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4:18-19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요즘 한국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의 성경구절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다름 아닌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가 탈레반에 의해 인질로 잡힌 분당 샘물교회 23명의 성도님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론 그의 가족, 그리고 기독교계, 그리고 온 한국 사람들이 인질로 잡힌 그들이 하루 속히 풀려나서 자유를 얻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분당 샘물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실까? 얼마 전에 부 목사가 인질로 잡혔다가 죽고, 또 한 남자 성도님이 죽어서 두 번씩이나 연이어 장례를 치르고 나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아마 지금쯤 기도하고 있겠지. ‘주여, 다시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다시는 그들의 시체를 놓고 눈물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게 해주세요.’”
여러분, 인질로 잡힌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음식이 틀리고, 잠자리가 낯설고,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고,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고, 가족들은 보고 싶고, 더욱이 “또 다시 우리 중에 한 사람을 죽이면 어떡하나? 혹시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하면서 불안해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자유가 속박을 당하니까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맙니다. 자유를 속박을 당하니까 미래에 대한 비전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자유를 잃으면 인간으로서의 행복과 기쁨도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1774년 영국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메리카 13개 주 대표가 모여 제 1차 대륙회의를 열었을 때였습니다. 버지니아 주 대표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 ; 1736~1799)는 영국의 강압적 조치에 대항하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연설했습니다. 이 연설은 13개 대표를 하나로 묶어 미국이 독립 전쟁에 나가게 했고, 결국 미국은 귀중한 자유와 독립을 얻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자유가 이렇게 소중한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자유를 잃은 포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 그들은 이집트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에 살면서 노역에 시달려야했고, 심지어 아들을 나면 나일강에 버려야 하는 고통도 당해야만 했습니다. 다름 아닌 그들 모든 백성들이 이집트에 의해 인질로 잡히고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나중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라가 분열이 되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하여 그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망하여 그 백성들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 당시 로마에 의해 억압당하는 포로 신세가 되어 무거운 세금징수를 당하고 주권을 잃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이 학수고대하고 갈망하는 것은 포로에서 놓임을 받아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들을 포로에서 놓아줍니까? 그들은 스스로 포로에서 풀려날 길이 막막했습니다. 스스로 자유를 얻어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더욱 큰 고통만 따라왔습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유를 얻어 보려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거미줄이 더욱 온몸을 감싸고 숨쉬기조차 힘이 들고 맙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히, 정온히 거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렘46:2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라.”(렘33:7)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자유를 얻고 노래하던 감격의 시가 바로 시편 126편입니다. 제가 읽어볼 테니 한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를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시126:1-4)
여러분, 오늘날 젊은이들 가운데 컴퓨터에 포로된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들 중에는 텔레비전에 포로된 자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알코올과 마약과 같은 담배에 포로된 자가 있습니다. 도박과 노름에 포로된 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잘 나타나지는 않고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으나 잘못된 사상과, 잘못된 자기 고집과, 미움과 원한에 포로가 되어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가고 인생의 진짜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포로와 억압과 중독에서 놓여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그것들에 의해 포로가 되다 보니 자신이 지금 포로가 된 줄을 모르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자유를 준다고 해도 “우리가 포로가 되지 않았는데 네가 뭐가 잘났다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하느냐? 기분 나쁘다. 물러가라.” 하며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러자 그들이 “아멘!” 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뚱하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그러자 예수님이 안타까워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죄의 포로와 죄의 노예가 되어서 그 결과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죄의 삯인 사망이었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그는 죽음을 당해야만 합니다. 현재 그는 감옥 속에서 자유를 잃고 지내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그는 사형 집향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같이 사면 권한을 가진 분이 그 사람을 자유케하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좁고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서 나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 죄를 사해주는 사면권을 주었어도 그가 감옥에서 걸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유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자유를 얻기를 스스로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분명 자신에게 사면권을 주었는데 그 사면권을 필요 없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은 죄의 감옥에 갇혀 포로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고로 예수님이 주시는 더욱 큰 진짜 자유,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천국의 자유와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이 약속은 안타깝게도 허공을 치는 메아리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유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도 자유의 나라요, 한국도 자유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어디든지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러지 않습니다. 북한 백성들은 다른 지방을 가려고 해도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주거의 자유를 얻고, 표현의 자유를 얻고, 종교의 자유를 얻고 사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욱 귀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여태까지 맛보지 못했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이 땅에서 사람이 주는 자유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얻는 자유와 하늘나라에서 주는 자유를 굳이 비교를
하자면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요? 전혀 차원이 다른 자유요, 전혀 느끼지 못한 자유이기에 이를 비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수천만 배나 더한 자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고로 우리는 찬양합니다. 노래합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해...♬”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기를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므로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포로된 자, 문제로 인하여 포로된자, 과거의 상처와 슬픔으로 인하여 포로된 자,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당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문제로 인하여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만약 주님에게 임하신 그 성령이 여러분 자신에게 직접 임하시면 여러분도 하늘의 충만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갈2: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여러분, 이 외국 땅에까지 와서 문제, 근심에 포로가 되어 불안해하고 고통 받고 산다면, 그리고 그 문제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고 눌리고 답답하게 산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복 받은 삶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를 잃고 사는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성령이 임하므로 우리에게 확증되어 집니다. 고로 예수님을 날마다 모시고 사십시오. 성령이 주시는 자유를 날마다 얻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외치십시오. “나는 자유하다.” 아무쪼록 주님과 더불어 이 땅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천국의 자유를 더욱 충만히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날짜:
200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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