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과 축복신앙

날짜: 
2008/02/16
설교: 

고후8:9 기복신앙과 축복신앙
한국교회가 한창 성장하고 있을 때 신학자들 중의 일부는 교회의 물량주의와 기복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러한 건전한 비판이 있기에 교회는 곁길로 가지 않고 정도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정도가 지나쳐서 오히려 하나님께 마땅히 구해야할 축복을 구하지 못하고, 누려야 할 축복을 누릴 수 없게 하였다면 그러한 비판은 다시 재고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누가 뭐래도 축복의 하나님이시요, 당신의 자녀들에게 축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이후에 맨 먼저 인간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창1:28) 또한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축복을 주셨고(창9: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축복의 근원이 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창12:2)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이들 말로 정말 쌔고 쌘 것이 축복 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정작 그 축복의 말씀들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말씀을 믿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 주심에 대한 약속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축복만을 받고 잘 사는 것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 받고 잘 사는 것을 무조건 유치하게 생각하고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축복 받는 것을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요함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같은 것들을 죄악시하는 초대교회 때의 대표적인 이단인 영지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가난하고 낮은 것을 무조건 훌륭한 것으로 보고, 높고
부한 것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기독교의 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난하고 낮은 것을 무조건 실패한 것으로 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고 낮은 것을 무조건 훌륭한 것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자랑할 것도 못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우리가 가난하게 살지 말고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게 사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대속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셨으니 우리도 가난하게 사는 것이 복음적이고 성경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잘못 생각하는 저변에는 기복주의와 하나님의 축복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분들은 어떤 사람이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복을 줄 수 없는 대상에게 복을 비는 것은 잘못된 기복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떤 짐승의 우상이나 기괴한 형상, 또는 사물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복을 비는 것은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인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적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사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 생각나는 분이 누가 있습니까? 느헤미야라고 하는 이스라엘 총독이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적들이 그를 계속 해치려고 합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29-31)
그리고 구약성경 역대상 4장 10절에 야베스란 사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을 구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을 구한다고 “너희들 참 뻔뻔하다! 왜 그렇게 무례하냐?” 하고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을 구한다고 “애들아, 그것은 기복 신앙이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나는 너희에게 복을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하지 않고 하늘의 일월성신이나 우상에게 가서 복을 비는 것이 기복 신앙이요,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니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을 달라 하면 축복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지, 축복 대신 저주를 주어서 우리를 골탕 먹이시는 나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아무리 복을 달라고 떼를 쓰고 기도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즉 그들의 구하는 것이 기복신앙으로 흐를 때에는 복을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즉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아니하면 복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만 한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다 복을 주신다면 하나님은 기복주의 신앙을 조장하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그 사람이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행위와 인격과 믿음이 따를 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즉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진실하게 기도하도록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올바른 모습으로 될 때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바르게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축복을 받고 살기를 원하시지, 이 외국 땅에까지 와서 저주를 받고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축복을 즐겨주시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렸던 축복의 에덴동산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물론 그러한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때때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때때로 하나님의 훈련이 고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5-16)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진리를 탐구할 때 한쪽 면만으로 치우쳐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들과 신비로운 사건들이 단지 신비주의라는 단어로 왜곡이 되어서 마치 기도할 때 병이 낫거나 기적이 일어나면 이를 모두 잘못된 신앙으로 몰아붙여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윤리와 도덕만 가르치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신비롭고 기적적으로 응답도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적으로 보지 못하고 기적과 은사에만 매달려 자칫 하나님의 뜻이 어긋나게 만드는 신비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권위주의가 나쁜 것이지 권위 그 자체가 나쁘다고 몰아붙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권위를 통하여 질서를 세우시고, 권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을 구하고 축복을 받는 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것은 성경적이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세상적인 기복신앙과 하나님 중심적인 축복 신앙의 차이점을 논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축복의 선교성입니다. 구약에서 축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섬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자기 영광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단지 세상적인 축복에 가려서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오직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에 있습니다.
둘째, 축복의 통로성입니다. 기복 신앙은 자기의 성을 쌓고 타인과의 접촉을 막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축복은 어디를 가든지 축복의 전달자, 축복의 통로자가 되어 황폐한 땅을 푸른 초장으로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에도, 감옥에 갇혔던 때에도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셋째, 축복의 섬김성입니다. 성경의 축복은 혼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야망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고 섬깁니다. 그래서 축복은 섬김과 희생을 위한 씨앗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세상축복을 가지고 남을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그 축복으로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결론입니다 성경적인 하나님 중심의 축복 신앙은 세상적인 기복신앙과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올해 하나님 중심적인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풍족하게 여유롭게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전도와 구제와 선교도 더 많이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 중심적인 축복의 신앙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쪼록 성경적인 확실한 축복 신앙으로 말미암아 풍요롭고 여유로운 축복을 받고 이 외국 땅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축복과 행복을 전달하는 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