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차이

날짜: 
2003/02/24
설교: 

제 목 : 시각의 차이
본 문 ; 빌1:12-14

신발을 만들어 파는 두 경쟁사가 있었습니다.
국내시장에서의 과열경쟁에서 벗어나고자 두 회사가 모두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던 중 아프리카 오지에도 영업사원을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유능한 두 영업사원은 각각 시장조사에 나섰는데, 아직 문명생활을 접하지 못한 아프리카 오지 사람들은 모두들 신발은 커녕 맨발로 생활하고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제각기 자기 회사에 전보를 쳤습니다.
먼저 A회사 영업사원의 전보내용입니다.
"원주민은 모두 맨발, 도저히 신발 팔릴 가능 없음."
그러나 B회사 영업 사원의 전보 내용은 이렇습니다.
"원주민은 모두 맨발, 크게 유망함. 신발 급송 바람."

여러분, 두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로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갔었지만 이렇게 정반대의 의견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이 두 회사 중 과연 어느 회사가 아프리카에서 성공을 했겠습니까 ? 당연히 긍정적인 보고를 한 사원이 있는 B회사가 아니겠습니까 ?

이런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사막에서 두 사람이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실 물이 반병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에이- 이제 물도 반병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제 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 그리고 나서 이 사람은 낙심과 절망감 속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와- 아직도 물이 반병이나 남아있네 ! 이 물이 떨어지기 전에 틀림없이 길을 찾을 수 있을 꺼야 !" 그리고 나서 이 사람은 용기를 내서 계속 전진을 해나갔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이 두 사람 중 누가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합니까 ?
당연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 미국 민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지미와 죠는 감옥에 갇히었네, 어느 날 둘은 감옥에서 바깥 세상을 보았다네, 지미는 트럭이 달리는 진창길을 보고, 죠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았다네."
여러분, 똑같이 철창 신세가 된 두 친구인데 그들의 바라보는 눈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감옥의 철창 속에서 지미는 땅의 진창길을 바라보고 이 세상은 저 진창길처럼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생각을 하고 우울함과 답답함 속에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죠는 하늘을 바라보고 아름다운 별을 보며 이 세상은 그래도 저 하늘의 별처럼 밝은 곳이 있고 자신에게도 장차 희망의 찬란한 빛이 비추일 것을 생각하고 늘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이 두 사람이 감옥생활을 원만히 더 잘했겠으며 마침내 감옥을 나왔을 때 누가 더 사회생활을 잘 적응하고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
당연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

어느 여자 중학교 선생님이 학생들과 산으로 소풍을 갔다 온 후에 그 감상들을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쩌면 산이 그렇게 더러워졌어요. 쓰레기는 여기저기에 있고 거기다가 파리까지 들러붙고... 어휴 더러워 ! 다시는 산에 가지 말아요. 선생님 !"
그러자 다른 여학생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산에서 보는 들국화는 정말 예뻤어요. 그 작은 국화 앞에서 발이 저절로 멈추어지더군요. 다시 한번 그곳에 갔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
이와같이 두 여학생의 보는 눈에도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 한 여학생은 그 넓은 산에서 오직 더러운 쓰레기를 보았고, 또 다른 여학생은 아름다운 들국화를 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내용과 질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세상이 미워지고 마음에 분노가 부글부글 끓게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고 마음에 감사와 행복이 싹트게 됩니다.

여러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
이스라엘 사람들이 골리앗을 바라볼 때 그는 너무나 몸집이 거대한 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골리앗을 물리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골리앗의 그 거대한 몸집에 그들은 모두가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워 떨며 감히 저항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야, 저 골리앗 몸집 한번 되게 크구나 ! 저렇게 몸집이 크니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 영락없이 맞겠구나 !"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가며 돌멩이를 날리자 생각한대로 골리앗의 그 큰 이마에 명중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다윗이 골리앗의 그 큰 몸집을 무서워했다면 그도 역시 골리앗을 쓰러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골리앗의 그 큰 몸집을 바라볼 때 "야, 표적한 번 크고 좋구나 !"하는 대담하고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골리앗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골리앗 같은 거대한 문제를 바라볼 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헤쳐나갈 수도 있고, 반면 그 문제로 인해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과의 차이는 시각에서 잘 나타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지혜나 경험을 통하여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자신의 한계에서 풀지 못하는 문제라고 생각되면 그때부터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 속에 빠져 탄식과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치더라도 결코 희망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졌고, 더 좋은 현실적인 조건이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우리들의 시각에는 믿음의 시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육신적인 눈으로 어려운 상황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고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에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결코 희망을 저버리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곳 외국 땅에서 아무리 산더미 만한 환난의 파도가 다가올지라도 나를 아주 삼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나의 하나님은 지금의 이 문제보다도 훨씬 크시기 때문이다 !" 할렐루야 !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여러분, 사도 바울은 선교사역을 행하면서 너무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때로는 돌로 맞기도 했고, 태장을 맞기도 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잘먹지도 못했고 편한 곳에서 잠을 자지도 못했으며, 위험이 늘 그를 뒤따랐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가 처한 상황과 형편만을 바라보았더라면 그는 실망하여 일치감치 선교사역을 다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황과 형편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운행자가 되시고 심판자가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사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오늘이나 내일 나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의 삶이 인생과 역사의 심판자가 되시며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어떠한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도 항상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끌려가면서도 그는 "내가 재수가 나빠서 그들의 손에 붙잡혀 로마에 끌려가는 구나 !" 하고 자기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과 섭리가운데 복음증거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로마 감옥에까지 오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즉 바울은 로마 황제의 포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 황제를 경호하는 정예부대인 시위대 병사에게 매여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이 시위대 병사에게 매여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시위대 병사가 자기에게 매어있는 것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성경학자는 4시간을 교대로 바울에게 메여있었던 병사가 4380명 가량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즉 바울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4380명의 군사, 그것도 로마 군대에서 가장 엘리트가 되는 황제를 경호하는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이러함으로 엘리트 군인들이 자기들의 가족,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어 로마의 상류층은 물론, 궁정 안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에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느니라."(빌1:12-13)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인생의 삶에 있어서 나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떠한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주 불행한 일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고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신 바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하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도 실천하며 살수가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자 선생님께서 하얀 백지에 조그마한 점 하나를 찍어 학생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보입니까 ?"
그러자 학생들은 저마다 조그마한 점이 보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애들아, 작은 점보다 훨씬 큰 하얀 백지는 보이지 않니 ? 너희들의 삶에 있어 절망은 이 작은 점이고 소망은 이 넓은 하얀 백지란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조그만 절망의 점을 바라보고 "내 인생은 이제 끝장이다. 나는 이제 망했으니 될 대로 되라" 하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절망으로 몰고가지 마십시오.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자포자기적인 행동으로 남아 있는 그 큰 소망의 하얀 백지를 온통 까맣게 물들이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인생도 망쳤으니 너도 같이 망하자고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삼가십시오. 그리고 잠시 여유를 가지고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에게 있어서 절망은 아직도 작은 점이고 소망은 아직도 넓은 백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