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쉬어라!

날짜: 
2011/08/14
설교: 

6:30-33 잠깐 쉬어라!
지난 주간에 한국에서는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그 분을 보내드리는 천국 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설교를 하셨던 지구촌 교회의 이동원 목사님은 하 목사님을 빗대서 얘기하시기를, 목사님은 천국에서도 예수님 앞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내셨을 것이고, 그 얘기를 들은 예수님은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 자네는 좀 쉬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해서 눈물의 예배 가운데서도 폭소가 터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체로 한국 사람들은 쉴 줄을 모릅니다. 더 나아가 쉬는 것을 죄악시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능률적으로 하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의 구분이 명확하면 좋겠는데 그게 분명치가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쉼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서 한 소비자와 맥주 회사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즉슨, 소비자가 보기에 맥주에 거품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거품을 빼면 실제 맥주의 양은 너무 적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든가 아니면 거품을 빼고 액체맥주를 더 넣어야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판결이 나왔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맥주 회사가 이겼습니다.
판결내용이 이렇습니다. “거품도 맥주다.”그리고 판사가 덧붙이기를, “맥주는 거품 맛이다. 거품 없는 맥주가 무슨 맥주냐?”그랬답니다. 비슷한 논리로 음악가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쉼표도 악보 중의 일부냐?” 음악가의 대답이 무엇일가요? 물론 “그렇다!”입니다. 맞습니다. 쉼표도 분명 악보 중의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물어 보겠습니다. “쉬는 것도 생활의 일부입니까?”이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물론 “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쉬려고도 하지 않고 참된 휴식이 뭔지도 잘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곳 북미 캐나다는 휴가문화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겨울이 추우니까 그때는 학교도 방학을 오랫동안 하고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날씨 좋은 여름방학이 두 달 간입니다. 대학은 여름방학이 네 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은 날씨에는 휴가를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휴가를 가기 좋게 공휴일이 대개 월요일에 잡혀있습니다. 물론 너무 쉬는 것도 문제이지만 쉼을 포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성경을 보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는 구절도 있고 “죽도록 충성하라.”(계2:10)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막6:31) 오늘은 쉼과 휴식에 관한 주제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주제는 팔자 편한 사람들의 한가한 이야기 같고, 또 하나님 말씀으로 나누기엔 너무 가벼운 주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다른 주제 못지않게 중요한 사안입니다. 여러분, 쉼표 없는 악보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 여백 없는 수묵화(水墨畵)를 생각해 보십시오. 음악이 안 되고 그림이 안됩니다. 또 일주일 동안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몸도 마음도 배겨나질 못할 겁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창조 후에 하나님도 쉬셨고, 예수님도 사역 후엔 얼마간 쉬셨습니다. 물론 그 휴식시간은 사람들에 의해서 늘 방해 받았지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예수님이 왜 쉬라고 하셨는지 그 진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쉬는 것은 단순히 휴식의 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자신들이 행한 성공적인 일들을 예수님께 흥분하며 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1절 보니까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아마 제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얘들아! 이제 바야흐로 우리의 시대가 왔다. 앞으론 더 많은 사람들을 파송하기 위해 큰 훈련원과 사무실을 짓고, 우리의 조직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고, 이 일을 위해 더 많은 후원자들을 모집하도록 하자. 파이팅!”
그런데 예수님의 후속조치는 그게 아니라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는 거였습니다. 물론 그 동안 수고했으니까 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쉬는 동안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그 큰일들을 누가 했는가? “에헴! 내가 했다!” 하고 교만하고 들뜨기 보다는 차분히 쉬면서 “아하,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일들을 하셨구나!” 하고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들의 쉼은 영성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휴식이 필요한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면 참된 휴식이 무엇일까요?
1. 휴식은 열심히 일한 후에 누리는 축복입니다.
여러분, 언제 가장 찐하고도 달콤한 쉼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일을 열심히 한 다음에 오는 시간들입니다. 그러니까 늘 노는 사람들은 이런 시간들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선교여행 기간에 제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돌아와서 낱낱이 고할 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이제는 와서 쉬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는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실컷 쉬고 놀았으니 이제 와서 일 좀 해라.”
즉 제자들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휴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서 자기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한 후에야 우리의 휴식은 비로소 참된 휴식일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여러분들이여! 달콤한 휴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휴식은 한적한 곳에서 잠깐 쉬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1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오늘 이 말씀을 뒤집어 말하면, 복잡한 곳에서 필요 이상 오래 쉬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적한 곳이란 어디일까요? 문자 그대로 조용하고 쉬는데 방해 받지 않는 곳을 말하는 걸까요? 물론 그 뜻도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에는 사법고시나 큰 시험을 앞 둔 사람들이 아주 조용한 절간에 찾아가서 멸 달간 혹은 수년간 그곳에 틀어 박혀 공부를 하곤 합니다. 그들에게 가족 혹은 친구가 찾아가 말합니다. “이제 공부 좀 그만 하고 좀 쉬어라.”그들에게 있어서 쉰다고 하는 것은 다시 더 조용한 절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절간을 내려와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음식도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고, 찜질방에도 가고, 영화 구경도 하고, 세상 뉴스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쉰다고 하는 의미는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환경의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한 마디로 분위기를 좀 바꾸라는 얘깁니다. 그렇잖아요? 무조건 한적한 곳이라고 해서 휴식이 되고, 복잡한 곳이라고 해서 휴식이 안 되던가요? 그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한적한 곳이란, 우리의 생활리듬을 좀 창조적으로 바꿔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불어 ‘바캉스’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바칸테’에서 나온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변화’라는 말입니다. 그런 걸 보면, 정말 프랑스 사람들이 휴식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것 같습니다. 진짜 휴식은 변화를 주는 게 휴식이라는 겁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게 있어서 변화는 무엇입니까? 공부를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래야 능률이 오릅니다. 반면 늘 놀기만 하던 사람에게 휴식은 무엇입니까? 일하는 겁니다. 그게 휴식이에요.
똑같은 원리입니다. 정말 휴식을 취하고 싶으시면, 한가하고 바쁜 여부에 관계없이 분위기를 바꿔 보세요. 늘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습니까? 여기저기 좀 다녀 보세요. 그래야 인생의 활력이 생깁니다. 늘 여기저기 다녀서 피곤합니까? 방콕에 가셔서, 다른 말로 하면 집안에 틀어 박혀서 실컷 잠 좀 자세요. 그것이 휴식입니다. 즉 휴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휴식 시간은 너무 길면 안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푹 쉬어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잠깐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직장에서 사장님이 어떤 사원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너는 집에 가서 푹 쉬어라!”고 하시면 그것은 해고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너무 쉬는 시간이 길면 퍼지기 쉽고, 타락하기 쉽고, 죄 짓기 쉽습니다. 적당히 쉬어야 합니다.
3. 진정한 휴식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여야 합니다.
휴식을 취하되 그것조차도 주님을 떠난 휴식은 휴식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쉬십시오! 이게 오늘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라!’ 그러지 않고, ‘와라!’ 그러셨습니다. “와서 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가 뭐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무슨 심리적 부담감을 주시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야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너희들 역시 나를 떠나서는 참된 쉼이 없다는 얘깁니다.
아무리 호화롭고 잘 먹는 휴식일지라도 마음이 불편해 보십시오! 그것은 참된 휴식일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영혼은 내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 영역입니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인데 그 멍에를 풀고 참된 안식을 주실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난 휴양지나 해변이 우리의 쉼터가 아니라, 예수님의 그 넓고 큰 품이 우리의 쉼터라는 것입니다.
혹시 주님을 떠난 휴가를 가져 보십시오. 술 취하고, 죄 짓는 휴가를 가져 보십시오! 혹 잠깐 즐거울지 모르지만, 그 후유증 때문에 쉼 대신 피로가 엄습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휴식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 마디로 말하면 “참된 휴식은 바로 주 안에 있는 게 참된 휴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찬송 작가 쿠싱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 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예수님 없이는 인간에게는 참된 휴식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여러분, 이곳 외국 땅에서 참된 휴식을 갖기를 원합니까? 생활 가운데 열심히 일하고, 틈을 내서 잠깐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는 것뿐만 아니라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합니다. 그런 참 휴식은 우리에게 활력 즉 Re – Creation(재창조) 을 선물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름 휴가철, 방학 철을 맞아서 참된 안식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