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내 새끼들아!

날짜: 
2011/07/02
설교: 

신32:9-12 날아라. 내 새끼들아!
이스라엘 광야에는 더위와 추위와 함께 맹수와 야생 독충이 많은 곳입니다. 그런 길을 혼자서 한 달 동안 터벅터벅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두려움과 외로움과 황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집을 떠나 하란의 외삼촌 집에 가는 길이 그랬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여행을 한다면 가장 절실한 게 뭐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위험에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보호해 줄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야곱을 광야에서 어떻게 보호하셨는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먼저 찾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광야에서 감싸주고 보호하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때의 모습이 창세기 2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황급히 도망을 가게 됩니다. 피곤과 불안에 지쳐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문득 꿈을 꾸게 됩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연결되었는데 그 사닥다리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생생하게 듣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후 야곱이 하란에 도착하기까지 두려워하거나 떠는 모습은 더 이상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들을 보호하신다.
그것은 갈릴레이가 교황청을 빠져 나오면서 했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이러고저러고 떠들어도 지구는 도는 것처럼, 여러분이 사실을 믿든 안 믿든, 또는 느끼든 못 느끼든, 기도를 많이 하든 적게 하든, 거기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든지 언제나 여러분을 철저히 지키는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늘 하나님은 그 사랑을 강렬하게 표현하시는데, 바로 우리를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이 대목을 자주 인용하는데, 대부분이 그 뜻을 알고 계시겠지만 초신자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자기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는 말씀의 정확한 뜻은 '자기 눈동자를 보호하듯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께도 눈동자가 있어서 당신 스스로가 그 눈을 보호하신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그렇게 표현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 몸 중에 눈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크기로만 보면 눈은 전체 몸의 1/100 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온 몸이 다 성하더라도 눈이 제 구실을 못하면 우리 활동은 당장에 중지됩니다.
그래서 의사들 사이에 농담 비슷하게 떠도는 얘기가 있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몸의 다른 장기(臟器)는 한 시간 만에 만드시고, 눈 만드는 데만 23시간을 쓰셨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눈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정교하고 세심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30만 개의 회로가 있고, 1억 개 정도의 신경세포가 있어서 거리, 광도, 색상을 자동으로 조절합니다. 기능 전체가 전자동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눈꺼풀만 해도 자동 개폐식이어서 유사시에는 즉시 덮이게 됩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안구는, 그 기능이 언제나 원활하도록 눈물샘에서 습도를 조절해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쓴 물은 코라는 하수구를 통해 깨끗이 처리됩니다. 만약 눈에 불순물이 들어갈 경우, 눈 안의 여러 기능이 서로 단합해서 그 놈을 눈 밖으로 퇴치시키는데 그게 눈곱입니다.
눈은 그 자체로만도 수십 가지 부분으로 세분화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 신기하고도 정밀한 기능을 다 말씀 드리자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눈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눈을 두는 자리도 특별히 마련하셨습니다. 사람의 두개골은 웬만한 충격에도 잘 부서시지 않는데, 하나님은 거기에다 큰 동굴을 두 개 파서 그 속에다 안전하게 눈을 두신 것입니다. 몸의 다른 곳은 툭 튀어나왔지만 눈만큼은 오히려 안쪽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몸 가운데 다른 장기에 비해서 가장 사고빈도수가 적은 곳이 눈이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면 그것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이고, 어떤 빈틈도 없이 완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여러분 각자의 상황은 다 다를지언정,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하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들을 훈련시키신다.
부모들은 첫 아기를 낳았을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거의 신처럼 떠받듭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지적을 해줘도 본인들은 자기네 아기가 가장 예쁘다고 우깁니다. 자기 아이 앞에서는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게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부모는 그렇게 예뻐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정해진 교육과정을 밟도록 합니다. 유치원을 보내고, 가정에서도 이런 저런 규제를 두기 시작합니다. 벌을 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단과 시험을 통해 정금처럼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 누구든 각자의 훈련코스를 준비하시고 그 커리큘럼 따라 정확히 운행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뿐 아니라 성경의 꽤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03:5입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사야 40:31 말씀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독수리로 비유한 데는, 독수리 자체가 아름답거나 평화로워서가 아닙니다. 사실 독수리는 소름 끼치도록 매섭고 날카로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나 부리나 발톱은 그냥 쳐다보기에도 사납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수리로 비유한 데는 그 새가 지니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새끼 독수리에 대한 어미 독수리의 마음과 행동이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잘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를 훈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각자는 어느 코스를 밟는 중인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어떤 과정을 지나는 중일 텐데, 말씀 가운데 깊이 깨닫고 보다 성실하게 훈련과정에 임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독수리는 새끼 낳을 둥지를 아주 높은 곳에 마련합니다. 천길 만길 벼랑 끝의 윗부분이나 높은 나무의 가장 윗부분에 자리를 잡습니다. 맞습니까? 혹시 독수리가 사는 곳을 못보신 분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캘거리서 한 시간 반 정도 서쪽으로 가다보면 밴프의 미네완칸 호수가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배타고 관광하다 보면 오른쪽 바위산 꼭대기에 살고 있는 독수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수리는 산꼭대기에다 둥지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재료선택도 여느 새들과는 확실하게 차이가 납니다. 먼저 가시나무를 물어다가 둥지의 외곽 골조공사를 합니다. 그런 다음 내장공사를 하는데, 나뭇잎이나 헝겊쪼가리 같은 것으로 둥지를 싸 바르고, 토끼같은 동물을 잡아서 그 털가죽을 바닥에 깝니다. 마지막엔 자기 앞가슴에 있는 보드라운 털을 뽑아 자리를 푹신푹신하게 합니다.
그렇게 둥지를 완성해 놓으면, 그 어떤 동물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우선 높고 위험하기 때문에 올 엄두를 못내고, 어떻게 어떻게 그 둥지까지 왔다 하더라도 요새처럼 단단하기 때문에 그 둥지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어떤 독수리 둥지는 그 무게가 200 kg 이상이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독수리의 둥지는 아마도 동물의 세계에서는 가장 튼튼하고 안락하고 포근한 집일 것입니다.
독수리는 바로 그런 둥지에다 알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새끼는 아주 보드랍고 편안한 침대 같은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때마다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주기 때문에 아무 근심이 없습니다. 어미의 극진한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라면 어미는 오늘 말씀대로 새끼가 보는 앞에서 날갯짓을 합니다. 날개를 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계속 보여줌으로써 새끼가 그 방법을 보고 배우도록 합니다. 새끼들도 엄마를 보면서 함께 날갯짓을 해 봅니다.
그러나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너무나 무서워서 도저히 날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쯤 되면 아기 독수리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간 것입니다. 어느 날 어미 독수리는 오늘 말씀대로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힙니다. 그 큰 날개를 펴서 몇 번 펄럭이면, 순식간에 보드랍고 포근한 깃털과 털가죽은 다 날아가 버리고, 바닥이든 벽이든 가시만 남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끼들은 가시가 몸을 찌르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둥지를 나갈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아기일 때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안락한 보금자리에 두십니다. 가만히 있어도 먹여 주십니다. 내 신앙성장에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중에도 지금 이런 과정에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 너무 재미있고 봉사하는 것조차 즐거운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도 잘 들리고 교회 지체들도 다들 좋아 보입니다. 주로 새신자 또는 초신자들이 이런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두면 성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런 분들의 상황을 어지럽힙니다. 그것은 곧 조금 더 강한 훈련과정에 돌입하는 것을 뜻합니다. 괜한 시험이 오고 말씀도 안 들어오고 교우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뭔가 모를 의구심이 생기고 이런 저런 성가신 일에 연루됩니다. 때로는 예배도 나가기 싫을 때가 있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도 회의가 옵니다.
아마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누구든 이런 과정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 아기 독수리들에게 해 줄 말이 있겠지요? "날기 위한 훈련에 들어간 거야. 아무 걱정 말고 견뎌내 봐!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그렇습니다. 지금 가시 돋친 고난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고급 과정에 들어간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근심 걱정에 싸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상이고 오히려 즐거워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아주 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애급 총리일 때 70명의 야곱 가족이 모두 애급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으로부터 고센 땅을 하사 받습니다. 그 땅은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으로서 아주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또 풀이 많아서 목축하기에는 더없이 좋고, 사방팔방이 강으로 차단되어 있어서 자기들의 동질성을 이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꾸준히 번성해 나갔습니다. 처음 70명이었던 인구가 400년 만에 200만 이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만약에 그런 시간이 계속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해서 거기서 눌러 앉아 살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들의 둥지를 어지럽히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그들이 영원히 살 땅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편안한 상태에서는 떠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곧 요셉 당시의 사람들은 다 죽고,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왕이 애급을 통치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풀어졌던 수혜는 사라지고 맙니다. 남자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됩니다. 가시 돋친 고난을 전 민족적으로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애급을 탈출하고픈 열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눈을 돌리게 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어 다니는 것이나 뛰어다니는 것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독수리처럼 날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둥지가 너무 안락하면 독수리는 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미는 새끼를 사랑하지만 둥지를 어지럽게 하고, 가시에 찔리도록 합니다. 이제는 둥지를 나와서 날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시 때문에 못 견뎌서 둥지 밖으로 나온 새끼를 어미 독수리는 자기 날개 위에다 태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새끼는 잔뜩 겁에 질립니다. 어미 독수리는 느닷없이 새끼를 천 길 만 길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청룡열차 영어로 로러 코스터를 타 보신 분은 이 기분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야 안전벨트라도 있지만, 새끼 독수리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무방비로 한 없이 추락하는 것입니다. 떨어지면서도 그냥 떨어지지 않겠지요? "나 죽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칠겁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별별 생각이 다 날것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도대체 엄마가 왜 나를 죽이시려는 거야? 정말 우리 엄마 맞아!" 그러면서 보니까 땅이 가까워오고 있는 겁니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바로 그 때, 어미 독수리는 그 큰 날개를 펴서 떨어지는 새끼를 척- 받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끼를 훈련시키는 독수리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 어미 독수리의 마음속에 "혹시 내가 떨어지는 내 새끼를 날개로 못 받으면 어떡하지? 아이고, 끔찍해라!" 하는 불안감은 전혀 없습니다. 즉 독수리에게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절대 자기 새끼를 땅에 부딪치지 않게 할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중에 단 한 번이라도 날개로 받는 일을 실패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끼는 죽습니다.
하지만 어미 독수리는 결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새들의 왕이라는 독수리는 그 명성에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러니 어미 독수리는 그런 오명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긴장 푸는 법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바꿔서 생각해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결코 땅에 내동댕이쳐지도록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훈련과정에 들어오게 하신 만큼,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졸업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곤두박질치더라도 이게 끝은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거듭되는 고난에 지칠 때도 있고 죽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때야말로 우리 하나님이 나를 완벽하게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높은 하늘을 힘 있게 날 수 있을 때까지 떨어트리는 훈련을 반복합니다. 새끼는 처음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엔 들리지 않던 엄마의 외침이 이제는 들리는 겁니다. "야- 이 녀석아, 엄마처럼 날갯짓을 해 봐. 나처럼 날개를 펄럭여 봐! 너는 독수리야!" 그렇게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새끼에게 어느 날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도 엄마 독수리처럼 푸른 하늘을 폼나게 날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더 높은 신앙의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훈련 중에서도 끊임없이 "날갯짓을 해 봐! 힘내서 펄럭여 봐!" 하고 소리치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환란과 곤고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독수리 어미는 새끼들에게 소리치고 있을 것입니다. "날아라! 내 새끼들아!"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눈동자같이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하심을 믿고 신앙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독수리와 같이 푸른 하늘을 훨훨 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