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4:35-41 얼마나 주님을 믿습니까?
어떤 총각이 한 여인에게 반하여 “사랑해!(I love you!)”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 여인이 그 총각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얼마만큼?” 혹시 여러분들이 이 총각이라면 상대방 여성이 이런 질문을 할 줄 예상하고 이에 대한 대답도 미리 준비하고 난 후에 “사랑해!(I love you!)"라는 고백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어린 아이들이라면 얼마만큼?”이라는 질문에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이라고 대답을 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만큼?”이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우주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당신은 과연 얼마만큼 주님을 신뢰합니까?”
'서든데스(Sudden Death)‘라는 영화에 보면 한 어린아이의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 누나와 함께 아이스하키 결승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잡자 아버지는 무슨 중대한 일이 생겼는지 이들 남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혹시 이 경기장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절대로 이 자리를 떠나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즉시 아버지는 남매를 그곳에 남겨두고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누나는 아빠가 너무 늦게까지 안오니까 아버지를 찾아본다면서 그 남동생을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누나마저도 떠난 지 한참이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이는 불안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그 자리를 떠난 아버지는 테러범들과 대치하면서 테러범들이 장치해 놓은 폭탄을 하나하나 제거해 갑니다. 그런 와중에 경기장의 전광판이 폭파되자 관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하고 밖으로 모두 대피를 합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킵니다.
모두가 경기장을 떠나고 없는 텅 빈 관중석에 아이만이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경기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사라진 딸을 구출하고 난 후에 또 다시 피투성이가 되어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아들은 아빠에게 달려가 안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아빠가 올 줄 믿었어. 그래서 무서워도 여기 앉아 있었어!"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향한 이런 믿음, 이런 신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가 아빠를 신뢰하여 끝까지 자리를 지킨 것처럼, 우리도 어려운 외국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는다고 하여도 그 믿음의 크기나 깊이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때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책망도 하셨고, 때로는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면서 칭찬도 하셨습니다.
보통 우리들이 믿음의 크기와 깊이를 측량할 때에 대체로 신앙 연조나 성경 지식, 혹은 봉사 활동의 정도로서 측량하고 파악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깊이는 그 사람이 유혹과 환난, 그리고 시험과 핍박이 다가올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통하여 판단될 수 있습니다. 신앙 연조가 오래된 사람이 비교적 믿음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지내 온 오랜 세월이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이겨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별반 시험과 환난이 없었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믿음의 크기를 알려면 실제로 그 사람이 겪은 삶의 굴곡이 어떠하였는가를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서든데스(Sudden Death)‘’라는 영화에서 한 어린 아이가 아빠와 함께 경기장에서 팝콘과 음료수를 먹으며 앉아있는 것은 쉽고도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고, 누나도 떠나고, 모든 사람도 떠나고, 경기장은 무너지고 있는 데에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향한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되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합니다. 즉 눈에는 보이는 것 없고, 귀에도 들리는 것 없고, 손에도 잡히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지적 동의 그 이상입니다. 낙하산을 메고 직접 공중에서 낙하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낙하산의 안전성을 믿을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낙하하는 모습들을 거듭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실제로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지적 동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낙하산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낙하산에 자신을 내어 맡길 만한 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뢰란 무엇입니까? 믿고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깊은 믿음, 큰 믿음,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통 상황에서는 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어려운 상황이 자신에게 직접 닥치면 그 고백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어려운 환경에 빠져 허둥지둥 대며,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주무대인 갈릴리 바다는 수면이 지면보다 200 feet 이상 낮습니다. 그리고 바다 주변에는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산꼭대기로부터 내려오는 차가운 기류가 수면 위의 따뜻한 기류와 충돌하여 종종 큰바람과 파도를 일으키곤 했습니다. 본문 35절은 예수님의 일행이 항해를 시작한 시점이 저녁이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해가 질 무렵에 항해를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항해는 이미 위험을 안고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분명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위험스런 항해에 대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요? 경험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이 이 시간에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말씀은 분명히 불합리한 명령인데,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모두가 순종했는데 이상하게 큰 광풍이 갑자기 몰려왔습니다. 삽시간에 배에는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바다는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일시에 두려움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롭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The Perfect Storm'이란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잠이 옵니까? 이거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이 장면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평안하실 수 있지!” 그러나 우리가 이런 믿음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이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때로는 믿음이 부족하여 환경의 어려움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평화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이 말은 단순히 살려달라는 뉘앙스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힘들어 죽겠는데 당신은 평안히 주무시기만 합니까?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너무 그러면 나 토라질 수 있어요?”라는 원망이 섞여 있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번의 항해는 사실 제자들이 하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항해하자고 해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항해하자고 한 바다에 왜 풍랑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하시는 데 왜 항해에 죽음의 위협이 엄습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신앙인에게 더 큰 고난과 시련이 따르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다가 시련이 오고 환난이 오면 “에이, 예수님 믿어도 소용이 없네. 하나님이 없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혹 믿음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정말 이러기에요? 내 문제 해결해주지 않을래요? 나 확 죽어버리겠어요.”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을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 말씀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 믿어도 문제가 생기고 환난은 온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자는 그러한 환난에 패배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환난과 문제를 정복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그 험한 파도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신 것처럼, 우리도 환난과 문제를 정복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 환경의 어려움을 겪습니까? 그 어려움 속에서 믿음이 떨어지지 마십시오. 평안을 잃지 마십시오. 그 분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 섞인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처럼 평안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문제의 파도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십시오. “고요하라. 잠잠하라.”
예수님이 이렇게 외치자 그렇게 죽일 기세로 덤벼들던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 졌습니다.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여러분, 문제의 세찬 파도가 다가올 때,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로 인하여 죽을까봐 두려워 떨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여러분, 이 외국 땅에까지 와서도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이요,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평안을 선택하고, 그 평안을 이 외국 땅에서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단지 뛰어난 사상가와 종교가가 아닙니다. 한 낱 속임수로 마술을 부리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창조주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예수님의 명령에 바람과 풍랑이 잠잠해지는 것을 본 제자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즉 지금 기적은 보았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자기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면 또 다시 문제의 파도가 닥쳐올 때, 또 다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믿음 없는 자가 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자연을 만드시고, 바람과 풍랑의 법칙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온 주주의 주관자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고로 문제를 만날 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두려워 떠는 자가 되지 마시고, 평안을 누리시는 복된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 평안을 누리도록 자신의 믿음을 키워 가십시오. 혹 믿음이 떨어졌다면 다시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그래서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안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나 주님을 믿습니까?
날짜:
2007/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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