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날짜: 
2012/07/09
설교: 

고전9:18-27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40대 중반의 여자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분이 복부 쪽에 통증이 있어서 진찰을 받았는데 자궁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당분간 가족들한테는 알리지 않기로 하고 혼자 항암치료를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원자력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가보니까 그 병원의 환자들 대부분이 자기와 같은 암환자인 겁니다.
거기서 그분이 발견한 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암환자가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과 또 하나는 같은 암이라도 자기는 다른 사람의 증세에 비하면 병도 아니구나, 하는 거였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간 첫날 치료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떤 환자가 자기를 좀 도와 줄 수 있냐고 묻더랍니다. 보니까 뭐 어렵지도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은 거라 도와줬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까 중증 환자인데도 보호자가 없는 사람이 꽤 되더랍니다.
그날 그 교수님이 병원 문을 나서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 온 삶을 한 번 되돌아보게 됐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여태껏 자기는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왔지 남을 위해 봉사를 해 본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암에 걸려서 죽을 지도 모르는 순간이 되니까 웬일인지 문득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조그만 거라도 하다가 죽는 게 보람 있겠다 싶은 마음이 생기더랍니다.
그래서 마음먹은 것이, 병원에 가는 날마다 자기 치료가 끝나면, 오늘처럼 보호자가 없는 환자들 수발을 들어 주기로 했답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병원 가는 날이 돼서 갔는데,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우연히 전에 도움을 줬던 환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보니까 당장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 자기 치료는 뒤로 미루고 그 사람 일을 먼저 도와줬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같은 병실의 또 다른 환자를 도와줘야 할 형편이더랍니다. 어차피 마음먹은 거니까 한 사람 더 도와줘야겠다 싶었는데, 그때로부터 다른 환자들에게도 꼬리를 물고 도움 요청이 들어오더랍니다. 그래서 화장실도 데려다 주고, 목욕탕도 데려다 주고, 가족들한테 전화도 걸어주고 서류도 작성해 주고 하다 보니까 자기 치료받을 시간을 놓쳤습니다.
세 번째 병원에 갔던 날은 더 기가 막힌 일이 생겼습니다. 전에 그 분이 병원 안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봤던 청소부 아줌마가 자원 봉사자로 착각하고 쓰레기더미 치우는 일을 도와 달라고 하더랍니다. 기가 막혔지만 너무나 당당하게 도와 달라고 하니까 또 거절을 못하겠더랍니다. 얼마간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환자가 자기를 보더니 반색을 하면서 자기 병실 쪽을 보면서 소리치더래요. "어! 그 아줌마 왔어!"
그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환자들이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청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날도 치료를 못 받았답니다. 그리고 어떤 환자는 그 분한테 도움 예약까지 하더랍니다. 이상한 것은 그때부터 간호사들도 그 분을 공인된 자원봉사자로 알고 막 부리더라는 겁니다. 평소 자기를 생각하면 그런 모든 상황이 너무 기분이 나빠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삶의 의욕이 막 생기더랍니다. 해서 그때로부터 강의가 없는 화, 목, 토요일은 병원에 가서 아예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주치의한테 호출이 와서 병원에 갔답니다. 이상한 건, 그날은 의사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병실이 아니라 어떤 세미나 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랍니다. 문을 여니까 주치의 외에도 인턴, 레지던트로 보이는 젊은 의사가 한 20명 정도 모여 있더랍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너무나 정중하게 맞이하기에 놀랬답니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그 주치의가 사실을 얘기하더랍니다.
MRI 와 CT 필름 등 여러 가지 자료를 보여 주면서 그분의 병에 대해 브리핑을 하는데 요지가 뭐냐 하면, 자기들이 내린 진단이 명백한 오진(誤診)이라는 겁니다. 암이 아니라 암으로 착각하기 쉬운 염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례를 놓고 의사들끼리 공부를 했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말자고요. 황당했겠지요? 그 일을 두고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끔 오진도 쓸모가 있군요." 그 교수님은 그 뒤로도 계속 병원의 자원봉사 일을 했답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데가 있으면 그때부터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더욱이 그 일이 기쁘면 그건 사명이 되고 거기에 열정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의 삶은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이런 사명으로 사시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씀 드리면 어떻게 하면 한 번 밖에 없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나 자신도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은 사명에서 비롯됩니다. 어머니들이 강한 이유는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 사명감이 있어서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아이는 내가 책임지고 내가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강한 겁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 사명자로서 초지일관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20:24을 보면 사도 바울 자신이 자기의 인생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그렇게 사명에 목숨을 거니까 지칠 리가 없고, 의욕이 사라질 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명이 있습니까? 사명에 목숨 거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지엽적인 문제들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사명이 강하면 햇볕에 눈 녹는 것처럼 삶의 자질구레한 문제는 사명에 다 녹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사명의 불로 삶의 모든 문제를 녹이십시오!
오늘 우리는 평생을 복음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온 사도 바울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사명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 사명의 내용은 다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나 개인으로서는 거룩한 사람으로 점점 성화되어 가는 것이고, 세상을 향해서는 우리로 인해 복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고 그렇게 살아야만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그 구체적 내용을 간략하게 알아보길 원합니다.
1. 사명자는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19절부터 23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종이 되었다,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율법 아래의 사람이 되었다, 약하지 않지만 약한 자가 되었다. 그런 식의 고백을 쭉 나열하고 있는데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과 같은 위치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가 뭡니까? 망할까 봐, 손해 볼까 봐, 쓰러질까 봐 두려운 겁니다. 그런데 희생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려면 젊어서부터 가장 먼저 희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야 두려움 없이 의욕적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암 병동에서 나온 자료들이 그런 것을 잘 입증해 줍니다. 여러분! 암 환자들이 왜 죽는지 아세요? 암 자체가 직접적인 요인이 되어 죽는 경우도 있지만, 실지는 암이 걸리면 입맛이 없어지고, 입맛이 없으니까 밥을 잘 안 먹잖아요? 그래서 직접적인 사인은 영양실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는 두려움 때문에 죽는답니다.
어떤 의사가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이 사는 동네로 의료선교를 갔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왔는데 위암이더랍니다. 그런데 그 암덩어리가 얼마나 큰지 암이 살을 뚫고 나왔더랍니다. 그 의사도 그런 걸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됐냐고 물어봤더니 20년 됐다는 겁니다. 암이 20년 됐으면 당연히 죽었어야 되는데 왜 안 죽었냐? 몰라서 안 죽었다는 겁니다.
대개들 암에 걸리면 "내가 죽지! 나는 곧 죽을 거야!"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암인 줄 모르니까 두려움도 안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사는 거지요. 즉 두려움이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희생은 스스로 최악의 상황까지 가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한테 두려움이 있을 리 있겠어요? 부모들도 아이들 담력 기른다고 번지점프 시킬 게 아니라 희생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장 바닥까지 내려가는 희생을 가르쳐야 비로소 두려움이 사라지는 겁니다.
희생을 굉장한 것으로 생각지 말고 한 번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세요. 남들이 다 차려 놓은 잔칫상에 와서 밥만 먹지 말고 미리 와서 준비해 주는 사람이 되어 보세요. 예배가 끝나면 먼저 가지 말고, 마지막으로 남아서 뒷정리까지 하고 가는 사람이 되어 보세요. 바쁘고 힘들더라도 바보같이 모든 모임에 다 참석해 보세요. 요령 없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이고, 시간 많아 보이더라도 한 번 스스로 바닥까지 내려와 보세요.
희생은 그야말로 희생하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기쁘고, 보람 있고, 의미 있고, 사는 것 같은 삶을 줍니다. 할 수 있는 데로 바닥까지 내려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또 경험하는 것이, 상처받은 자로서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 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내 아픔과 내 희생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낫게 하는 기적까지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괜히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희생하게 되면 그 만큼 내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성경을 귀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삶 속에서, 영혼으로 보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일 가운데 언제나 희생이 습관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명자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상 받기 위해 죽어라고 뛰라. 즉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옛날에 아베베라는 유명한 맨발의 마라토너가 있는데 대회가 있을 때마다 일등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무슨 올림픽인지에서 일등으로 골인을 하고는 텀블링을 하면서 "나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때부터 그 목사님은 그 마라토너를 싫어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마라톤이라는 경기가 왜 생겼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죽어라 뛰어 와서 소식 전하고 죽은 것,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생긴 겁니다. 그러기에 원래는 마라톤 경기를 하다가 골인 하면 탈진돼서 죽어야 되잖아요? 아니면 거의 실신해야 최선을 다 한 거고, 그래야 그게 진짜 마라톤 정신이잖아요?
그런데 마라톤을 하고 나서도 힘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선수가 싫어지더랍니다. 좀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100m 단거리를 뛰던지, 마라톤을 뛰던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하여 뛰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예배가 끝나고 다들 집에 돌아간 후에 예배실을 돌아보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주보가 널려져 있고, 컵도 두 세 개가고이 모셔져 있고, 쓰레기가 어질러 있고... "여기 누가 앉았었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두고 간 것들 위에다 이름을 써 가지고 그 다음 주일날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마음이 이러면 됩니까? 예배드리고 난 후 버려진 쓰레기는 누가 치워야 합니까?
아주 사소한 거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그게 제대로 된 주일성수입니다. 예배도 미리부터 와서 준비하며 최선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고, 식사 시간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니까 최선을 다하여 식사하고, 식사를 마치고 당번을 정하여 설거지도 청소도 하고, 이것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작은 부분부터 습관이 되어야지, 그게 안 되면 큰일에 최선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교회 처음 나오시는 분들에게는 예배만 드리고 가는 것도 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교회에서 밥을 먹고 가는 것은 불편하기도 하고, 더욱이 내 집안, 내 방 청소도 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를 청소한다는 것은 왠지 쑥스럽습니다. 위선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주일 예배만 드리고 쏜살같이 도망가겠습니까?
이전에 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청년이 되어 성령을 받기 전까지 교회는 그냥 주일 아침만 가면 모든 의무를 다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친구 만나서 같이 놀고 같이 밥 먹는 것이 좋지, 교회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혹은 그리 친하지 않는 사람과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것이 영 불편했습니다. 말도 조심스럽게 해야 되고, 행동도 조심해야 되고... 어쩐지 내 자유가 속박이 되는 것 같고 싫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후 하루는 성령님이 제게 감동을 줍니다. "오늘은 주일은 예배만 마치고 집에 돌아오지 말고 교회에 끝까지 남아 있어라." 그래서 "아멘!" 하고 실천을 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청년 모임도 들어가고, 성전에 왔다 갔다 하면서 휴지도 줍고, 봉사자들에게 주는 저녁 국수도 얻어먹고, 주일 저녁 예배도 드리고, 사찰 집사님이 교회 문을 잠그기까지 남아서 기도도 하고, 그렇게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늦게 돌아왔습니다.
몸이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잘했다! 너 앞으로 주일에는 계속 그렇게 해라. 네가 주일날 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을 내가 나중에 계산해서 축복으로 갚아주겠다." 할렐루야! 직장에서나, 배움의 터전에서나 어디에서든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습니다. 아무쪼록 사소한 일부터 최선을 다하는 중에 그날의 면류관과 함께, 내일의 축복에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명자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5-27절의 말씀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가 가치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 절제 안 하고 이룰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할 수 있지만 그 할 수 있는 일을 유보하는 게 절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런 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이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상이 오히려 자기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게 상이라는 겁니다. 우리들은 각자 당연히 누리고 써도 되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리를 쓰지 않는 게, 그 권리를 잠시 보류하는 게 절제고 그게 바로 우리들의 상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는 진짜 사명자라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초신자는 초신자대로 기존 교인은 기존 교인대로 권리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100% 누리는 사람이 있고, 혹은 자신의 권리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려는 욕심의 사람이 있고, 자기의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런 권리를 유보하고, 참고, 쳐서 복종하는 게 바로 절제입니다. 절제가 없다면 사람은 끝없는 욕망과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결과는 불평과 원망이며, 종국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사명자의 삶이 후회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으로, 아내로, 자녀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직장에서도 각자의 지위에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교회에서도 사명을 감당합니다. 자신이 속한 그 분야, 그 일, 그 곳에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사명자는 희생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절제합니다. 아무쪼록 후회 없는 삶을 사시는 진정한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