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0:10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올해 우리 교회의 합심 기도 제목은 ‘여유’입니다.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 물질의 여유, 환경의 여유를 얻어서 개인과 가정의 행복은 물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므로 하늘나라도 아름답게 확장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한 분도 이곳 캐나다까지 와서도 쫒기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한국에서는 쫒기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이곳 캐나다에 와서는 정신적으로 환경적으로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좀더 여유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이곳에 오셨을 것입니다.
이 ‘여유’라는 단어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① 넉넉하고 남음이 있음. 예) 여유 있는 살림살이, ② 성급하지 않고 너그럽게 생각하는 마음. 예) 마음의 여유. 생각할 여유도 없다. 그리고 ‘여유’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의 형용사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generous(풍요로운, 관용의), abundant(풍성한), sufficient(남는), broad-minded(넓은 마음의), rich(부요한), full(가득한)
그리고 ‘여유로운’이라는 단어의 반대어는 이렇습니다. 빡빡한, 모자라는, 궁핍한, 성급한, 좁은, 답답한... 이 ‘여유‘에 대한 단어를 가지고 또 다른 표현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여유로운 커피 한 잔, 인생을 돌아보는 여유, 여유로운 데이트, 여유로운 웃음과 표정... 이 ’여유롭다‘고 하는 말은 게으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쁘게 서두른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유롭다‘는 뜻은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본분을 다하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얻는 삶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착한 마음씨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유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이 좁은 분이 아닌 넓은 마음을 가지신 분입니다. 굳이 성경적인 표현을 하면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시86:15)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음이 심히 여유로워서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여유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도 풍성한 축복을 받아 여유롭고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여기서 도적은 사단을 가리킵니다. 즉 사단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을 도적질하고 빼앗고 더 나아가 우리를 죽이고 파멸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풍요롭고 여유롭고 행복하게 하려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으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여유로워지며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에도 보십시오. 넓은 하늘을 만드시고 난 후에 그곳에 수많은 별들로 풍요롭게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만들고 난 후에도 그 안에 갖가지 물고기들로 풍요롭게 채우셨고, 땅을 만드시고 난 후에도 그곳에 온갖 짐승들로 풍요롭게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도 각종 나무의 실과를 풍요롭게 열리게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때때로 기근이 있고, 홍수가 있고, 많은 자연 재해가 있어서 그렇게 풍요롭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 노아 홍수로 말미암아 철저히 파괴된 세상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의 풍요로움도 사라진 세상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요, 삶의 여유와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우리의 에덴동산을 다시 찾아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확실히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원래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야기 한 것처럼 이렇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즉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단에게 도적질 당해 하나님이 주셨던 풍요로운 축복을 빼앗기고 저주를 당하고, 고통에 신음하다가 마침내 영원한 사망과 멸망에 이르는 것을 예수님이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영원한 멸망을 영원한 행복으로 바꾸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올해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외국 땅에서도 삶의 여유를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애급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풍요로움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가나안 땅’이란 말을 듣고 ‘가난한 땅’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요한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가난한 땅으로 인도하실까?’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 모양이다.”라고 나름대로 잘못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보면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은 우리로 가난하게 하시므로 우리로 타락하지 않게 하고 천국만을 사모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는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가난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부요케 하고 풍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우리로 부요케 하려고 보내주셨지, 가난하게 하려고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라.” 즉 예수님의 가난함은 우리로 부요케 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이 말씀을 모르고 “예수님이 가난하게 지내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지내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삶, 부요한 삶, 여유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우리의 자녀가 복을 받고, 짐승의 새끼도 복을 받고,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이지 아니할 것이요.”(신28:8,12)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남에게 돈을 꾸고도 갚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돈을 꾸어주고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시편 37편 21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즉 풍요롭게 여유롭게 살면서 남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타도의 대상이요, 악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남에게 꾸고도 갚지 아니하는 사람을 성경은 악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없어서 남에게 꾸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갚을 것이 없어서 못 갚는 것도 그리 큰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돈을 빌릴 때 아주 떼어먹겠다는 심보를 가지는 것은 분명 의인이 아닌 악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풍성한 축복을 얻어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의인의 자리에 서기 위하여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 풍요롭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늘 기대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축복받은 왕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시18:44)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큰 축복을 부어주심으로 주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다윗을 두려워하고 다윗에게 친근히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가난해지면 친구들도 떠나게 되는 것이 현실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구절이 성경 잠언에 참 많이 있습니다. 한번 소개해 볼까요. 잠언 19장 4절입니다.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잠언 14장 20절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잠언 19장 7절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물론 이런 성경구절을 들으면 “야- 가난이 참 무섭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해 보세요. 부모가 나이 늙어 가난하면 자녀가 잘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는 더욱 더 이런 현상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하면 때때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고로 한국에서는 가난한 자의 설움이 상당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여기 캐나다가 한국보다는 살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여기는 어떤 직업을 가져도 멸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낡은 자동차를 끌고 다녀도 그렇게 멸시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해지면 이 땅에서 때로는 멸시도 당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라.”(겔36:30)
저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 가운데 부요한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꾸어주고 나누어주는 민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곳 캐나다 땅에 오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아 여유로운 삶을 살며 나누어주고 베풀어주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풍성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셔 들이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풍성케 하십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확실히 증거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4:19-20)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면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황충도 금하시며, 과실도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땅이 아름다워지게 하므로 열방이 우리를 복되다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로 이것을 이 외국 땅에서도 꼭 하도록 하십시오. 혹시 이것을 잘 모르시는 분이 있으면 구약성경 맨 끝의 책인 말라기서 3장을 보십시오. 아무쪼록 이것을 하시므로 이 땅에서도 넉넉한 축복, 여유로운 축복 속에 삶이 더욱 윤택해지고 행복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날짜:
200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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