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유익

날짜: 
2011/06/12
설교: 

행6:8-15 용서의 유익
예루살렘 교회에서 7명을 집사로 뽑았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스데반입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를 용서하며 죽는 스데반의 천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을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헤밍웨이 소설에서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스페인 사람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의 아버지와 아들이 다투었습니다. 아들이 마드리드로 가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는 광고를 가장 큰 신문인 엘리베랄 신문에 실었습니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하였다. 아빠."
그 날 정오에 호텔에 간 아버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 80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파코는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아픔 속에서 용서받기를 갈망하며 기다리는 이들이 많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용서란 무엇일까요?
1. 용서란 자기 치료제입니다.
용서를 하면 가장 먼저 치료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용서를 하면 가장 유익을 보는 사람도 자기 자신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렇게 용서하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반면 돌로 스데반을 쳐 죽이는 사람들은 악마같이 대들었을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입니다.
용서는 자기 아픔을 씻는 자기 치료제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따라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기가 다윗에게 몰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사울이 3,000명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왕이면 왕의 권위를 지키면서 신하들에게 다윗을 잡아 오라고 하여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다윗을 잡으러 3,000명을 이끌고 다니는 것을 보면 대단한 결의였습니다.
꼭 잡고 말겠다는 각오가 보이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 몇 명과 함께 엔게디 굴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그 굴속에 들어와서 피곤을 이기지 못 하고 잠을 자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의 신하들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즉시 죽이십시오." 굴속에서 혼자 자고 있는 사울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옷자락만 벴습니다.
사울이 푹 자고 일어나 나갈 때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엎드려 절하며 외쳤습니다. 손에는 옷자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24:11-14)
사울이 말했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안다"(삼상24:16-20) 하나님은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을 더 크게 사용하십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왕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용서받는 기쁨보다 용서하는 기쁨이 더 큰 법입니다. 용서하면 자기가 더 커집니다. 용서는 자기 치료제입니다.
딕 티비츠(Dick Tibbits) 심리학자는 <살기 위해 용서하라>(forgive to live)라는 책에서 용서의 유익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용서하면 평화를 경험하기 때문에 용서하여야 합니다. 둘째, 용서하면 희망을 보기 때문에 용서하여야 합니다. 셋째, 용서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로 바로 가기 때문에 용서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면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옵니다. 용서하면 절망이 사라지고 희망이 생깁니다. 용서하면 방황하던 사람이 바른 길로 가게 됩니다. 즉 용서가 치료제입니다.
2. 용서는 용광로입니다.
용서는 서로의 허물을 용광로와 같이 다 녹여 줍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희망이요 축복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자고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스데반을 보았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하며 죽는 스데반의 모습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한 명도 안 빼놓고 스데반을 주목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목하였다는 말은 너무나 놀라서 자세히 뚫어져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모두가 심령이 녹아지고 있는 순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얼굴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어느 그리스도인 장례에 한 사람이 와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누구십니까?" "나는 이 분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전하셨나요?" "아니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이 분 얼굴만 보면서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았어요. 말씀 없이 얼굴로 복음을 주신 분이세요." 이 분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용서하는 얼굴은 복음이요 용광로였습니다. 모든 것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참전 용사 기념비 앞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네는 자네를 붙잡아 고문했던 사람을 용서하였는가?" 이 말이 떨어지자 말자 다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렇게 나를 고문하였던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 이 말을 듣고 물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아직도 그 사람들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구먼. 용서를 못하면 용서하는 순간까지 그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향나무는 자기를 찍어내는 도끼에 향을 묻혀 줍니다. 향나무를 찍은 도끼에서는 향냄새가 피어납니다.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며 향기를 묻힐 때 비로소 새로운 전환점이 마려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애급에서 죽자 형님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창50:16-17)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형들이 벌벌 떨고 있는 것이 가엽게 보여서 울었을 것입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요셉은 용서하였습니다. 모두가 울었습니다. 용서는 모든 허물을 다 녹여 버리는 용광로입니다. 속상한 일, 억울한 일, 모욕을 당한 일로 인하여 밤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까지 이리저리 뒤치락거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영혼의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제가 용서입니다. 그 많은 인생의 쓰레기들을 용서의 용광로에서 소각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집니다.
용서는 용광로라는 사실을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구 선생님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일본 헌병이 한국 청년을 매수해서 김구 선생을 암살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붙잡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청년을 처형하려고 김구 선생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청년을 잡았습니다."
김구는 여유 있게 말했습니다. "풀어 주어라." 그리고 그 청년을 안고 말했습니다. "내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한국 청년을 여기서 만나니 실로 감격스럽다." 이 청년은 김구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독립군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김구 독립운동에 생명을 걸고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용서는 용광로입니다. 모든 것을 녹일 수 있습니다.
3. 용서는 새로운 출발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신선한 시작이며, 새로운 출발에 필요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매체다." 용서받은 사람은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용서는 시작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같이 빛나며 새로운 천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새로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 가운데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는데 옆에 있었습니다. 바울도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때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저렇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같이 평안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그때부터 바울에게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용서받으면서 새로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한 젊은 부인이 어두운 밤 으슥한 골목에서 어떤 청년에게 큰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핸드폰 전화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즉시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어떻게 생긴 사람입니까?” 부인은 정신없이 외쳤습니다. "곱슬머리였습니다. 곱슬머리!" 그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곱슬머리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곱슬머리 청년은 즉시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뒤늦게 경찰서로 달려온 부인의 남편은 곱슬머리 청년을 보자 말자 죽을 정도로 잔인하게 패기 시작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경찰들이 빨리 뜯어 말리지 않았으면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며칠 후 곱슬머리 진짜 범인이 잡혔습니다. 이 청년은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죽도록 얻어터진 곱슬머리 청년은 이를 갈며 그 남편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기회만 보면서 칼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을 품었습니다. 오직 복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어머니가 알았습니다. "아들아!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 "어머니! 나 너무 억울해 견딜 수가 없어요. 확인도 안 하고 나를 죽일 듯이 팼어요. 변명할 틈도, 이야기할 여유도 주지 않았어요. 그 놈을 기어코 죽이고 말겠어요."
"아들아! 그 사람 입장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라.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까지도 용서했단다." "어머니, 말리지 마세요. 나는 너무 억울해요."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이상한 소리에 곱슬머리 청년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였습니다. 나가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의 마음을 돌이키셔서 원수를 사랑하게 하소서. 용서하게 하옵소서."
어머니는 밤을 지새우며 아들이 그 사람을 용서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소리를 한참 듣던 아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달려가 어머니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그 사람을 용서하겠어요." 어머니도 울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구나."
모자는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방문이 열렸습니다. 한사람이 뛰어 들어와 두 사람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사정없이 패던 그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칼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팬 사람이지요. 나는 틀림없이 당신이 복수를 하기 위해 나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내가 먼저 당신을 없애 버리려고 생각하였지요. 오늘밤 당신 집에 숨어들어 와서 기회만 보고 있던 중이지요. 이 칼로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제는 이 칼로 나를 죽여도 좋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는 칼을 내밀었습니다. 세 사람은 다시 끼어 안고 울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세 명은 새 출발하였습니다. 결론입니다.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는 원한이 생길 수 있고, 그에 따른 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치료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모든 것을 녹일 수 있습니다. 용서는 희망의 출발을 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무쪼록 용서의 유익을 받아들여 희망의 출발을 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