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감동

날짜: 
2012/05/20
설교: 

고전2:9-14 성령의 감동
꿈 이야기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꿈을 하도 자주 꿔서 형들로부터 '꿈쟁이'라고 놀림을 받던 요셉의 꿈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형님들, 내가 신기한 꿈을 꾸었는데 좀 들어보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묵고 있었는데 내 단은 딱 일어서 있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내 단을 향하여 꾸벅 절을 하더이다." 형들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말합니다. "뭬야? 네가 정말 우리의 왕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그런데 얼마 후 요셉이 또 다시 꿈을 꾸고 형들과 아버지에게 자랑을 합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꾸벅 절하더이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것을 보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요셉을 꾸짖으며 말합니다. "이놈,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형제들이 참으로 너에게 엎드려 절을 하겠느냐?" 그러면서도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은 그러한 요셉의 꿈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꿈을 꾼 요셉에게 처한 환경은 오히려 정반대로 풀리게 되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인신매매를 당하여 애급에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급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비록 노예지만 보디발 장군의 신임을 얻어 가정총무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요셉을 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그 유혹을 뿌리치다가 그만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누명을 뒤집어쓰고 심히 얻어맞고 옥에 갇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옥에서 지내는 동안 왕의 신하인 술 장관과 떡 장관이 죄를 지어서 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같은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쟁이인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해주었습니다. 그 꿈과 해석대로 떡 장관은 죽임을 당하고, 술 장관은 자기의 지위를 회복했습니다. 그러고 또 세월이 흘러서 이번에는 애급의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나일 강 하수가에 일곱 암소가 보였습니다. 살이 통통하게 찌고 아주 아름다운 암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삐쩍 마르고 흉악한 일곱 암소가 나타나더니 먼저 나타난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습니다. 그리고 애급 왕이 잠시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잠을 잤는데 또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충실하고 아름다운 일곱 이삭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아주 삐쩍 마른 일곱 이삭이 나타나더니 먼저 나타난 충실한 일곱 이삭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이러한 꿈을 꾸고 나서 애급 왕이 모든 신하들을 소집했습니다. "누가 이 꿈을 해석할 자가 없느냐?"
왕의 신하들 중에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술장관이 옛날 자기가 옥에 있을 때 요셉이 자기의 꿈을 해석해준 것이 생각나서 요셉을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왕에게 불려 나와 그 꿈을 해석합니다. "왕이여, 왕이 두 번 연달아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의 내용은 하나입니다. 이 꿈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의 하실 일을 왕에게 보이시려는 겁니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온 애급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급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급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급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급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바로 왕과 신하들이 요셉이 거침없이 그 꿈을 해석하고 그 처방까지 내놓는 것을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왕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내가 너로 애급 온 땅을 치리하는 총리로 삼노라." 할렐루야!
이때 요셉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버려라.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가사가 좋아서 좀 더 소개하겠습니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송대관 씨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분의 간증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친한 가수 태진아 씨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그 분의 간증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언제 시간이 되시면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을 처음 믿는 분들은 목사님들의 딱딱한 설교보다 이런 간증이 아마 더 재미있을 겁니다.
자- 옆으로 좀 샜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왕이 요셉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영)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즉 요셉이 꿈을 꾼 것은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꿈을 꾸고,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그 꿈들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시 애급(오늘날의 이집트)은 최대 강대국이었습니다. 그 강대국의 신하들을 중에는 학식에 뛰어난 박사들을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그 꿈을 해석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능으로 안됩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코드가 맞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전에 꾼 꿈들도 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되어서 꾼 꿈들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신인 성령에 감동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왕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냥 옥에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고, 하나님의 신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말세에는 하나님이 이러한 성령의 꿈과 감동을 우리들에게 부어주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들도 요셉과 같이 성령의 감동된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사도행전 2:17-18에 있습니다.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여러분,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감동을 받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합니다. 감동은 자신의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혹시 인생 살 맛이 없습니까? 인생사는 것이 재미가 없고 따분합니까? 그냥 만날 그것이 그거고 지루합니까? 감동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감동 찾지 마세요. 예를 들면 봄이 되었습니다. 봄바람이 살살 불어옵니다. 날씨가 참으로 화창하고 좋습니다. 만물이 푸르러갑니다. 추운 겨울 동안 움츠려들었던 마음과 몸이 녹습니다. 그 따스하고 포근한 봄바람에 감동이 되어 가족들과 같이 공원을 찾아 나섭니다. 그곳에서 손을 들고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그런데 그렇게 공원에 간 날이 '아뿔싸!' 주일 아침입니다. 즉 주일 예배를 빼먹고 나들이를 간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세상에서 감동을 받는 것,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그리 추천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어떤 분은 주일 날 교회에 안오고 골프장에서 "주 하나님 지은신 모든 세계..." 하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도 추천할 것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주일 날 교회는 안오고 텔레비전에서 앞에서 운동 경기 중계를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리며 감동을 받는 것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적극 추천합니다. 만약 예배 때에 감동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만약 예배 때에 감동을 받지 못하면 신앙의 힘을 잃고 맙니다. 자기도 예배 때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데 누구를 전도해서 누구를 예배에 데리고 올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성공 요인은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분은 예배를 드릴 때에 드럼을 두드리고 복음성가를 불러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분은 조용히 거룩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한 분들 중에는 때때로 주일 예배 때에 복음성가를 부르면 타락했다고까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각자의 취향과 성격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가 꼭 옳거나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가장 먼저 앉아서 기도부터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합니까? 간단하지만 이런 기도합니다. "주님, 저 왔어요."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주님께 나의 마음을 솔직히 아뢰고, 주님의 마음을 캐치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결단합니다. 그리고 또 다음 주일에 교회에 오면 앉아서 또 기도합니다. "주님, 저 또 왔어요. 이번 주는 어떻게 어떻게 지냈는데 제가 이런 잘못, 저런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또 주님의 마음, 주님의 능력을 입혀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나 감동이 없으면 이때는 예배가 참으로 답답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순서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목사를 설교자로 모시고, 똑같은 찬양대, 똑같은 반주자,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예배를 몇 년간 혹은 평생 드린다는 것은 보통 따분하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 "나는 순례자..." 하고 돌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추천할 것이 못됩니다.
즉 신앙생활의 성공을 위해서는 예배 때에 감동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요? 주일 예배 시간이 길지 않기에 바로 말씀 드립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수천 년간 똑같은 내용으로 계속 내려온 책입니다. 보통의 책들은 다음 판을 내놓을 때에 시대나 상황에 맞게 개정판을 내놓습니다. 전혀 새로운 내용도 첨부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책은 구닥다리가 되고 책이 안팔립니다.
그러나 성경책은 번역본의 차이가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저의 경우 세상의 책은 한번 읽으면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습니다. 아주 좋은 책인 경우, 다시 한 번 혹은 두 번 더 읽게 됩니다. 그리고 책장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경우는 다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한 베스트셀러입니다. 아니, 영원토록 계속해서 베스트셀러이기에 아예 베스트셀러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한 번 읽고 나서 책장에 집어넣고 마는 책이 아니라 늘 내 옆에 두고 읽고 또 읽습니다. 묵상하고 또 묵상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왜 이렇게 세상 책과 성경이 차이가 납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디모데후서 3:16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2:20-21)
즉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세대인 젊은 사람들에게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를 뒤지다가 어떤 좋은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다운로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료를 열려고 하는데 소프트웨어가 없습니다. 읽기가 안됩니다. 보기가 안됩니다. 듣기가 안됩니다. 답답합니다. 좋은 자료지만 감상할 수가 없습니다. 감동이요?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캐치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영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그렇다고 성령이 인격이 없는 도구는 아님)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성경을 읽으면서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요, 딱딱한 것은 표지요, 잠이 안 올 때에는 수면제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9-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동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활력이 생깁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교회 오는 것이 재미있고, 예배드리는 것이 재미있어집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주님의 일도 재미있고 보람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하나님이 이전에 나에게 주신 은혜, 앞으로 나에게 주실 은혜가 깨달아지며 감사와 기쁨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법칙을 세웠습니다. 고린도전서 2:4-5 말씀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결론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살기 좋은 캐나다 땅이라고 하지만 늘 일상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똑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주일이면 늘 똑같은 교회에 와서 똑같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성령을 받고 늘 성령의 감동 속에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
민27:16-20 성령의 감동(2)
모세의 죽음이 가까웠습니다. 그의 후계자를 세워야 합니다. 어떤 후계자를 세워야 할까요? 오늘 분문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러한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모세 옆에서 수종들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직접 뽑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뽑은 이유가 무엇이냐?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즉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를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자격으로 여러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지도자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습니까? 힘으로 능으로 안되고 하나님의 신 즉 성령으로 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구약에 보면 사사들이 나옵니다. '사사'라는 뜻은 지도자, 판결자라는 뜻입니다. 누가 지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판단을 합니까? 구약에 보면 이런 구절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삿14:6) "여호와의 신이 옷니엘에게 임하셨으므로"(삿3:10)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삿6:34)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삿11:29)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삿14:6)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3) "때에 성신이 삼십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대상12:18)
즉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되어야 지도자가 됩니다. 제가 주의 종이 되어서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유도 신학교 졸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 성령을 받고 성령에 감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우리들에게 전해줄 때에도 이런 표현을 씁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비단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성경은 쓰일 수 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2:20-21)
예수님이 탄생되어서 그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가 구세주인 것을 즉각 알아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보고 구세주인 것을 알았을까요?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2:25-32)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가장 잘합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뭘 모르는 말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중에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렇게 요청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2:9)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려고 하니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군인으로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고로 너가 성전을 세우지 말고 네 아들이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도록 하라." 그래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자재들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재들만 모은 것이 아니라 성전의 모습을 그린 설계도까지 전해주었습니다. 성전의 설계도를 누가 주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 곧 여호와의 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식양을 주고"(대상28:12)
하나님도 천지창조를 하실 때에 성령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창세기 1:1-3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구약시대에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었던 성령을 미천한 남종과 여종들에게까지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지만 성령은 모르고 지내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