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14-23 양자를 살리기 위해 친자를 죽였다.
"혹시 신데렐라 이야기 아세요?"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아마 거의 99%) 사람들은 당연히 '안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좀 해주실래요?"라고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옛날에 계모와 그 언니들에게 구박받는 신데렐라가 있었어요.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멋있는 호박마차를 타고, 예쁜 유리 구두를 신고 왕자님의 무도회에 갔어요.
그런데 12시가 되면 요술이 풀리기 때문에 신데렐라는 바쁘게 무도회장을 빠져나오다가 그만 유리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리게 되었어요. 신데렐라를 사모한 왕자는 그 유리 구두의 주인인 신데렐라를 찾으려 했어요. 드디어 왕자는 유리 구두의 주인인 신데렐라를 찾아서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서양에 '신데렐라 이야기'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와 유사한 '콩쥐 팥쥐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시 콩쥐 팥쥐 이야기도 아신다면 이야기 좀 해주실래요? "옛날에 콩쥐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어요. 계모는 자기가 데리고 들어온 친딸인 팥쥐만을 감싸며 콩쥐를 구박했어요. 계모는 친딸인 팥쥐만 데리고 잔치에 가면서 콩쥐에게는 나무로 된 호미를 주면서 넓은 자갈밭을 매라고 했어요. 그리고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했어요.
그때 소가 나타나 넓은 자갈밭을 다 매어주었어요. 그리고 두꺼비가 나타나 밑 빠진 독을 막고 물을 채워주었어요. 일을 마친 콩쥐는 선녀가 준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잔치 집에 가다가 냇가에서 원님의 행차를 만나게 되었어요. 콩쥐는 당황한 나머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어요. 원님은 '신발 신어보기' 시험을 통해 신발 임자인 콩쥐를 찾아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그런데 콩쥐의 행복을 시샘한 계모와 팥쥐는 콩쥐를 유인하여 연못에 빠뜨려 죽였어요. 그리고 팥쥐는 콩쥐로 행세를 했어요.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원님은 팥쥐를 죽이고 그 시체를 싸서 팥쥐 어머니에게 보냈어요. 팥쥐 어머니는 원님에게서 선물이 온 줄 알고 기뻐하다가, 딸의 시신인 것을 알고 기절하여 죽었어요."
오늘 소개한 신데렐라 이야기와 콩쥐와 팥쥐 이야기처럼 세계적으로 계모와 전실 자식과의 관계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500편 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 중에 사악한 계모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착한 계모의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마 인간의 심성이 타락하여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인가 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15절과 23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즉 우리는 죄로 인해 다 심판의 무서움에 떨어야하는 마귀의 종들이었었는데 하나님은 친아들 예수님을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들을 종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들을 양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의 본문을 통해 볼 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계부입니다. 그런데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나쁜 계부가 아니라 양아들을 살리려고 하나 밖에 없는 친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신 계부라는 것입니다. 말이 계부이지 실제는 친부보다 더 나은 분이십니다.
가끔 보면 친부나 친모보다 더 훌륭하고 더 좋은 계모나 계부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양아들을 살리려고 하나 밖에 없는 친아들을 대신 죽이겠습니까? 도대체 양아들을 살리려고 친아들을 죽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 하나님은 미친 하나님입니까? 친아들 예수님이 양아들인 우리들을 위해 대신 죽으면서 "하나님 아버지, 미쳤어요? 왜 친아들인 나보다 양아들인 저 죄인들을 더 사랑하는 거예요?" 하고 따지고 덤볐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친아들인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를 죽이면서까지 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양자 삼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들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죄 속에 파묻혀 살다가 지옥으로 가기에는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내 자녀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 받고 있는 내 자녀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아는 불쌍합니다. 고아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 아들이 가지고 있던 좋은 장난감을 고아에게 줍니다. 내 아들이 입었던 좋은 옷도 고아에게 입힙니다. 그리고 그 고아를 가만히 나두면 힘든 세상에서 살기 힘들므로, 혹은 나쁜 길로 나갈 수 있으므로 그 아들을 양자삼아 내가 키웁니다. 친자보다 더 신경을 쓰면서 키웁니다.
저희 교회 주일학교에 여러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번 여름 성경학교를 하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자녀가 있었습니다. 정필상 어린이입니다. 아버지는 친아버지지만 어머니는 계모입니다. 이곳 캐나다에 아버지를 따라서 왔지만 아버지는 주일도 교회에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직장 생활하기에 바쁩니다. 계모인 어머니의 사랑과 돌봄도 부족합니다. 몇 주 전에는 넘어져 팔도 다치고 기브스를 했습니다. 그 모습으로 여름 성경 학교에 왔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영장도 못 들어갔습니다.
외톨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배가 아프다고 집에 가려고 합니다. 다른 자녀보다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더욱 사랑이 갑니다. 주일날 헌금 봉투에 정필상 이름을 써서 2불을 넣어서 주일헌금 내라고 했습니다. 그 장면을 본 다른 어린이가 물었습니다. "왜 저 아이만 헌금을 주시는 거예요?" "응, 너희들은 주일날 아빠 엄마가 교회에 오시지만 필상이는 엄마 아빠가 교회에 오시지 못하니까 내가 대신 준거란다."
여러분, 사랑 받고 있는 친자보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고아에 더욱 신경이 쓰이고, 그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대의 마음도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여러 명의 학부모가 교장실에 와서 따졌습니다. "아니, 교장 선생님, 우리 자녀가 다니는 반에 왜 저런 고아를 같이 집어넣어서 우리 애를 망치는 거예요? 저 가난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빨리 다른 학교나 다른 반으로 보내세요."
여러분, 사랑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도 순서가 있습니다. 가장 응급한 환자가 우선순위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말세가 되면 될수록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됩니다. 고귀한 사랑도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랑도 항상 자기 자녀가 우선순위가 됩니다. 자기 자녀가 어디서든지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하고, 가장 존귀를 받아야 하고, 우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복지 사회가 아니라고 합니다.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잘 사는 부자, 권력 있는 사람이 계속 정부의 혜택을 누리고, 반면 가난한 사람은 따돌림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사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입니까? 그런 사회가 선진국입니까? 저는 여기 캐나다에 와서 아주 절실하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살 수 있는 곳이 여기 캐나다라는 곳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아이들 우유 값도 더 많이 줍니다. 그들에게는 의료 보험을 비롯하여 정부 혜택이 더 많이 주어집니다. 반면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더 많이 걷습니다. 이런 사회가 더 좋은 곳이 아니겠습니까?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허랑방탕한 탕자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위해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밭에서 돌아와 이 모습을 보고 몹시 분해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러자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러분, 맏아들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왜 죄 많은 탕자를 사랑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도 나중에 결혼을 하여 자녀를 키워보면 알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런 자녀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도 자식새끼 낳아서 키워봐라."
여러분, 부모가 되어 자녀를 키우다 보면 못난 자식을 더욱 불쌍히 여기게 되고, 그에게 더욱 사랑이 갑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 더 신경을 썼습니다. 왜 그럴까요? 99마리의 양이 한 마리의 양보다 못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 역시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왜 구원해 주셨나요? 남보다 잘나서입니까? 아닙니다. 남보다 더욱 못났기에 더욱 불쌍하기에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겠습니까? 친자를 죽이면서까지 양자를 구하신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하겠습니까?
여러분,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영화를 통해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아십니까? 1948년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에 공산주의자들이 학교에까지 들어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그때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의 잘못을 지적하는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이 강철민이라는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총살을 당했습니다.
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강철민은 잡혀서 사형을 당할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손 목사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강철민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자기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산 고려 고등 성경학교에 입학시켜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게 했습니다.
손 목사님은 두 아들 장례식 예배에서 9가지 감사를 말씀하셨습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 보배를 주께서 나에게 주셨는지 감사합니다. 3) 삼남 삼녀 중 가장 아름다운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에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죽어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 당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6)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사랑하는 두 아들 총살 시킨 원수를 회개 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한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 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의 감사와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개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한국의 모 교회 여름 수련회에서 중고등부 애들이 야외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그만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교인들이 전부 비탄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로 인해 목사님을 원망하는 교인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그 죽은 아이의 장례를 치른 후 얼마 후 목사님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아이가 내 자녀였기 망정이지, 교인들의 자녀였다면 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소!"
양자를 살리기 위해 친자를 죽였다.
날짜:
201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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