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나이가 제법 먹은 분들이 듣기 싫은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 왜 그래요? 꼰대같이.” 여러분, ‘꼰대’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전을 찾아보니 “꼰대란 선생이나 아버지 혹은 늙은이를 비하하여 일컫는 말입니다.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꼰대’라는 말의 어원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제가 찾아보니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번데기’의 영남 사투리인 ‘꼰데기’가 어원이라는 것입니다. 번데기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란 뜻에서 꼰데기라고 부르다가 ‘꼰대’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됐다는 주장입니다. 프랑스어로 백작을 지칭하는 말인 ‘콩테(Comte)’의 일본식 발음이 ‘콘데’인데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일제에게 백작 등의 작위를 받고 잘난 척하며 자신을 콘테라고 자랑스럽게 부르는 것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권위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여 모두 ‘꼰대‘라고 합니다. 일명 ’젊은 꼰대‘입니다. 다른 늙은 사람을 꼰대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도 후배에게 꼰대 짓을 하는 사람입니다.
한 취업 토털 사이트인 ‘사람인’에서 직장인 1,945명을 대상으로 ‘젊은 꼰대’에 대해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직장에서 젊은 꼰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75,4%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꼰대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 자신은 4050꼰대와 다르다고 생각한다.(48.6%) 2. 자신은 권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37.7%) 3. 자신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33.1%) 4. 자신은 후배들과 사이가 가깝다고 생각한다.(19.5%) 5. 자신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16.1%) 즉 자기 자신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왜 젊은 꼰대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 늙은 꼰대에게 자연스럽게 배웠기 때문이다.(45.6%) 2.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42.4%) 3. 윗사람이라는 권위에 도취돼서 그렇다.(31.3%) 4. 아래 직원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14.2%)
그런데 응답자의 71.5%는 꼰대들의 언행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호응을 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1.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67.5%) 2. 따져봐야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48.1%) 3. 인사고과 등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21.8%) 4. 회사 생활이 편해져서(14.9%) 5. 버릇없는 후배로 찍히지 않기 위해’(13.3%)
그리고 ‘꼰대 체크리스트’가 있습니다. 20가지가 있는데 스스로 한번 체크해 보세요. 각자 손가락을 사용해 세어보세요. 1. 사람을 만나면 나이부터 확인하고,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는 반말한다. 2. 대체로 명령문으로 말한다. 3. 요즘 젊은이들이 노력은 하지 않고 세상 탓, 불평불만만 한다고 주장한다. 4. "○○란 ○○○인 거야" 식의 진리 명제를 자주 구사한다.
5. 버스나 지하철의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이에게 "비켜라"라고 말하고픈 충동이 있다. 6. 후배의 장점이나 업적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그의 단점과 약점을 찾게 된다. 7. “내가 너만 했을 때” 얘기를 자주 한다. 8. 나보다 늦게 출근하는 후배가 거슬린다. 9. 고위공직자나 대기업 간부, 유명 연예인 등과의 개인적 인연을 자꾸 얘기하게 된다.
10. 커피나 담배를 알아서 대령하지 않거나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을 굽지 않아 기어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후배를 불쾌하다고 생각한다. 11. 낯선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후배에게 제대로 일하는 법을 알려준다. 12.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하라고 해놓고 나중에 보면 내가 먼저 답을 제시하고 있다.
13. 옷차림이나 인사 예절도 근무와 연관된 것이므로 지적할 수 있다. 14. 내가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15. 연애사와 자녀 계획 같은 사생활의 영역도 인생 선배로서 답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16. 회식이나 야유회에 개인 약속을 이유로 빠지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17. 내 의견에 반대한 후배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18. 미주알고주알 스타일로 업무를 지시하거나 확인한다. 19. 아무리 둘러봐도 나보다 더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 아이들에게도 배울 게 있다는 원론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뭘 배워본 적은 없다. 배울 생각도 없다.
자- 한번 체크해 보니 어떻습니까? 보기보다는 자기도 젊은 꼰대 축에 속해서 좀 놀라지는 않습니까? 이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0~3개 : 당신은 성숙한 어른입니다.(꼰대 아님) / 4~7개 : 꼰대의 맹아가 싹트고 있음. / 8~15개: 꼰대 경계경보 발령. / 16~20개 : 자숙이 필요합니다.
이 설문조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멘토와 꼰대는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다. 후배 입장에서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조언도 잔소리가 될 뿐이다.” “조언은 내용 못지않게 전달하는 방식이나 타이밍도 중요하다. 지나친 참견보다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당사자가 필요로 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 오늘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새 것과 옛 것’입니다. 여러분, 새 것이 더 좋을까요? 옛 것이 더 좋을까요? 아- 이 질문은 제가 생각해도 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새 것과 옛 것 중에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혹은 시대적 유행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 것이 좋은 것들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겠지요. 새 옷, 새 신발, 새 컴퓨터, 새 스마트 폰, 새 집, 새 차, 새 가구... 그러나 반면 옛 것이 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골동품입니다. 골동품은 오래될수록 가치가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9)
그리고 옛 것이 더 좋은 것 중에 또 무엇이 있나요? 옛 친구, 고향, 고국... 그리고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구나 집을 고를 때 엔티크 (Antique : 옛날식) 스타일을 더 좋아합니까? 혹은 모던(Modern : 현대식) 스타일을 더 좋아합니까? 저의 경우는 현대식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음악이나 의상의 경우는 어때요?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것을 그리워하여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복고풍 스타일을 더 좋아합니까? 아니면 최신식 현대적인 것을 더 좋아합니까? 요즘은 한국에 보면 ‘트로트‘가 다시 유행입니다. 트로트는 정형화된 한국 민요의 영향을 받는 대한민국의 음악장르입니다. 새 것이 아닌 옛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들 중에 많은 분들이 그 트로트 임영웅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발라드’는 어떻습니까? 발라드 역시 서양 중세시대 음악의 장르입니다. 이것도 새 것이 아닌 옛 것입니다. 특히 발라드 중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감성적인 노래가 많습니다. 요즘도 발라드 좋아하는 분들 제법 많습니다.
그리고 연세가 드신 분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저의 경우도 젊었을 때에 많이 부르고 들었던 그 당시의 노래 특히 7080 시대의 팝송을 들으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은혜를 세게 받고 나서 찬송가를 부르면 어떨까요? 아- 찬송가가 최고입니다. 찬송가를 한 시간 이상 부르면 마음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찬송가에 실려 있는 유명한 찬송 곡은 대부분 옛날 찬송 곡입니다. 그런데 그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에게 감동이 됩니다. 대표적인 곡 중에 ‘에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둘 중에는 무엇이 더 좋습니까?
구약은 구약 나름대로 좋은 것이 있고, 신약은 신약 나름대로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둘을 비교하면 새 언약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3500년 전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에 입각한 언약이고, 신약은 2000년 전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즉 시온산에서 세운 언약입니다. 구약은 짐승의 피로 세운 언약이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율법의 행함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강조가 됩니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구약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하시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요8:11)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잣대로 하면 저와 여러분들 중에 죽을 사람 참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이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계속 용서를 받고 여전히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약 시대는 죄를 지어도 괜찮고, 구약시대는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약시대의 계명이 구약 시대의 계명 보다 더 엄격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 레위기 19:18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보십시오. 구약은 이웃만 사랑하라고 했지만 신약에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은 “간음하지 말라.”(출20:14)고 하지만 신약에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느니라.”(마5:28)고 했습니다. 즉 구약에서는 실지 죄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만 죄로 정하지만, 신약에서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음욕도 간음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요일3:15) 그런 점에서 보면 죄에 대한 잣대는 도리어 신약이 구약보다 더 엄격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분명이 신약의 백성들이 구약의 백성들보다 용서함을 더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용서할 때에도 구약은 일곱 번 정도 하면 최대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은 하루에 일흔 번의 일곱 번 즉 70×7=490번까지 용서하라고 합니다.(마18:21-22) 더 나아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분명 구약의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더 많이 받지만 우리도 그렇게 남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라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시대는 일반 백성들이 전도를 못하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크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이요, 유언 중의 유언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올 때에 그를 부끄러워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막8:38) 즉 우리 편에서 보면 신약이 구약보다 좋지만 그렇다고 구약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한자어에 보면 ‘온고지신’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해석하면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자의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모세의 제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옛것인 율법은 좀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새것 즉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복음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위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구약도 깨닫고 신약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신학’이란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신학이라는 겁니다. 일명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이게 최신 신학 학문이니까 좋은 걸까요? No. 아닙니다. 이 신학은 성경에서 틀린 것을 찾겠다고 시작한 신학입니다. 즉 성경을 인간의 이성과 잣대로 비판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믿지 못할 것이 참 많습니다. 동정녀 탄생도 못 믿겠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수를 건넌 것도 못 믿겠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못 믿겠고... 아니- 자신이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을 모두 오류라고 하니까, 결국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에이- 사탄아, 물러가라.
반면 ‘보수주의 신학’이 있습니다. 보수주의란 글자그대로 새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옛날의 전통적인 진리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새 것이 아니고 옛 것이니까 좋지 않다는 뜻입니까? No.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보수주의 신학을 정통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 신학이 성경의 진리와 맞는다는 겁니다.
결론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강조하면 자칫 ‘꼰대’라는 누명을 뒤집어씁니다. 그러나 성경의 새 언약인 신약도 어찌 보면 2000년 전에 써진 것이니 한참 뒤떨어진 낡은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3500년 전에 써진 구약도 읽고, 2000년 전에 써진 신약도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옛 것과 새 것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잘 읽고 잘 깨달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옳은 사람, 좋은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