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1-12 믿으면 의심의 질문이 없어진다.
어느 중년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교회 여자 집사님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때 한 여자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나- 목사님! 어깨에 루주가 묻어 있네요.”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여자 집사님이 물었습니다. “누구 루주에요?”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여자 집사님이 짓궂게 물었습니다. “어제 무엇 하였어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목사님이 참 난감해지고 이상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목사님 옆에 계신 사모님이 말했습니다. “아마 성도님들 기도해주다가 묻었을 거예요.” 그 말 한 마디에 이상한 분위기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믿으면 의심의 질문이 없어집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을 믿기에 목사님 옷에 루주가 묻었어도 의심의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편이 밤중에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밤 10시가 되었는데도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계속해서 의심의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아마 아내가 쓰레기 버리러 나갔거나 자기 전에 운동이나 목욕을 하나보다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믿으면 의심의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시시콜콜 캐묻게 따지게 됩니다. 더 심하면 의부증 의처증이 되어 부부관계가 깨지고, 가정이 불행해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떠날까요?” “떠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언제 떠날까요?” “왜 떠나야 하나요?” “이삿짐은 얼마나 가지고 가야 하나요?” “언제 돌아오게 될까요?”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는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잡아 내게 번제로 드려라.” 이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아들을 죽이나요?” “하나님! 바꾸어 놓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100살에 난 아들에게 어떻게 칼을 대나요?” “어디서 죽이나요?” “누구와 죽이나요?” “아내에게는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이삭에게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데리고 가나요?” “아들을 죽이고 나서 어떻게 하나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의심과 불안의 질문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으면 의심의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믿으면 시시콜콜 따지거나 캐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왕은 절대자였습니다. 어느 왕이 죽으면서 가장 신임하는 신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게 가장 충성된 신하다. 나는 오늘 죽는다. 죽음의 세계에 네가 먼저 가서 내 길을 닦아 놓아라.” 이러한 왕의 명령에 그 신하는 이러한 질문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죽고 나서 무엇을 할까요?” “조금 있다가 죽으면 안되겠습니까?” 그 신하는 이런 질문들을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칼을 빼어 즉각 자살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신하에게 절대자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하나님은 절대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질문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습게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절대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십일조는 절대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자로 보지 못하면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안식일은 왜 지켜야 합니까?” 물론 이런 의심의 질문에 대한 해답들이 성경에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지 못하면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의심의 질문들만 하다가 그만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의심의 질문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 어떻게 주님을 믿으면 병이 낫습니까? 병은 병원에 가야 낫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꽤 지식적이거나 이성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기의 질문에 자기가 원하는 이성적인 대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혹은 하나님을 믿어도 병을 고쳐주시는 치료의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의심의 질문 없이 그저 “아멘!” 하고 그대로 믿습니다. 어떻게 보면 광신자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광신자이기에 무턱대고 이러한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자이요,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자이신 것을 믿기에 그 분의 말씀에 “아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동네 유지 모임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동네 유지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동네일을 의논하는 자리였습니다. 면장, 이장 그리고 목사님 그리고 스님도 참석하였습니다. 식사 전에 스님이 먼저 기도하고 목사님이 기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불교식으로 기도하고 이렇게 마쳤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합쳐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했습니다. “나미아무타불! 아멘!”
다음 목사님의 기도 차례였습니다. 목사님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스님이 그렇게 기도하였기에 목사님도 그렇게 기도하여 주어야 예의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단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고 목사님은 모인 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자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그저 여러 신들 중에 비교되어서 좀더 능력이 뛰어난 신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신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전능자시요, 절대자이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신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하신다면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따따부따 따지지 않습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망령되이 의심의 질문들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만하기 때문에 의심의 질문들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의심의 질문 없이 그대로 믿을만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만 하면 결과가 반드시 좋습니다. 그러기에 그 분 앞에 ‘왜?’라는 질문이 필요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40년간 지낼 때였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이라 물이 없었습니다.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이 하나님의 명령에 모세는 하나님을 믿기에 이러한 질문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반석에게 명하면 물이 나오겠습니까? 반석이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요? 그리고 어떻게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까? 차라리 땅을 파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석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물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이스라엘 백성들 수백만 명이 다 마실 양이었습니다. 모세는 반석에서 물이 나올 것을 의심하며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만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결과가 반드시 좋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 그는 갈릴 바다에서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이런 의심의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갈릴리 바다의 물고기들을 모르나요? 지금처럼 날이 밝은 시간에는 깊은 데서 물고기를 못잡아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믿음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저 분은 허튼 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로 그에게는 의심의 질문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성적으로 경험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두 배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절대자의 말씀에 의심의 질문과 의심의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더니 결과가 이렇게 좋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심의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면 결과가 좋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을 믿는 중에 의심을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중에 이 외국 땅에서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보다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으면 의심의 질문이 없어진다.
날짜:
200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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