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하는 자와 감사하는 자

날짜: 
2009/02/15
설교: 

민11:1-2 불평하는 자와 감사하는 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감사와 불평에 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수도원과 감옥은 똑같이 세상과 격리되어 있습니다. 고로 수도원과 감옥은 세상의 안락함이나 편안함이나 쾌락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돈이 있어도 돈의 가치가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지 못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어도 수도원이나 감옥에서는 별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차이점이 있는데 감사하는 자가 있는 곳이 수도원이요, 불평하는 자가 있는 곳이 감옥이라는 것이다. 즉 똑같은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불평만 늘어놓아 자기가 속한 그곳을 감옥과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므로 자기가 속한 그곳을 수도원과 천국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종류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한 사람은 불평하는 자요, 한 사람은 감사하는 자입니다. 이야기를 하나 더 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아주 먼 나라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두 전도자는 길을 걸으면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을이 나타나면 그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나 크게 실망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열심히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번은 여행 중에 사막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가도 가도 모래언덕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타고 왔던 낙타가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식량은 물론 물 한 방울도 남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모래 속에 쓰러져 자신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렇게 충성했는데 이렇게 사막에서 죽게 하시다니 너무 하십니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일을 마치고 저를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드리는 두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오아시스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는 물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에 원망의 기도를 했던 사람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기는 하셨는데 물이 너무나 적습니다. 이 물로 갈한 목을 어떻게 축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 전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다른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물로 충분히 제 생명이 연장되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다시 드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이렇게 불평하는 자와 감사하는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대표적으로 불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통하여 430년 간 애급에서 종살이를 하던 그들을 해방시키고 탈출시켰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전진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 거친 광야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의 여정 길도 종종 거친 광야 길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광야 길을 통과하는데 두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한 사람은 불평하는 자요, 한 사람은 감사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통과하면서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양식이 없을 때에 하늘에서 40년간 만나를 내려주었습니다. 한국적인 표현을 쓰면 40년간 공짜로 밥 먹여준 것입니다. 그것도 내 가족 전부를 먹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고기가 먹고 싶을 때에는 한 달간이나 지긋지긋하도록 먹여주었습니다. 또한 목이 마를 때에는 반석에서 물을 터트려 주었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변하게도 하셨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지켜주었습니다. 밤에는 추위와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옷이나 신발이 해어지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필요한 각종 위생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질병에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었습니다.
이 정도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면 자다가고 감사, 깨어나도 감사를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저들은 계속 틈만 나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자 그들 이스라엘 진영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 불은 무슨 불입니까? 성령의 불이 아닙니다. 고난의 불이요, 시험의 불이요, 문제와 재앙의 불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이와 같이 인생을 살아갈 때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아무개 남편은 돈도 잘 벌고, 매너도 좋은데 당신은 뭐요?" "아무개 아내는 서비스도 좋고, 음식 솜씨도 좋은데 당신은 뭐요?" "옆 집 아들 딸은 공부도 잘한다는데 너희들은 밤낮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가정에서도 이렇게 남편과 아내가 혹은 가족들이 서로를 향하여 불평을 늘어놓게 될 때 고난의 불이 붙을 수 있습니다. 재앙의 불이 붙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 도장을 찍어라 말아라. 너가 나가라 내가 나간다. 우장창 과장창! 쨍그랑 쩡그랑! 사람 살려! 죽여 죽여!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또 한 종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온유한 사람, 기도의 사람, 감사의 사람 모세입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본문에도 이스라엘 진영에 붙은 고난과 재앙의 불을 끄기 위해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의 불이 꺼졌습니다. 다시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보다는 모세라는 기도의 사람, 감사의 사람이 더욱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빨리 본받고 나쁜 것은 빨리 버리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아갈 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그 길이 지옥과 같은 길이 될 수도 있고, 천국과 같은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짧은 인생을 살면서 불평보다는 감사를 가지고 살므로 천국을 스스로 가꾸시기를 축원합니다.
전구와 축음기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발명한 발명왕 에디슨은 젊은 시절에 청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소년 시절은 너무도 가난하여 철도역에서 신문팔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일을 하던 중에 기차 실험실에서 화재를 일으켰습니다. 그 일로 그는 차장에게 심하게 뼘을 얻어맞아 결국 청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사람들이 에디슨에게 물었습니다. "청각 장애로 살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습니까? 때로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원망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천만에요. 제가 참으로 감사한 것은 젊은 날에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연구에 몰두할 때 잡음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각장애는 오히려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에디슨은 상황이 좋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 중에도 감사의 내용을 찾아서 감사했습니다. 과연 위인은 위인입니다. 사람은 지금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불평의 제목을 찾아도 많이 찾을 수 있고, 감사의 제목을 찾아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제목을 찾는데 앞장서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남미는 북미보다 더 좋은 자연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최강이지만 남미는 여전히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북미는 청교도들이 신앙을 찾아 개척한 '감사의 땅'이다. 그러나 남미는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개척한 '탐욕의 땅'이다. 북미와 남미가 현격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즉 감사가 그 땅을 좋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탐욕과 불평은 그 땅을 나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물질적인 풍요가 있어도 불평이 계속 터져 나오면 그 땅은 사람 살기에 나쁜 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해도 감사가 계속 터져 나오면 나중에 그 땅은 사람 살기에 좋은 땅으로 변화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눅17:17-18)에 보면 예수님이 탄식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와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더랍니다. 즉 감사하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말세의 현상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세에는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딤후3:1-2)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그리고 그 공로로 내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어졌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은혜 하나만 생각하면 우리는 아무리 지금 당장 환경이 어려워도 "그래, 감사해야지!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고백은 하나님을 크게 영화롭게 하므로 문제와 재앙과 고난의 불도 꺼지게 합니다. 감사는 사도 바울의 굳게 닫힌 옥문도 열리게 했습니다. 감사는 바울의 손과 발을 묶었던 차꼬도 풀리게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면서 결론을 맺고 싶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갔던 아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오늘 저에게 굉장히 감사한 일이 생겼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느냐?" "이건 기적이에요. 오늘 교회에서 집으로 오다가 제가 탄 버스가 7바퀴나 굴렀지만 저는 상처하나 없이 말짱해요. 하나님께 진짜 감사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나는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하다." "아니, 왜요? 아버지가 탄 버스는 8바퀴 굴렀나요?" "아니, 나는 한 바퀴도 안 굴렀다. 그래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