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4-18 율법이냐 은혜냐 ?
요즘 한국에서 상당히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남자와 대표적인 여자를 들라고 하면 남자는 조아무개 씨이고 여자는 옥아무개 씨입니다. 이 두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결혼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딴 사람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댓글들을 보면 아주 무지막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욕을 해대곤 합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댓글 가운데에서 아주 눈에 띠는 댓글을 보았습니다.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기독교인이 쓰신 것 같습니다. 이런 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이 여자(남자)를 쳐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인데... 누가 하신 말씀입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향하여 말합니다. “예수여,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이제 예수님의 대답 한마디에 한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긴장된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쓰셨습니다. 무슨 글을 쓰셨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은 돌을 들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하는 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이 여인을 쳐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쭈뼛쭈뼛 머뭇머뭇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무슨 글을 쓰셨는지는 역시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죽었어야 할 여인이 은혜의 예수님을 만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즉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율법은 무엇인가 ?
율법이란 넓은 의미로 한 국가나 집단의 헌법과 법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은 법률로써 구약성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을 율법서라고 정의하며, 그 율법서의 내용 중에서도 하나님이 무엇 무엇을 꼭 지켜야 된다고 법칙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율법의 핵심입니다.
이 율법에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켜야 할 법률이 있고, 또한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법률도 있습니다. 만약 이 율법을 우리가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그 율법은 이제 우리의 재판관이 되어 사정없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정죄의 독화살을 쏘아댑니다.
“야 요것 봐라, 너 교회에 다니면서 혼자 거룩한 체는 하는데 내가 보니 너 옛날에 창녀였잖아! 사기꾼이었잖아! 그리고 너 어제 밤에 뭐했어? 죄를 저질렀잖아!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내가 봤단 말이야! 야- 너 같은 게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안돼- 너는 죄인이야! 너 같은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돼! 봐라, 네가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
이와 같이 말하며 율법은 나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를 모두 현미경처럼 확대시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현미경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가 기절초풍을 하고 맙니다. 마치 온 세상의 모든 기생충들이 모여 우글우글 거리는 것처럼 징그러운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이 탄식하고 맙니다. “아니- 이것이 진짜 내가 저지른 죄란 말인가? 나는 그래도 좀 더 깨끗하게 산다고, 남들보다 좀더 고고하게 산다고 애를 많이 썼었는데… 이런 추악한 모습이 진짜 나의 참 모습이란 말인가?” 그리곤 스스로 절망감에 사로잡혀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율법은 이 때에도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계속해서 저와 여러분을 몰아 부칩니다. “야, 아무리 탄식해봤자 소용없어! 죄의 삯은 사망이야. 그러니 너의 죄 값을 죽음으로 지불해야 돼. 이제 알았어? 야- 좀 죽어 줘, 죽으란 말이야, 왜 빨리 안 죽어? 아하- 너 질병으로 죽여야 되겠구나! 그래도 안 죽어? 아하 너는 교통사고로 죽여야 되겠구나!”
여러분,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가 죄를 저질렀을 때 사망의 채찍을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도저히 인간 스스로는 이 율법이 휘두르는 사망과 저주의 채찍을 피할 재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 완전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롬3: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너희가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 너희를 구원할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율법을 다 기록한 후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즉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을 받으리라”(행3:22-23)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강퍅해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계속 율법으로, 도덕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얻으려고 고집했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고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육체는 한 사람도 없으며, 그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보좌 앞 떳떳이 당당히 나아가 “내가 의인이요, 내가 잘난 사람이요.” 하고 외칠 사람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만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는 율법이라는 정죄의 발길에 사정없이 얻어터져서 결국 신음하며, 고통당하다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의 죽음인 지옥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고로 율법의 저주 아래 갇힌 인간은 모두가 절망입니다. 패배입니다. 실패입니다. 도저히 가망이 없습니다. 고로 우리는 안타깝게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7:24)
2. 은혜는 무엇인가 ?
하늘을 바라봐도 절망이요, 땅을 쳐다봐도 절망입니다. 도대체 이 율법의 저주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치 지도자를 바라보아도 절망이요, 아무리 잘난 도덕가를 바라보아도 절망입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절망이요, 내 자신을 바라봐도 결론은 역시 절망입니다. 절망! 이 절망이라는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할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인간들은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를 도와주옵소서.”
그러나 이때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철학은 나의 부르짖음을 외면한 채 사실대로 고백합니다. “야- 나도 너를 도울 수 없다. 나도 그 율법이라는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그러니 너 스스로 한번 해결해보아라. 아- 머리를 빡빡 깎고 속세를 한번 떠나보란 말이야. 그래도 안되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퍼 마셔봐. 그래도 안되면 요즘 좋은 거 있잖아. 그것 한번 해봐?”
여러분, 많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저주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쳐 어디론가 달려갔지만 그 길은 역시 절망이었습니다. 슬픔이었습니다. 이제 도대체 누가 나의 이 파괴된 인생을 복구해주며, 나의 찢겨진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제발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살려주옵소서.”
이때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시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본체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딸(아들)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라.(히12:2) 때가 차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아래 나게 한 것은 율법 아래 있어 고통하며 신음하는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더냐?(갈4:4-5) 그러므로 성경은 증거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다.’(갈3:13)고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만약 너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겠는가?(갈2:21)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롬6:14)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 이미 수천 년 전에 다윗은 이와 같이 노래하고 있지 아니하는가? ‘여호와여,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 내가 보니 이것이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로다.”(요1:16)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으며,(롬13:10)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롬10:4) 그러므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들어온 성도들은 십자가 밑에 나아가 율법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용기가 새롭게 생겼습니다.(히4:16). 이제, 더 이상 율법이라는 저주가 우리를 할퀴거나 상하게 하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행복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자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새롭게 변화된 저와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그 포근하고 따스한 얼굴을 바라보며 보다 행복하게, 보다 화목하게, 서로 서로를 사랑하며, 하늘가는 밝은 길을 소망 가운데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은혜 안에 들어온 저와 여러분을 향해 이제 그 누구도 “너는 죄인이야! 너는 죽어야 돼! 너 까짓 게 무슨 하나님을 믿느냐?”고 참소 할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겠단 말입니까?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 하겠단 말입니까?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3-37) 할렐루야 !
3. 율법이냐 은혜냐 ?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령 가운데에는 또 다시 율법의 가시와 독침이 여기저기에서 돋아 나와 서로가 서로를 할퀴어 대고 찌르는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거룩한 성도라고 하지만,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며, 또 다시 율법의 채찍을 들어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야- 네 눈에 티가 들어갔어. 때가 묻었단 말이야. 넥타이가 삐뚤어졌어! 머리 꼴이 그게 뭐야!” 너무도 매정하게, 너무도 잔인하게 율법이라는 채찍을 들어 그 옛날 예수 그리스도의 등허리를 사정없이 후려친 것처럼 오늘도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바리새파, 사두개인들이 수많은 어린양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딴에는 율법을 지켰다고 좀 더 거룩한 체 해보고 뽐내는 당신, 아- 도대체 얼마나 잘났나요? “하나님이여,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며, 저 따위 창녀나 세리와는 같지 아니하옵나이다.”(눅18:11-12)
잘났어요. 정말로!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저버리는 도다.”(눅11:4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눅11:46)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도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11:52) ”그러므로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율법의 저주로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율법의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날개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이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7,3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4:2)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만을 고집한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그 율법의 칼에 자신이 찔리고 난자당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2000년 동안 나라 없는 슬픔을 겪으며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우맹이여,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율법이냐 은혜냐?”(마2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율법의 돌로 치는 자가 아니요, 저와 여러분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고달픈 영혼의 상처를 치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리저리 찢긴 상처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양함.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율법의 채찍을 맞으며 괴로워했습니까? 그 율법의 휘두르는 채찍을 맞아 나의 과거가 쓰디쓴 상처로 깊게 패였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울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나의 당하는 이 고통을 알아 줄 수 있으며, 이 슬픔을 위로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을 봐도 절망이요, 땅을 바라봐도 절망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이 자리는 나를 비판하는 율법의 자리가 아니라, 나의 못난 모습, 추한 모습을 감싸주는 위로와 자리요, 은혜의 자리입니다. 오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밑에 나아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 던져버리며 참 평안과 안식을 얻으라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각종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모두 벗어 던져버리고(히12:1), 은혜의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오늘 이 자리에 아직도 율법의 저주 가운데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며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위선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허락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 오라고 하실 때에 나를 불러 주시옵소서. 내가 오늘 주님께 가오니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좀더 솔직해야 됩니다. 좀더 겸손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벧전5:5) 오늘 우리는 좀더 겸손히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다같이 찬송가 337장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율법이냐 은혜냐 ?
날짜:
200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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