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주 까닭에

날짜: 
2012/10/28
설교: 

삼하16:5-14 그 저주 까닭에
다윗의 노년에 둘째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혼비백산하여 왕궁을 버리고 측근들을 데리고 황급히 도망 길에 오릅니다. 그렇게 황급히 도망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지치고, 피곤하고, 너무나 고달팠습니다. 더욱이 자기 몸에서 난 아들이 자기를 반역하여 죽이려고 덤비니까 다윗의 심정은 참담하고 슬프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합한 사람인 다윗에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물론 이일은 다윗의 죄 때문입니다. 다윗은 한 때 충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그의 처를 빼앗았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매우 밉게 보시므로 다윗의 집안에 재앙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다윗이 우리아의 처와 간음을 저질러 낳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집안에 배다른 형제간에 성폭행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배다른 형제간에 살인이 저질러지고, 급기야는 다윗도 자기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궁에서 쫓겨나서 황급히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사울 집안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와 다윗을 향해 돌을 던지며 다윗을 욕하고 저주합니다. “너가 옛날에 사울 집안의 피를 흘리고 왕이 되었으므로 너도 네 아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아니냐? 지금 너가 당하는 재앙은 살인자가 받는 형벌이니 싸다 싸!”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아시는 분들은 이 시므이라는 사람의 욕과 저주가 사실이 아닌 것을 압니다. 다윗이 자기의 충신 우리아를 죽인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 집안의 피를 흘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이 죄 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계속 덤비니까 다윗은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중에 다윗이 사울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인간의 손으로 죽일 수 없다고 하며 사울을 계속 살려주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은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적에게 쫓기다가 스스로 자결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코 다윗이 자기가 왕이 되려고 사울 왕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여 사울의 집안을 일으켜주고, 그들의 재산을 돌려주며, 므비보셋이란 사울의 손자를 왕자처럼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집안의 친척인 시므이가 다윗이 힘을 잃고 도망을 가는 힘없는 신세가 되자 그 틈을 이용해 궤변을 늘어놓아 다윗의 속을 뒤집어 놓고, 다윗을 더 큰 죄인으로 몰아 부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와 똑같은 경우를 당해 본 경험이 있으신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누가 내 마음을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나를 오해하고, 나를 더 큰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즉 상처 나서 쓰리고 아픈 곳에 식초를 붙는 격입니다.
이때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더구나 내가 사랑과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었던 사람에게 이런 저주를 받거나, 이전에 아주 미천하여 감히 내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저주하고 덤빌 때에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어휴, 이거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니, 저 녀석이 나한테 이럴 수 있나?“ 하고 한숨이 나올 것입니다.
바로 이런 원통함과 억울함에 처할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다윗의 심복인 아비새처럼 “왕이여, 저 녀석의 머리를 당장 쳐버릴까요?” 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원수를 당장 갚는 방법을 택할까요? 아니면 다윗처럼 “놔둬라. 하나님이 나의 이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이 저주 때문에 나에게 선으로 갚아주시리라.”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고 참아 기다릴까요?
오늘의 본문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핏줄에서 태어난 친자식마저 날 죽이려고 날뛰는 판에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야훼께서 시키신 일이니 욕하게 그냥 내버려두시오. 혹시 야훼께서 내가 당하는 이 비참한 꼴을 보시고 오늘 받는 이 저주 대신에 복을 내려주실지 알겠소?"(삼하16:11-12)
여러분! 성경은 “아무든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벧전3:9)고 했습니다. 도리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원수가 목말라 하거는 마시우게 하라. 너는 악에게 지지 말고 악으로 선을 이기라”(롬12:20-21)고 하셨습니다. 즉 억울하고 쓰디쓴 오해와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당할 때에, 그래서 너무나 비참해 질 때에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파멸로 몰아가고, 나에게 욕을 끼친 그 사람을 같이 욕하고 같이 때리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쫓기는 몸이지만 여전히 자기 옆에는 자기를 호위하는 군대 장관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명령만 하면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의 목은 당장 자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직도 원수를 갚을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자기를 저주하는 얄미운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다윗은 억울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그 억울한 일을 잘 참는 자기에게 나중에 더 큰 축복과 상을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억울하지는 않습니까? 자기의 처지가 그 사람 때문에 비참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오늘의 다윗처럼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지금의 이 비참함 때문에, 지금의 이 억울함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나중에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 할렐루야! 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마5:12)
어느 마을에 한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신부님이 미사를 인도하는 중에 한 젊은 여인이 애를 안고 말합니다. “이 애는 저 신부의 자녀입니다. 저 신부는 위선자입니다." 그 여인이 신부의 불륜의 관계를 폭로하므로 마을 사람들은 신부를 향해 비난과 욕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신부복을 벗고 그 여인이 데리고 온 자녀를 안고 강단을 떠났습니다. 신부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그 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여인이 눈물로 마을 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저 애는 신부님의 애가 아닙니다. 당시 동네 불량배들이 신부님을 쫓아내기 위해서 저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결국 신부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되고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셉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요셉아! 너는 저 멀리서 양을 치는 형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고 와서 나에게 보고를 하여라." 그러나 요셉은 배 다른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인신매매를 당하고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치사하고 불명예스러운 강간범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이를 갈면서 “이 죽일 연놈들!” 하고 주먹을 불끈 쥐거나, 발길로 문을 걷어차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있는 처소가 비록 감옥일지라도 거기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때가 되니 하나님은 그의 억울한 일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마침내 요셉을 애급의 국무총리로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형들도, 자기를 강간범의 누명을 뒤집어씌운 사람도 요셉의 앞에서 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최후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죄가 없으신 분이 억울하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 온 몸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손과 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리시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갚으사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만민의 구세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억울하다고 해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아니 내가 그렇게 자기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을 하는데 나를 ‘귀신 들렸다.‘ 하고 나를 죽이려고 해? 에이 못된 것들!” 하고 그냥 십자가에서 내려와 하늘나라에 올라가셨거나, 아니면 제자들과 무장 투쟁을 했더라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억울하게 오해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도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잠잠하였기에 그 분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느니라.“(벧전2:23) ”그러므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 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는 항상 오해와 고난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국 오해와 고난을 극복합니다. 그러므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할 때에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괜히 인상만 고약해지고 혈압만 올라갈 뿐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머리털조차 세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고 견뎌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고통스러운 일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을 만민 위에 세워 놓고 칭찬을 받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회생활이나 교회 생활에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해와 억울함, 배신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극복할까요?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오해(저주, 배신, 비참한, 고통) 까닭에 하나님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할렐루야!
결국 본문의 다윗은 그의 고백대로 이 저주 까닭에 다시 왕권을 회복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하나님께 합한 사람으로 계속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다윗과 같이 위대한 성도,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 저주, 그 억울함, 그 오해, 그 배신, 그 쓰디쓴 고통, 그 비참함을 잘 극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