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노는 신앙, 일치하는 신앙

날짜: 
2009/04/04
설교: 

마26:36-43 따로 노는 신앙, 일치하는 신앙
이번 주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잔을 앞에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각오를 미리부터 하셨지만 아무래도 육신을 입으신 고로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심히 어려운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렇게 예수님이 고민하고 슬퍼하며 괴로워서 기도하시고 있는 동안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들에게 "나와 같이 깨어서 함께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피곤해서 계속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결국 예수님과 같이 기도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가며,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는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한 것이 시험의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깨어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마음은 원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겁게 내려왔습니다. 하루 종일 유월절 준비하느라 바쁘게 보내다 보니 피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피곤에 못이겨 잠을 자는 제자들을 보면서 시차적응이 생각났습니다. 한국에서 이곳 캐나다에 오시는 분들 중에 시차적응이 안되어 며칠 동안 괴로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에 쏟아지는 잠은 참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 자게 되고 맙니다. 지금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제 여동생이 시집가기 전에 대한항공 승무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 태평양을 넘고 비행을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24시간 혹은 그 이상 계속 잠만 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잠자는 미녀 같습니다. 수면제를 먹은 것도 아닌데 계속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면서 "아, 승무원 일이 그렇게 힘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일도 힘들지만 시차로 인해 생기는 현상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도 육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육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음과 의지가 육체의 피곤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마음 따로 육체 따로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런 갈등을 겪게 됩니다. 마음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보다 잘 믿어보고 싶습니다. 십일조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죽도록 충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원이지만 육체가 잘 따라가지 않습니다. 물질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행동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예,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멘!" 하고 말을 했지만 행동은 반대로 움직입니다. 이렇게 따로 노는 신앙을 가리켜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불신자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신자들의 이런 모습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겉과 속이 따로 따로 움직이는 모습은 분명히 예수님도 싫어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일삼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때로는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말과 행동이,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노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마음과 행동이,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로 노는 신앙의 모습을 내 자신 속에서도 보게 됩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따로 노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심히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의와 선만을 좇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8:22-24)
오늘 우리는 따로 따로 노는 신앙생활을 일치하는 신앙생활로 변화시키기기를 원합니다. 죽은 믿음을 산 믿음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비난 받고 책망당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칭찬받고 존경 받는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할까요?
1.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과 남자들이 결혼배우자를 고를 때 대개 남성들은 인물을 보고 여성들은 능력을 본다고 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돈 버는 능력이지요. 즉 자기와 자녀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벌도 중요시합니다. 좋은 학벌이 있으면 돈 버는 능력도 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가산점을 줍니다. 혹 배우자가 재벌 2세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주 후한 점수를 줍니다. 그런 남자 하나 물어 보려고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여성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이 그 돈 버는 능력은 세상의 불신자 남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남성들은 돈도 못벌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그 부요를 누리는 축복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8장 18절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전도서 5장 19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러분, 하나님은 비단 재물 얻을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잘 믿을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것처럼 말세에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이 어려운 말세를 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보다 잘하도록 능력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
제자들을 비롯해 초대 교회 성도님들은 그 무서운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의 핍박을 이기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무당이나 점치는 사람이 귀신의 힘을 빙자하여 그러한 일들을 하듯이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 일치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신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전심으로 향하는 자, 그러한 능력을 구하는 자, 회개하는 자, 사모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자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잘 안됩니다. 잠자고 깨는 것도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교회 오는 것도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전도하는 것도 내 힘으로 안됩니다. 사랑하는 것도 내 힘으론 잘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도 마음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모습이 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마귀의 영향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사람들이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분명히 귀는 열렸는데 듣지를 못합니다. 입으로 말을 하는데 말이 분명하지 못합니다. 생각과 말이 따로 놉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귀신이 그 귀를 막고 혀를 붙잡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을 그 사람의 두 귀구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침을 뱉어 혀에 대시며 외쳤습니다. "에바다!" 무슨 뜻입니까? "열려라. 참깨!"라는 뜻입니까? '참깨'는 빼고 '열려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귀신이 떨어져 나가고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귀신은 인간의 몸과 마음과 생각에 붙어서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되 따로 따로 믿게 하므로 진리를 제대로 좇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때 그러한 귀신을 생각 속에서, 마음속에서, 이목구비, 사지백체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피로 이러한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냥 믿고 시도해 보십시오. 신기하게도 귀신이 나갑니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고 나가고, 물건을 깨트리고 나가기도 하고, 넘어트리고 나가기도 합니다. 여기 캐나다 귀신들은 소리 없이도 잘 나갑니다.
때때로 우리는 가족들 중에도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행동,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들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로 노는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귀신의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타일러도 안됩니다. 설명을 해주어도 안됩니다. 그를 붙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같이 심한 고생을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같이 한번 따라합시다. "예수님 이름으로 명하노니 /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게 하고 / 몸과 마음과 / 육체와 행동과 말을 / 따로 놀게 하는 귀신은 / 나에게서 물러가라. / 내 가족식구에게서 물러가라. /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서 물러가라. / 다시는 틈타지 말라. / 아멘!"
3. 스스로 컨트롤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고 하셨습니다. 즉 마음과 육체가 따로 놀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과 육체가 따로 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몬 4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즉 이것은 귀신의 역사가 아니라 잠을 못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몸의 컨트롤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여행을 하면서 생기는 시차의 피곤함이나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리부터 자기 컨트롤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비행기 안에서 미리 충분히 잠을 자든지, 혹은 시간을 잘 조절하므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노인병 질병 중에서 뇌졸중, 즉 중풍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생각한대로 손과 발과 몸이 움직이지 않는 병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움직였는데 몸은 저렇게 따로 놉니다.
이러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예를 들면 혈압을 줄여합니다. 정상인의 혈압은 120-80입니다. 고혈압은 140 이상 90이상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여 고혈압에 가깝다고 하면 혈압을 낮추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금연은 필수이고, 기름진 고기를 절제하고, 오메가 3오일이 많은 생선이나 견과류를 섭취하고, 채식과 과일을 먹고, 짠 음식을 피하며,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혈압 약을 드셔야 합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컨트롤 하는 사람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일날 보면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 중에 토요일에 늦잠을 자서 피곤하여 못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몸을 컨트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토요일은 주일을 예비하는 날로 지켜야 합니다. 즉 주일이라는 중요한 날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미리 컨트롤해야 합니다. 마치 시합을 앞둔 선수가 자기 몸의 컨트롤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토요일은 마음 놓고 컴퓨터 늦게까지 하는 날이 아닙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술 퍼마시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하여 내 자신을 컨트롤하고 내가 인도해야할 분들에게도 전화를 하면서 그들도 준비시켜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안됩니다. 몸과 마음이 주님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스스로 컨트롤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외국 땅에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