톨이고 폐쇄적이다 보니 그 어머니가 목사님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아이를 잘 지도하려고 애를 써도 너무 폐쇄적이므로 마음을 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어떻게든지 그 마음을 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그저 “예, 아니오.”라고 무뚝뚝하게 대답만 할 뿐 가까이 지내기가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방송사에 보낸 편지가 공개가 되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을 보면 이 학생이 상당한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편지 중 일부를 발췌합니다. “넌 날 궁지로 몰아넣었고 단 하나의 선택만을 하도록 했어. 이 선택은 네가 한 것이야.” “누가 네 얼굴에 침을 뱉고, 목구멍에 쓰레기를 쑤셔 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 ”그리스도는 나를 괴롭히는 걸 좋아했어. 그는 내 머리에 암 덩어리를 넣고 나의 마음을 위협하고 항상 내 영혼을 파괴하는 것을 좋아했어."
여러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신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기에 서로 상처와 피해를 주게 됩니다. 특히 말세라는 때가 가까울수록 인간성이 파괴되어 서로간의 상처와 피해는 더욱 커지고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피해와 상처를 입었을 때 이를 잘 치료하고 해결하지 못하면 그 피해의식은 미움과 증오로 발전이 되고, 더 나아가 그 증오가 폭발하면서 오늘과 같은 비극으로 번질 수가 있습니다.
저희 가정에도 이전에 피해의식으로 인하여 살인이 일어날 뻔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저희 누님이 밤중 늦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나고 혀가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횡설수설 하더니 갑자기 부엌으로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향해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너무 놀라서 황급히 제가 있는 건넌방으로 도망 와서 문을 잠갔습니다. 그런데 문 밖에서 저희 누님의 술 취한 소리가 들립니다. “야, 그때 왜 육성회비를 주지 않았어! 내가 그때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20년 전에 한국에는 육성회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이 나라의 돈으로 운영했지만 좀 부족했던지 학생들이 상당한 액수의 돈을 학교에 내야만 했습니다. 만약 육성회비를 제 때에 내지 않으면, 담임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에게 문책을 당하고, 그래서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의 명단을 부르고 때로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야단을 치므로 어린 학생들에게 심함 수치감과 모멸감을 주는 경우가 종종 발발했습니다.
저희 가정도 그 당시 아버님의 사업이 안되고 생활이 한참 궁핍했었습니다. 그래서 늘 저희 어머님이 이웃집이나 친척 집에서 돈을 꾸어오곤 했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의 육성회비를 제 때에 갖다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저희 누님이 어린 시절에 상처와 피해를 입고 그것이 잠재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술에 취하여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피해의식은 미움과 복수심을 일으키게 되고, 그날 밤에 칼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란을 떤 것입니다.
만약 이때 저희 어머님이 같이 열을 받아서 “야, 이 계집애야! 그래, 네 어미를 죽이겠다고? 어디 죽여 봐라!” 하고 싸웠다면 그때 정말 살인이 났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희 어머님은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세계를 아셨으므로 같이 싸우지 않고 그 자리를 빨리 피하여 제 방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저와 같이 손을 잡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살인의 귀신아, 우리 가정에서 물러가라. 딸의 마음속에 들어가 역사하는 미움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렇게 한참 기도하자 문 밖에서 저희 누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 전에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던 날카로운 음성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딸의 목소리였습니다. “엄마, 문 좀 열어봐. 아이, 내가 왜 이러지! 아이, 머리 아파!”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단이 우리의 피해의식을 이용하여 미움과 증오를 일으키고 살인을 일으키는 경우가 아닙니까?
히틀러의 경우도 보십시오. 그도 유대인에 의한 피해의식에 극도로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와 유대인 남자가 바람이 났었습니다. 그때부터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하여 피해의식을 느꼈고 유대인에 대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즉 피해의식이 유대인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일으키고, 그 결과 복수심에 불타서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가룟유다입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면 자신도 출세를 할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겠다고 하니 가룟유다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지금 죽으면 내가 3년 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이고, 내 청춘! 누가 내 청춘을 보상해 주나!”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청춘을 뺏어간 사람,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스승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그 틈새를 노리고 사단이 가룟유다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룟유다는 사단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기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이 들어보니 이미 엎질러진 물인지라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려는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에 피해의식이 있지는 않습니까? 분노가 숨어있지는 않습니까?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역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당신의 생각에 그가 당신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그가 당신에게 수치를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그 피해의식에서 비롯한 미움과 증오와 분노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당신도 버지니아 공대의 살인자와 같이 될 소지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피해의식에서 오는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 피해의식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같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즉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다 보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같이 직장 생활을 하고, 믿음 생활을 해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같은 형제와 자매간에도, 또한 부모자녀 간에도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의 동물인 사람이기에 미움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원한이 맺힐 수가 있습니다. 분노로 인하여 잠을 설칠 수도 있고, 그 분노로 인하여 괴성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좀 내성적인 사람은 폐쇄적이 되고 우울증으로 발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피해와 상처를 해결하려고 술도 마실 수가 있고, 마약과 도박과 음란에도 손을 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와 상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쌓아놓으면 결국 이것은 어젠가 폭발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게 됩니다.
고로 피해와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마음에 품어서는 안됩니다. 즉시 하나님에게 자신의 상처 입은 것을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이런 상처를 아무개에게 당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제 마음에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려고 합니다. 그를 때려주고 싶습니다. 저도 그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세요.”
이렇게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아뢰므로 피해와 상처의 고통을 경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하신대로 이 세상에는 의인이 아주 없기에 이런 상처와 피해를 입을 수가 있다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사랑을 쏟고 정성을 쏟은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심한 상처와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은 이를 갈고 복수심에 불타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 그 사람도 죄인이기에 그런 상처를 나에게 줄 수 있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런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는가? 나도 그들을 용서해야지! 나도 그들을 사랑해야지!” 할렐루야!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당하면 자신도 남에게 상처를 준 것도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대개 보면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며 남을 미워하는 사람일수록 자신도 남에게 상처를 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22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즉 자신이 남에게 상처만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도 알게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준 것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피해와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한번도 입히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즉 인간은 너도 나도 불완전하기에 상처와 피해를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 인간에게는 서로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나쁜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세주가 필요하고, 이러한 피해와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고통을 그 모습 그대로 아뢰어 보십시오. 나만 피해를 입었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내가 먼저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을 회개해 보십시오. 그럴 때 어디선가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임합니다. 내 마음에 쌓였던 원한이 순식간에 녹아집니다. 어느새 나의 모습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이 불쌍해 보이고, 더 나아가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불만이 생기고 기쁨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은 멀리 도망가고 미움과 증오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증오가 폭발하는 날에는 우리는 또 다시 고통의 눈물을 함께 흘려야 합니다. 특히 문화와 언어가 다른 외국 땅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더 많은 피해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인종차별이란 피해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욱 많은 피해를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지만, 그 제자들에게 저주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부활하신 후 자신의 분노를 제자들에게 폭발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못 박고 죽인 사람들을 향하여 복수의 총을 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모든 사람들의 죄인된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그 죄성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피해를 당해도 그 피해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이 주시는 복음의 능력에 참예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해의식을 극복하며
날짜:
200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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