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라. 나의 님이여!
"1. 가장 아름다운 솔로몬의 노래(신부) 2. 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 3. 임의 향내, 그지없이 싱그럽고 임의 이름, 따라놓은 향수 같아 아가씨들이 사랑한다오. 4. 아무렴, 사랑하고 말고요. 임을 따라 달음질치고 싶어라. 나의 임금님, 어서 임의 방으로 데려가 주세요. (합창단)그대 있기에 우리는 기쁘고 즐거워 포도주보다 달콤한 그대 사랑 기리며 노래하려네.(신부)"(아가서 1:1-4 : 공동번역)
성경에는 메시아 예수님의 초림에 관해 456번이나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또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1518번이나 예언하고 있습니다. 초림에 대한 예언보다 세 배 반이나 많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합니다. "예수가 오든지 가든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무관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과 우리 믿는 사람들의 관계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우리와 결혼식을 올릴 나의 신랑이고, 우리는 그 분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신혼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신부를 이 땅에 팽개치고 하늘나라로 도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남겨진 자기 신부가 혹시 낙심할까봐, 외로울까봐, 어려움을 겪을까봐 예수님의 영,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늘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마치 멀리 떨어진 신랑 신부가 매일 전화도 하고, 문자도 하고, 화상 통화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는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뿐만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신부를 만나기 위해 이 땅에 오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서 직접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고 영원토록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약혼한 신부에게 있어서 신랑은 자신의 행복의 무지개입니다.
고로 신부는 신랑을 늘 그리워해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신부는 신랑이 늘 보고 싶어야 합니다. 만나고 싶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약혼한 신부가 신랑이 전혀 보고 싶지 않다면, 그 까짓 신랑 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식이 되면 이건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합니다. 그러려면 뭐 하러 약혼을 하고, 뭐 하러 결혼을 하려고 합니까? 뭐 하러 예수님을 믿는 겁니까?
예수 신랑이 부자니까, 돈이 필요해서, 돈을 달라고 예수님과 약혼했습니까? 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하면 이 땅에서 고생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결혼을 약속한 겁니까? 여러분!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신랑이 돈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신랑보다 돈이 더 중요하면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무관심한 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과 사랑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맛보면 마음속에서 신랑을 그리워합니다. 늘 신랑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여러분! 사랑하는 신랑 되신 예수님이 보고 싶어 날마다 눈물까지는 못 흘려도,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해야지 신부로서 정상이 아닙니까? 여러분!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는 "아니, 이것도 성경인가? 이런 낮 뜨겁고 적나라한 19금 표현이 가득한 노래가 어찌 성경이란 말인가?" 하고 의아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입니다.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솔로몬의 그 많은 히트곡 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 'song of songs'입니다.
솔로몬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한 시골 처녀인 술람미를 사랑했습니다. 술람미 처녀는 솔로몬이 목동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자 그가 왕인 줄 몰랐습니다. 단지 너무나도 잘생긴 목동이요, 자기와 결혼도 가능한 신분의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너무도 핸섬하고, 너무도 멋있고, 너무도 매너가 좋고, 너무도 귀티가 나는 하나 밖에 없는 목동이었습니다. 술람미 처녀는 목동인 솔로몬과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얼마나 말을 분위기 있고, 적절한 사랑의 표현을 써가며 사랑을 고백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버지 다윗과 어머니 밧세바를 닮아서 얼마나 잘 생겼겠습니까? 그런 그가 사랑을 고백하면 얼마나 무드가 있고, 얼마나 끝내주겠습니까? 시골 처녀인 술람미가 뿅- 가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술람미 시골 처녀에게 솔로몬은 꿈에도 그리던 내 님이었습니다. 백마 타고 나타난 나의 왕자였습니다. 둘은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저 푸른 초원 위를 손잡고 마음껏 뛰어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동으로 변장한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예루살렘에 급한 볼 일이 있어서 여기를 떠나야 해."
술람미에게 그 말은 너무도 잔인했습니다. "사랑하는 내 님이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요. 안돼요. 떠나지 마세요." 솔로몬은 슬피 흐느껴 우는 술람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약속합니다. "술람미,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반드시 다시 올 거야. 그때 우리 결혼 하자. 자기야, 사랑해."
그렇게 떠나간 내 님이 보고 싶어서 술람미 처녀는 밤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내 님이 보고 싶어 상사병이 났습니다. 그녀가 오늘 본문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공동번역이 좀 더 무드 있게 번역되어 소개합니다. "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 임의 향내, 그지없이 싱그럽고 임의 이름, 따라놓은 향수 같아 아가씨들이 사랑한다오. 아무렴, 사랑하고말고요. 임을 따라 달음질치고 싶어라. 나의 임금님, 어서 임의 방으로 데려가 주세요."(아1:2-4) "예루살렘의 아기씨들아, 나의 임을 만나거든 제발 내가 사랑으로 병들었다고 전해다오."(아5: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처럼 사랑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합니다. 나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고 싶은 내 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행복, 나의 전부여야 합니다. 늘 내 님이 언제 오실까 기다려야 합니다. 내 님이 보고 싶어 상사병이 나야 합니다.
드디어 술람미 처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내 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양치는 평범한 목동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백마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신하와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난 왕이었습니다. 술람미 처녀는 너무 놀라서 까무러치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자기와 사랑을 나눈 평범한 목동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인줄 몰랐습니다.
솔로몬 왕은 마차에서 내려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 술람미를 마차에 태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에 가서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 촌스러운 술람미 처녀가 이제 왕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녀는 솔로몬과 매일 영원히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는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그의 신부 되는 우리들과의 사랑을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는 술람미 여인과 같이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햇볕에 이리저리 그을린 모습을 한 촌티 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예수님은 나를 좋아했습니다. 나를 사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살 집을 장만하려고, 결혼식을 준비하려고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노래인 아가서가 성경에 안 들어가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이 아가서를 보면서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과연 내 신랑 되신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보았는가? 아니면 신랑은 무슨 얼어 죽을 신랑이야. 돈도 제대로 안 갖다 주는데!" 하고 박대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다시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곧 오십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예수님의 참 신부입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 오시는 것을 마음 설레면서 기다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혹시 예수님의 신부가 아닐는지 모릅니다. 다만 들러리일는지 모릅니다. 다만 결혼식에만 잠깐 얼굴을 내미는 구경꾼이요, 손님일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 날에 들러리가 되기를 원합니까? 구경꾼이나 손님이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그 분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신부가 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은 자기 신부를 데리러 다시 오십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나팔이 부는 날이요, 천사장의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날이요,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하여 내 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마련한 결혼식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휴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는 날, 내 모습이 이미 세상의 악하고 더러운 귀신들과 타락한 음란한 여인이라면 어찌 그 분의 신부로서 휴거가 되겠습니까?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고, 원망과 불평만 일삼는 심술궂은 여인이라면 어찌 그분의 신부가 되겠습니까? 그 더러운 모습으로 어찌 하늘의 찬란한 결혼식에 신부로서 떳떳이 입장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음탕한 모습으로 어찌 수많은 천사들 앞에서 예수님의 신부로서 박수갈채를 받겠습니까?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고, 오직 신랑의 돈만 탐내면서 어찌 그 분의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신랑 맞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의 마음속에 이미 예수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식어지지는 않았습니까? 요한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처럼 첫사랑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 사랑이 식어졌다면 당신은 신부로서 너무나도 불행한 겁니다.
사랑 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는 너무도 불쌍합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식은 무의미합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인생 낭비입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오늘도 그 분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 그 분이 내 신랑입니다.
그분만이 나를 영원히 사랑하는 분이시오,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실 분입니다. 아- 그립습니다. 주님! 아- 보고 싶습니다. 주님! 언제 오시는 겁니까? 주님!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하나 둘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 분을 기다리다가 언제 잠이 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너무 늦게 오시고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도 짧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계속 사모하겠습니다. 계속 그리워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만나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당신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나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당신의 그 은혜, 그 사랑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영으로 당신의 그 큰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피곤할 때, 힘주셨던 주님,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셨던 주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릴 때에도 "걱정하지 마라. 나만은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더욱 품어주셨던 주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보고 싶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그러나 주님, 아직도 준비가 안 된 신부들이 있어요. 지금 당장 오시면 준비가 안 된 신부들은 큰일 나요. 주님, 빨리 그들도 준비시켜 주세요. 하늘의 결혼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해주세요. 흰 옷 입고 기다리게 해주세요. 기름 준비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오시는 날 당신의 음성을 듣고 휴거가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며 오늘의 설교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