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4:9-10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1)
지난 두 주일에도 사랑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그러나 혹시 이 자리에 "아, 목사님, 오늘도 또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시네! 혹시 목사님 설교 자료의 다양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목사가 된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설교를 했고, 많은 설교 자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여전히 가장 하기 힘든 설교는 사랑에 대한 설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는 너무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전달하기에 여전히 힘이 달리고 여전히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가장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터치하다가 그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가볍고 값싸게 전달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기가 좀 꺼려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 특별한 내용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특별한 지식이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도님들의 입맛에는 별로 맞지 않은 진부한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사님들의 꿈과 소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핵심이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확실히 체험하며, 그 사랑으로 세상을 품고 가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또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므로 조금이나마 여러분을 돕기를 원합니다. 위로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오늘은 사랑의 표현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랑의 표현법 5가지가 있습니다.
1.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해! 보고 싶어! 당신 없으면 못살아! 당신 없는 세상은 앙꼬 없는 찐빵이요, 불 꺼진 항구요, 김빠진 맥주(콜라)요....기타 등등등..." 적절한 사랑의 언어는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합니다. 행복하게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사랑의 감정을 노래에 담아 연인에게 들려주므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시대 때에는 이런 사랑의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입니다.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You have made my life complete,
and I love you so.
Love me tender,
love me true,
all my dreams fulfilled.
For my darlin' I love you,
and I always will....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누구나 듣기 좋은 말입니다. "사랑해! I love you!" 같이 한 번 따라서 해보십시다. "사랑해! I love you!" 옆에 분들에게도 해보십시다. "사랑해! I love you!" 이 말을 하면서 좀 쑥스러운 분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인 줄 알면서도 왜 이 말이 쉽게 안나옵니까. 아마 문화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안그러지만 옛날에는 한국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면 좀 경박하다고 생각하고 좀 체신머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한국의 제 또래의 남편 분들 중 부산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사랑해!'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무슨 말을 합니까? "밥 줘! 묵자! 자자!" 이렇게 평생 남편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아보지 못한 여성분들은 종종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 잘 빠집니다. 겨울 연가, 가을 동화, 여름 향기, 봄의 왈츠...
그리고 드라마 속에서 잘생긴 남성 배우의 '사랑해!'라는 말을 들으면서 대리만족을 느껴보려고 합니다. 이때 남편 분들은 아내의 그 심정을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회개해야 합니다. "아- 내가 아내에게 사랑의 고백을 제대로 못해주니까 아내가 사랑이 그리워서 그렇구나!"
그런데 이렇게 이해해주지 못하고 아내에게 도끼눈을 가지고, 쌍심지를 돋우고, "TV 꺼! 당장 끄지 못해! 집사가 되어가지고 그 모양이야! 기도나 해!" 이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요? "혼자 잘났어요, 정말!" 그리고 딴 방으로 가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합니다. "어휴, 내가 왜 저런 사람과 결혼을 해 가지고...."
그렇다고 제 설교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점은 사랑을 말로 잘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벙어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말로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자여!"(요삼1:2)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마12:18)
가끔 성도님들 가운데에서도 아가서를 읽고 오해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을 잘 모르는 불신자 중에는 아가서를 읽고 성경이 외설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한편으로는 왕이신 주님과 그의 신부인 우리 성도들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고로 남편에게 사랑의 고백을 듣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사랑의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기 보다는 아가서를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얻으면 어떻겠습니까?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귀한 사랑이 이렇게 감미롭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1:13-14, 16, 아2:8-10)
2. 선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귀한 선물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으므로 주님께 향한 자기의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선물을 받고 기뻐했습니다. 그 사랑에 힘을 얻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마음도 더욱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선물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그 향유가 값어치가 나가서가 아닙니다. 그 선물 속에 마리아의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선물에 담겨진 마리아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허비와 사치라고 오해했습니다.
물론 선물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세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유초등부 아이들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고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가끔은 물어 봅니다. "생일 선물로 뭐가 좋아?" "응... 포키몬 카드요, 인어 공주요, 축구공이요, 게임기요..." 어떤 때는 고르기가 힘이 들어 상품권을 사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하기는 어린 아이들이 교회에서 선물을 받음으로 '교회가 나에게 좋은 것을 주는 곳이구나! 아- 내가 어렸을 때 교회에서 선물을 받았는데! 아버지 집은 나를 사랑하는 곳이다.' 하는 추억이 새겨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들을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귀한 선물을 주시면서 자기의 사랑이 이렇다고 확증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귀한 선물을 주셨을까요?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 말에 별로 감동이 없습니다. 마치 어린이가 자기가 원하지 않은 선물을 받고 시큰둥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은 나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당장 직장을 선물로 원합니다. 당장 비자가 필요합니다. 당장 돈이 필요합니다. 나를 사랑하면 돈을 주고, 직장을 주고, 집을 주고, 차를 주고, 비자를 주시지 뭐하려고 내가 원치 않는 예수님을 주십니까? 누가 독생자를 달라고 했습니까? 괜히 독생자를 십자가에 잡아 죽이고 나서 왜 그리 생색을 냅니까? 독생자 주고 나니까 이제는 아까워서 그럽니까? 이제는 본전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입니까? 하- 참!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이 나와 관계가 없는 선물일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여인이 결혼하고 싶은 애인으로부터 생일선물을 받았습니다. 조그만 생일케이크입니다. 별로 맛도 없게 생겼습니다. 여인이 보니 선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냥 며칠 채 집안 구석에 두고 썩혔습니다.
그런데 그 케이크 안에는 '나와 결혼해 주세요.'라는 카드와 함께 값진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드가 들어있었어요. 그 카드에는 일(1) 다음에 동그라미가 열 개나 그려져 있었어요. 백억입니다. 좀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그 여인이 그것도 모르고 며칠 후에 케이크를 보니 곰팡이가 났어요.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아이고, 억울해라!
며칠 전 제 아내가 생일이라서 세이프웨이(Safeway) 꽃집에서 장미를 사다가 주었습니다. 안개꽃도 섞여있어서 보기가 좋았습니다. 19불 99센트입니다. 제 아내가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런데 장미를 보더니 하나, 둘, 셋... 하고 장미 숫자를 세어보는 것입니다. 장미가 자기 나이 숫자하고 맞나 하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맞았을까요, 틀렸을까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49세인데 저는 장미를 18개를 주었습니다. 31개가 모자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저희 집 사람이 장미 안쪽을 자꾸 살피는 것입니다. 저는 '아- 장미 향내를 냄새 맡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그 장미 안에 무슨 봉투가 들어 있나 하고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어- 왜 100불이 없지!' 하고 나를 쳐다봅니다. 없는 것도 유심히 살펴봄으로 결국 100불을 만들어 드셨습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독생자 예수님이라는 귀한 선물의 의미를 유심히 살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선물의 의미를 알면 너도 나도 예수님을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26살 때에 체험했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후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좋은 직장도 달라고 했습니다. 결혼할 좋은 색시감도 달라고 했습니다. 장래의 앞길을 인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저것을 다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다 주었느니라. 알파와 오메가를 주었느니라. 선물도 주었느니라."
여러분, 아시다시피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입니다.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합니다.(계22:13)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시므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신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왜 하나님은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주시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단지 이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오늘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를, 우리를 이토록 그토록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음성을 오늘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려보면서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이토록 그토록 사랑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