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신앙

날짜: 
2012/02/26
설교: 

고후4:7-10 오뚝이 신앙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세상의 직업이나 학벌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너도 사장님 할 수 있고 나도 사장님 할 수 있습니다. 너도 대학교 나올 수 있고 나도 대학교 나올 수 있습니다. 얼굴의 외모나 신체적 모습에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너도 빠글빠글 파마할 수 있고 나도 빠글빠글 파마할 수 있습니다. 너도 좋은 양복입고 나도 좋은 양복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이나 마음 씀씀이는 어떨까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좀 다르지만 제가 냉정하게 보기에는 이것 역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너도 죄성을 가지고 있고 나도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죄성이 예수님을 믿어서 좀 없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화내고 시기 질투합니다.
한 처녀가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신 분입니다. 교인들이 주위에서 말합니다. “여기 괜찮은 신랑감이 있으니 잘 골라봐요.” 그 자매는 교회의 분위기가 처음에는 어색했습니다. 특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믿음의 형제님들을 만나서 믿음의 대화를 하는 것이 더욱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형제님이 자기에게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우리 믿음 안에서 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을까요?” 그 자매님은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 형제님을 만나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되었습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기의 믿음이 없는 말투나 행동이 상대방 형제님에게 실망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말도 참 조심스럽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좀 사귀어 보니 실망한 쪽은 형제님이 아니라 도리어 자매님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형제님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화도 잘 내고, 삐치기도 잘하고, 마음도 그리 넓지 않았습니다. 믿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에 나와서 그 형제님을 대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그 자매님을 한 집사님이 우연히 길에서 만났습니다. “아- 요즘 왜 교회 안 나와요?” “예... 무슨 일이 좀 있어서요.”
여러분, 사람을 보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거기서 거기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반드시 실족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가 그 질그릇을 결정합니다.
그 질그릇 안에 쓰레기가 들어가 있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질그릇 안에 밥이 들어가면 밥통이요, 간장이 들어가면 간장 통이요, 김치가 들어가면 김치 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질그릇이 보잘 것 없어도 보석이 들어가 있으면 그 질그릇은 보석함이 됩니다.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배 되신 예수님을 모신 사람에게는 세상 살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1.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바둑을 두는 요령 중에 하나는 상대방을 포위해서 죽이는 겁니다. 저는 바둑이 12급 정도 됩니다. 하수입니다. 그런데 하수인 저가 고수를 포위해서 죽이려고 할 때에 늘 겪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상대방을 포위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오히려 그 포위망은 뻥 뚫리고 나는 지리멸렬하다가 처참하게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완전한 인간이 어찌 완전한 하나님을 포위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자가 어찌 큰 자를 포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분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을 포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성경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 나라 군대가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을 밤새 포위했습니다. 아침 일찍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 보니 적군이 성을 포위했습니다. 사환이 엘리사에게 달려가 황급히 말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우리가 적군에게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러나 사환은 계속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엘리사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그 사환의 눈을 여셨습니다. 그 사환이 보니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결국 엘리사를 포위한 아람 군대는 도리어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많은 문제에 둘러싸일 때가 있습니다. 많은 적이 우리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면 문제의 포위망은 뚫어집니다. 고수인 주님은 어떤 문제의 포위망도 쉽게 뚫을 수 있는 희한한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이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2.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를 보면 답답하고, 자녀를 보면 답답하고, 자신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를 보면 답답합니다. 더구나 탈출구 발견하기가 힘든 이 외국 땅에서 당하는 답답함은 더욱 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답답할 때 종종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어디론지 멀리 떠나고 싶다! 탈출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은 쉽게 탈출할 수도 없습니다. 직장은 계속 다녀야 하고, 사업은 계속 오픈해야 합니다. 자녀도 가정도 돌봐야 합니다. 학생의 경우 학교도 다녀야 합니다. 시험공부도 해야 합니다. 탈출할 만큼 충분한 돈도 없고 환경도 안 됩니다. 이렇게 탈출구가 없을 때 사람은 자칫 비정상적인 돌발행동을 하기 싶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보배 되신 주님이 확실히 자리 잡고 있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 보배 되신 주님은 내가 답답한 일을 당할 때 탈출구가 됩니다. 구원자가 됩니다.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상담자가 됩니다. 혹시 지금 답답한 일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자신의 그 답답한 일을 토로하면 좋겠는데 토로할 상대가 없습니까?
내 안에 계신 보배 되신 주님께 자기의 답답함을 솔직히 토로하십시오. 처음부처 끝까지 모든 상황을 일일이 다 주님께 아뢰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래, 내가 네 마음 다 안다. 조금만 더 참아봐라. 내가 너를 반드시 도와주마. 이제 잠시 후면 너의 그 답답함이 상쾌함으로 바뀔 것이다.”
여러분, 답답한 일을 당할 때 그냥 있으면 안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과 빨리 대화의 통로를 열어야 합니다. 그 분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120: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국 땅에서의 삶이 좋을 때에는 좋지만 답답한 일을 당할 때면, 환난이나 문제가 생길 때면 더욱 힘이 들고 낙심이 됩니다. 탈출구를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항상 문제의 탈출구가 되신 주님이 있다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과 늘 기도로 대화를 하면서 위로를 받고, 주님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그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3.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캐나다에 살면서 예수님 믿는다고 핍박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종종 배우자에게 구박을 받을 수 있고,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을 수 있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인생 살 맛 안 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내 존재가 버림을 당하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입니다.
가끔 보면 크리스천들이 직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고 세상적으로 노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럽니까? 그렇게 술 마시고 노는 것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보다 여전히 더욱 즐겁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탕의 자리가 크리스천으로 양심의 가책이 되고, 그리 즐겁지 않은데도 그 자리에 어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그렇게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들과 격리가 되고, 그들에게 버림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택하자니 세상 친구가 나를 버릴 것 같고, 세상 친구를 택하자니 예수님이 거리낍니다. 이렇게 중간에서 머뭇거리면서 믿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입니다. 하루 빨리 결정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여러분, 믿는 자가 세상을 빨리 버리지 않으면 그는 세상에게 조롱을 당하면서 인생을 굴욕적으로 살게 됩니다. 세상에게 조롱을 당하고 차이기 전에 크리스천에게 어울리지 않는 세상을 빨리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합니다. 혹시 세상에게 버림을 당하고, 친구와 애인에게 버림을 당하고, 부모나 자녀에게 버림을 당하여 외롭지는 않습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친구와 애인이 잔인하게 나를 버릴지라도, 부모와 자녀가 냉정하게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있고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결코 버림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서도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을 결코 욕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나를 버릴지라도, 세상은 나를 향하여 너는 가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너를 얻기 위해 나의 목숨을 버리노라.”
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마귀는 24시간 끊임없이 우리를 쓰러트리려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종종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도 없이 많이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또 넘어져도 또 일어날 겁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여러분, 넘어졌다고, 실패했다고, 낙제했다고 그리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오뚝이입니다. 오뚝이 안에는 쓰러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추가 있습니다. 만 번을 넘어지고 만 번을 쓰러져도 계속 일어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안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나는 못 일어나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쓰러졌다고 “나는 망했다. 나는 죽겠다. 나는 바보, 나는 못난이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섯 가지 환난이 한꺼번에 다가올지라도 주님은 나를 구원하십시다. 일곱 가지 환난이 다가올지라도 그 재앙이 내게 미치지 않습니다.(욥5:19)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자’입니다.
고로 보배 되신 예수님만 우리 안에 있으면 우겨쌈을 당해도 우리는 싸이지 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트림을 당해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힘으로 오뚝이처럼 또 다시 일어남으로 승리의 깃발을 날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