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알고 있다(동영상)

날짜: 
2013/02/16
설교: 

계3:6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오늘의 설교 제목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 어떤 느낌이 듭니까? 좋은 느낌입니까? 나쁜 느낌입니까? 이 말의 뜻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쁜 의미입니다. 나는 너의 죄(비밀, 과거, 약점, 비리)를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 말이 쓰이면 듣는 사람들은 상당히 기분이 나쁩니다. 괜히 긴장이 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상황에 따라 협박공갈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하고는 전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나의 약점과 비밀을 알고 있으면 나는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침해를 당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는 극한 경쟁으로 상대방의 국가나 단체 혹은 개인의 비밀을 캐내려고 합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상대방의 비밀을 캐내려고 합니다. 해킹을 시도합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또 다른 의미는 좋은 뜻입니다. "나는 너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다. 나는 네가 남몰래 선하고 착한 일을 한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경우 마음이 쨘- 해집니다. 코끝이 찡- 해집니다. 특히 어떤 문제로 인해 외국 땅에서 나 혼자 끙끙대고 번민하고 있는데, 누가 나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기대고 싶습니다.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바로 이런 좋은 의미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소아시아의(오늘날의 터키 지역)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이 일곱 교회는 당시의 특정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고, 당시의 많은 교회를 대표하기도 하고, 여러 시대에 걸쳐서 나타난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고, 말세의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어 교회의 일원이 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계시는 하나이지만 네다섯 가지의 경우에 해당되는 4-5중 계시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여러분!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에 대해서 무엇을 아시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
둘째,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라."(계2:9)
셋째, 버가모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라."(계2:13)
넷째, 두아디라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라."(계2:19)
다섯째, 사데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아노라."(계3:1)
여섯째, 오늘 본문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3:8)
일곱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아노라."(계3:15)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압니다. 우리의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신 분이 어찌 우리의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혹시 이름을 바꾸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옛날의 내 이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바꾼 내 이름도 아시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처음 찾아오실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몰라서 'Hello! 여보세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바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오셨습니다. "사무엘! 모세! 아브람!" 이렇게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내 이름도 아십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이 내 이름을 아신다는 것에 옛날에는 좀 회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이름이 '김원효'입니다. 이 이름을 부르면 언뜻 한국의 누가 생각이 납니까? 한국의 코미디언 '김원효'씨 가 생각이 납니까? 그 양반 말고요. 또 누가 있습니까? 한국 역사 공부를 제법 하신 분들은 신라의 유명한 스님 이름이 떠오를 겁니다. '원효대사'
물론 이 분의 성은 저와 다릅니다. 원효 대사는 '설'씨 입니다. 저는 '김'씨입니다. 아무튼 목사의 이름이 유명한 스님 이름과 똑같아서, 저는 제 이름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목사의 이름이 '원효대사'가 뭡니까? 혹시 실수하셨다면 제 이름을 바꿀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제 이름에 대하여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김' 자는 다른 말로 '황금 금' 자도 됩니다. 황금은 성경에서 '금 같은 믿음'을 말할 때 쓰입니다. 그리고 '원' 자는 '으뜸 원'입니다. 일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효' 자는 '효도 효' 자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금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일등으로 효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할렐루야!
꿈 보다 해몽이 더 좋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모두 아시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 빼고 거의 모든 성도님들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이름을 기억하는데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깜빡 이름을 잊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을 자기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이름만 알고 다른 것은 깜깜하게 모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내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은 내 처지와 형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내가 겪는 문제와 고통을 하나님은 잘 아시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고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4에 보면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표현합니다. 즉 주님은 환한 불꽃으로 비추어 보듯이 우리의 마음을 밝히 아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27에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여러분! 종종 실력이 달리는 하수는 고수의 솜씨와 능력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모르면 하나님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겪는 고통은 하나님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말씀합니다. "나는 너의 어려움을 모두 다 알고 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사야 49:15-1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느냐? 그들이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손바닥에 새겼노라."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는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압니다. 어떤 아이가 멀리서 울지라도 그 엄마는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아차리고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의 울음소리를 압니다. 내 마음 속에 흐느끼는 신음 소리도 하나님은 아시고 있습니다. 혹 내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몰라서 가만히 눈물만 주르르 흘리고만 있어도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되시기 때문에 나의 모든 시작과 끝을 다 아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32에 보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 살아가는데 비자가 있어야 하고, 영주권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십니다. 이 외국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지 아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건강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구든지 자기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빡빡으로 머리 민 사람이나 극한 대머리는 제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아시고 있습니다. 오늘 머리 샴푸하다가 머리카락이 몇 개가 빠졌는지도 아시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밀하게 나를 잘 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나를 잘 아시고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살다 보면 배우자끼리 서로 마음을 몰라줄 때가 있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도 자녀가 애비의 마음을 몰라주고, 애비가 자녀의 마음을 몰라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섭섭합니다. 답답합니다. 불평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다 아시고 있습니다.
이사야 65:2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하나님은 오늘 내가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왔는지 다 아시고 있습니다. 내가 말도 하기 전에 하나님은 다 아시고 응답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다 아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인상 쓰지 마십시오. 얼굴을 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내 인생, 내 문제, 내 모든 소원을 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1:17)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던 다윗도 종종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나의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하나님이 내 옆에 항상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고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늘 하나님과 마음과 마음을 나누십시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과 마음을 나눌 때 어느덧 어려움과 슬픔과 낙심은 사라지고 기쁨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사무엘상 7:20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종을 아시오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즉 하나님과 다윗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다 아시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다윗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한때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살인죄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죄의 성품도 다 아셨습니다. 그의 허물도 약점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죄악과 허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의 죄를 담당했노라. 내가 너의 저주와 고통을 담당했노라. 내가 너의 약점을 담당했노라."
여러분! 오늘 이 외국 땅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괴로움, 어떤 슬픔, 어떤 원통한 일,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고 있습니다. 고로 가만히 자기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으십시오. 다 같이 찬송가 483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찬양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