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9;12-29 경고했더니 반응은 5가지였다.
자극에는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극이 없는 데에도 반응이 있으면 잘못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은 자극은 없는데 반응이 있습니다. 웃기지도 않는데 웃습니다. 화나게 하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화를 냅니다. 반대로 자극이 있는데 반응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딘 사람입니다. 둔한 사람입니다. 예민한 사람일수록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물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동산과 같았던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롯이 탐욕의 눈으로 아브라함보다 먼저 선택하였던 소돔과 고모라는 넘치는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유황불로 멸망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노아 때와 같이 죄악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상 가장 죄악이 많았던 때가 두 번 있었는데 한번은 노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롯의 때입니다. 노아 때에는 홍수로 멸망당하였고, 롯의 때는 유황불로 멸망당하였습니다.
성경은 노아와 때와 롯의 때를 이렇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 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24;38-39)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 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17;28-29)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 어느 곳이든지 죄악이었습니다. 그 중 소돔과 고모라에서 큰 죄악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성적인 타락이었습니다. 성적 타락의 극치는 동성연애입니다. 창세기 19장 5절에 보면 천사가 사람으로 가장하여 소돔과 고모라 롯의 가정에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성적으로 범하게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성연애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동성연애라는 말은 영어로 소도미(Sodomy)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둘째, 죄악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창세기 18장 20절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죄악상이 문헌을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죄악상을 문헌에 나온대로 그대로 소개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모두가 거만하였습니다. 교만하였습니다. 악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①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한 동네에 거지가 와서 동냥을 하면 돌보아 주는 척하고 100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먹을 것을 팔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으면 그 돈을 도로 빼앗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② 손님을 결코 대접해서는 안 됩니다. ③ 소돔과 고모라를 지나가는 나그네에게서는 모든 것을 빼앗아야 합니다. ④ 4. 부요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도 됩니다. : 그래서 두 사람이 짜고 한 사람은 부자를 데리고 흔들리는 담 밑으로 갑니다. 한 사람은 담을 밀어 부자를 담에 깔려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반씩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역사상 음란하고 죄악된 도시는 다 멸망당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런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가 화산재로 6m 가 덮여 모든 사람이 다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년 전 필리핀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된 도시가 필리핀에서는 가장 음란하고 죄악된 도시였습니다. 여하간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키시겠다고 경하셨습니다. 이런 경고가 들려 졌을 때에 5가지 반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사람들의 반응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이미 언급한 대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창19;24) 멸하실 것이라는 경고에 전혀 무관심하였습니다. 아예 반응조차 없었습니다. 그럴 수가 없다고 반박한 흔적도 없습니다. 철저한 무관심입니다.
2. 롯의 두 사위의 반응
롯이 사위들에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실 것이라 말하였을 때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단 한번도 농담을 하신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더구나 생명에 관한 일을 농담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3. 롯의 아내의 반응
롯의 두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지만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 같았으나 결국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 불순종하였습니다. 믿는 것 같았으나 결국 불신하였습니다. 앞을 보는 것 같았으나 뒤를 보았습니다. 소알 사람 같았으나 소돔 사람이었습니다. 구원받는 것같이 보였으나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알쏭달쏭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 47;11에 보면 진펄과 갯벌이란 말이 나옵니다. 진펄과 갯벌은 땅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다도 아닙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고 물이 나가면 땅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의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의 말을 빌리면 유두고입니다. 창가에 걸터앉았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교회에 들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안 들어 온 것도 아닙니다. 알쏭달쏭한 롯의 아내와 같은 교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부자 청년 한 명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주님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재산이 많아 슬픈 빛을 띠고 가버렸습니다. 예수님 앞에 왔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지금 지옥에서 통탄을 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강원도에 아들 삼 형제를 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너무 쪼들리던 중에 마침 사업차 와서 일하던 일본인이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양자로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마침 잘 되었다며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일본인은 그 아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일본인은 막대한 재산을 아들에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자기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알고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많은 재산을 정리하여 돈만 큰 여행가방에 하나 가득 넣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백방으로 수배하여 드디어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찾아가 “하룻밤만 자고 가도 좋을 가요?”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트렁크를 아버지에게 맡기고 잠에 들었습니다.
너무 피곤하여 내일 아침 자초지종을 다 말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노부부는 청년의 가방을 몰래 열어보고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평생 만져 볼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순간 노인은 청년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씌워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밤새 돈만 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웃에 사는 영감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아들을 오래간 만에 만난 심정이 어떤가?” “아들이라니?” “무슨 말인가? 내가 어제 밤에 당신 아들을 당신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이웃 영감이 돌아가고 죽은 청년에게로 달려가 팔뚝을 보았습니다. 자기 아들은 점이 세 개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은 아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즘도 보면 롯의 아내와 같이 교회도 좋고 세상도 좋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세상을 보는 교인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4. 롯의 반응
롯과 롯의 두 딸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첫째, 지체하였기 때문에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롯은 천사로부터 유황불이 내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빨리 나가지 않고 지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하려고 하시다가 롯이 지체하니까 인자하심으로 유황불 내리는 것을 조금 참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롯이 소알성에 이를 때까지 멸망이 보류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7;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구원의 표를 다 하시기까지 멸망을 연기시키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이 없었으면 롯은 구원받지 못 하였습니다.
둘째, 롯은 사위 둘과 아내를 구원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롯은 여섯 식구 가운데 반인 3명을 구원시키지 못한 부끄러운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기도덕분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19;29)
롯은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구원받았습니다. 누군가가 뒤에서 기도하여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귀중한 것입니다. 또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롯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롯이 잘 한 것도 있습니다. 롯과 두 딸은 뒤를 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며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롯은 아내가 안 따라 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궁금하였을까요? 롯의 두 딸은 어머니가 따라 오지 않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엄마를 애타게 불러 보았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뒤가 보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뒤를 보지 말라고 하니 결코 뒤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은 롯의 장점입니다.
5. 아브라함의 반응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멸망을 보류시켜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없었습니다. 45명만 있으면? 40명만?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모두 여섯 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남의 어려움을 내 어려움으로 알고 기도하는 성도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티끌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18;27)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기도한 결과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티끌 같은 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하신다고 하실 때 반응은 각각이었습니다.
요즘도 하나님의 경고가 계속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경고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즐기고 재산만 모으기만 하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롯의 두 사위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들을 농담으로 여기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롯의 아내와 같이 믿기는 하지만 세상이 좋아서 몸은 교회에 마음은 세상에 두고 살겠습니까? 롯처럼 알면서 지체하며 살겠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같이 늘 기도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고했더니 반응은 5가지였다.
날짜:
2008/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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