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앙은?

날짜: 
2012/07/16
설교: 

마16:24-25 진짜 신앙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6장은 시간대별로 보면 예수님 생애의 끝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오늘 사건 이후로는 그 어떤 기적도 일으키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자들에게 참 신앙이란 뭔지, 진짜 제자란 어떤 모습인지 등등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내면적인 태도와 자세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진짜 신앙인으로서 참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세 가지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첫째는 자기부인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셋째는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세 요건은 하나 하나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첫째 조건을 갖춘 후에, 그 위에 둘째 조건이 얹혀야 하고, 그 위에 다시 셋째 조건이 더해져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
1.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 이란 종교학자들이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구분할 때 분기점으로 삼는 요소입니다. 굿이나 점치는 것도 굳이 종교로 본다면 거기엔 무슨 자기부정이나 희생이란 게 없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들은 단지 복을 추구하고, 재앙을 피하려고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다릅니다. 자기 부인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종교입니다. 물론 주님은 신앙의 연조나 환경에 따라 각자에게 요구하시는 자기 부인의 분량이 다 다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서든 신앙이 타락했다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자기 부인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일이 집단적으로 일어날 때, 그 사회가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성직자들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원래 성직자란 자기 부인의 자리이고 희생하는 자리입니다. 제대로 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식을 깨고 성직자가 되길 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자리가 자기희생이 없어지고 뭔가 권력이 되는 좋은 자리가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고려 말에 스님들이 대폭 늘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는 어느 한 때 전 국민의 70%가 승려였던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자리가 자기 부인의 자리가 아니고 오히려 권력이 있고 머무르기에 좋은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분명히 타락한 사회입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830년 당시 프랑스 청년들이 가장 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붉은 옷을 입게 되든가, 검은 옷을 입게 되든가 이었습니다.
붉은 옷이란 가톨릭 사제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왜 청년들이 결혼도 못하는 신부가 되기를 그렇게 열망했을까요? 신부가 되면 그 자체가 권력이 되었던 까닭입니다. 또 검은 옷이란 판사가 입는 법복이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사람들 위에서 판결을 내리는 자리는 그야말로 군림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엘리트 귀족들은 모두들 빨간색이나 검은색이 되기를 원하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사회 전체가 썩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스탕달은 가장 신성해야 할 두 기관, 즉 교회와 법기관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기, 어느 세대든 믿는 사람들의 자기 부인과 자기희생은 그 사회의 청정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그렇다면 자기 부인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 바로 전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 우리는 자기를 부정한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열정이 있었고 감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 바로 다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셨습니다. 한 마디로 열심이나 의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쓰임 받는 것을 보면 대략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능력이고 또 하나는 의욕입니다.
이 두 면을 각각 한 축으로 잡으면 네 개의 조합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의욕도 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둘째, 능력은 있는데 의욕이 없습니다. 셋째, 의욕은 있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넷째, 의욕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네 경우 가운데 어떤 사람을 쓰겠습니까? 물론 의욕과 능력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을 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마도 히틀러 같은 독재자는 능력은 있지만 의욕이 없는 사람을 선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말을 잘 들을 테니까요. 또 범죄를 획책하는 사람들은 의욕은 있지만 능력 없는 사람을 쓰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 하실까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밝히신 대로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들어 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의욕과 능력이란 차원에서 하나님은 어떤 타입을 원하실까요?
의외로 하나님은 능력과 의욕이 다 없는 사람을 쓰십니다. 사실 의욕과 능력이 다 없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 최악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번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뇌리에 베드로는 ‘수제자 베드로’ ‘사도들의 리더 베드로’ 그렇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보기 드문 무능력자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수고해도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적인 있습니다. 그런데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어부라면 그 정도는 수영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어린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철저히 실망해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고 의욕마저도 완전히 상실했을 때에 주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를 사명자로 세워줍니다. 즉 그가 능력도 없어지고 의욕도 떨어져 마치 죽은 자가 같을 때에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라고 하는 교만이 없어져서 주님께 겸손해지고 순종하는 마음을 갖출 때 주님이 들어 사용하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공주의 아들로 권력이 있고, 학식이 있고, 재물이 있고, 힘이 있고, 의욕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때가 가장 쓰임 받기 좋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노인이 되어 권력도 없고, 지식도 잊어버리고, 기력도 없어지고, 의욕도 없어서 마치 죽은 것과 같을 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그를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짜 신앙인이 되는 것은 내가 뭘 가지고, 내가 뭘 해야겠다는 교만이 깨어진 때부터입니다. “내가 노래를 좀 하지, 내가 연주를 좀 하지, 내가 설교를 좀 하지, 내가 행정은 좀 탁월하지, 내가 달란트가 있지, 내가 돈은 좀 있지!” 이런 마음이 있으면 주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을 주님은 쓰십니다. 또한 진짜 신앙의 조건은 :
2.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에게만 지워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각자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란 주님을 위해 겪는 고통과 아픔을 말합니다. 아무데나 십자가라고 붙여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실수와 게으름 또는 판단착오 때문에 지워진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다 보면 세상 짐은 어느새 그 십자가를 감당하는 가운데 흔적도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교회에 한 집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개척 때부터 이십년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 동안 교회가 자리를 못 잡는 겁니다. 교인들도 다 떠나서 이제는 자기 부부 외에 몇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설교도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게 하고, 그렇다고 꼼꼼하게 일을 챙기시는 행정력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목사님입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교회 일은 그 집사님 부부가 다하고 지냈습니다.
아내 집사님은 반주와 교사를 이십 년 동안 하고 있고, 남편 집사님은 재정부장을 이십 년 동안 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이나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을 했는데도 그러질 못했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부흥이 되어야 교회 다니는 것도 재미있을 텐데... 그런데도 그 집사님 부부는 아직도 그 교회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부가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이게 우리가 세상에서 져야 될 십자가라면 피하지 맙시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놀라운 건, 그 부부가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 그 가정은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다른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들이 그 가정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녀문제, 부부문제, 건강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이런 일들을 겪지 않고 지내왔다는 겁니다. 교회가 어렵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십자가가 뭐가 됐든 받아들이십시오! 아니 받아들일 마음을 갖추십시오! 십자가를 지려고 마음먹으면 그 십자가는 질만합니다. 좀 힘겹겠지만 주님은 거기에 걸 맞는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다보면 그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진짜 신앙의 마지막 조건은 :
3.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도 있고, 십자가도 졌지만, 그런 채로 머물러 있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치 운전면허도 따고, 차도 샀지만 실제로 운행 하지 않으면 그 모두가 아무 쓸모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 가운데 따르라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현장에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일할 곳을 찾아 그 현장에서 움직이라는 얘깁니다.
실제로 열 두 제자들의 행적을 보면, 부활 후에 그들은 선교의 최전선으로 나가 싸우다가 다들 장렬하게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곳은 바로 현장입니다. 물론 현장이란 교회일 수도 있겠고, 우리 믿음이 직접 작동되는 삶의 터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디가 됐든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장소에서 활동해야 합니다. 현장이란 무슨 거창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조그만 존재 때문에 뭔가가 되는 자리입니다.
주일 아침 예배만 드리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선데이 모닝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어느 순간 신앙의 활력을 잃고 맙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희열도 보람도 뿌듯함도 없습니다. 늘 관망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아웃사이더로 있으면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반면 전방에서 전투를 하면 위험이 있습니다. 비방도 당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승전고를 울리는 기쁨이 있고, 주님과 함께하는 희열이 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동안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거울로 갔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었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여러분! 우리의 현장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현장에 있다고 해서 당장 뭐가 바뀌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에 있다는 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장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모두들 진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짜 신앙인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현장에 있습니다. 이런 참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는 중에 주님과 늘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이 외국 땅에서도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