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고후11:27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전4:11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2)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4:11-14 어떠한 형편에든지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J.Chrysostom 346〜407)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예수님을 너무 철저하게 믿는 것 때문에 황제로부터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괴롭히고, 신앙을 버리도록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밑에 있던 보좌관이 황제에게 말합니다. “폐하, 저 사람은 독방에 넣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독방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찬송도 더 잘 부르고, 오히려 싱글벙글하면서 더 좋아합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그를 악질범들만 수용하는 곳에 처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좌관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그러면 더 큰일 납니다. 만약 이 사람을 그런 곳에 보내면 황소같이 사납고 호랑이같이 잔혹했던 악질범도 이 사람 때문에 부드러워지고, 다 교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있는 곳에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그러자 황제는 화가 나서 “그렇게 지독한 놈은 당장 목을 잘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종관들이 말했습니다. “폐하, 예수쟁이들은 순교를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순교를 합니다. 그러니 예수쟁이들은 죽이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처지,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인생을 살다 보면 경제적인 형편에 좋아서 물질이 제법 있을 때도 있고, 때로는 경제가 어려워서 물질이 아주 궁핍할 때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를 보십시오. 1997년에 나라에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나라가 부도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IMF로부터 급히 돈을 빌려오게 되고,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경제적인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대한민국 국민들이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금을 모으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렇게 유능한 경제학자들이 꾸려나가는 나라도 예상치 않게 부도가 나는 것처럼 때로는 우리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외국 땅에서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은 자칫 인생을 코너에 몰리게 합니다. 참으로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물질의 궁핍은 자칫 부부간에, 가족 간에 화목을 깨트리고 원망과 불평으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책임감을 느껴야 되는 쪽은 더욱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우울해집니다. 살기가 싫습니다. 서양의 어느 마을에 아주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저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주식투자를 잘못해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은행에 잔고를 조회해 보았더니 십만 달러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꽤 많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은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조카가 한 사람 있을 뿐이었습니다. 남은 십만 달러는 자동적으로 그 조카에게 유산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그의 조카가 뜻밖에 십만 달러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십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십만 달러인데 한 사람은 너무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다고 죽고 말았습니다. 앞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을 몰랐고, 뒷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더라면 그와 같이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리막길을 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탄탄대로를 달릴 때도 있고, 거친 광야나 험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모습이 보기가 좋습니다. 옛날 다윗 왕이 궁중의 세공인에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나를 위하여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라.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하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에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도록 하라. 또한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에 용기를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하느니라." 세공인은 다윗 왕의 명령대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왕이 요청한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공인은 고민하다가 그 당시 심히 지혜롭다고 하던 솔로몬 왕자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자님, 부왕의 큰 기쁨을 절제시키는 동시에, 절망했을 때에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솔로몬 왕자는 그 세공인에게 말했습니다. "자, 이 글귀를 그 반지에 써넣으시오. 왕이 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 이 글을 보면 자만심은 가라앉을 것이고, 왕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 글을 보게 되면 큰 용기를 얻을 것이오." 여러분, 그 반지에 써놓은 글귀를 혹시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바로 이 글귀입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역사상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솔로몬이 말년에 이런 글을 우리들에게 남겼습니다. 전도서 7:14의 말씀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때, 형통한 때, 일이 잘될 때, 승리의 때, 행복한 때도 주시지만 종종 곤고한 때, 어려울 때, 나쁜 때, 슬플 때, 불행할 때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누구나 굴곡이 있습니다. 성공한듯하면 갑자기 실패도 찾아오고, 불행하다 싶으면 어느 날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인생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며, 보다 성숙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성공만을 원합니다. 형통만 원하고, 행복과 기쁨만 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실패도 다가옵니다. 불통도 오고, 슬픔과 불행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형통하고 행복할 때뿐만 아니라 곤고하고 불행하다고 느낄 때에도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 시피 여기 캘거리 목사님들은 매달 모임을 갖습니다. 사모님들도 같이 모입니다. 15년 전에는 교역자 협의회에 소속한 교회가 10개 정도였는데 지금은 20교회가 됩니다. 그러다보니 모이는 숫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가정마다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식사준비를 하는데 장소도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모이면 점심도 먹고, 운동도 하고, 저녁도 먹습니다. 저의 경우 순복음 교단의 지방회나 총회에 거의 가지 않습니다. 지역이 로키산맥이 가로막히다 보니 밴쿠버나 시애틀에 있는 지방회 모임에 가려면 차로 12시간이 되니 시간 맞추어 갈수도 없고, 비행기로 가자니 미리 비행기 표를 끊어야 되고, 총회는 미국에서 있다 보니 더욱 가기가 힘이 듭니다. 더구나 한국의 선교대회에 가는 것은 엄두를 못 냅니다. 여기 캘거리 목사님들도 거의 마찬가지 형편입니다. 즉 여기는 사방이 막혀있는 곳입니다. 고로 여기서는 사귈 수 있는 친구가 한정이 됩니다. 특히 목사님들이나 사모님들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같이 목회하는 분들끼리 어울려야 편안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자칫 협력과 연합의 관계가 깨어지고, 경쟁의 관계가 되면 도리어 불편할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의 교회 상황은 교민들이 들어오는 것보다, 이래저래 줄어들고 빠져나가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들이나 사모님들이 마음이 좋지 못하게 됩니다. 우울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모임이 있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고 갔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들이 이곳 외국 땅에서 목회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게 하옵소서." 여러분! 우리들에게는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어려울 때 서로를 위로해주고, 남몰래 기도해주고, 아껴주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괴로움에 동참한 것에 고맙다, 잘했다고 말을 합니다. 제가 이곳 캘거리에서 15년 간 이민 목회를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도 말없이 그 어려움을 기도와 인내로 극복하고 꿋꿋이 나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견합니다. 보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반면 어려움이 오면 원망과 불평 속에 더욱 안 좋은 모양으로 변하는 분들도 봅니다.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느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늘 좋은 일들만 일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쁜 일들만 일어나게 하지도 않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섞어가면서 우리들을 훈련시키고 연단시킵니다. 그런 굴곡을 지나면서 우리들은 다듬어지고 겸손해지게 됩니다. 더욱 진실 되고 튼튼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갑니다. 고로 안 될 때 낙심하지 말고, 잘될 때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풍부에도, 궁핍에도 바르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 즉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천에 처할 때도 자기의 비천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풍부에 처할 때도 풍부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자고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처한 여건과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변함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풍랑 이는 바다 위를 잘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바다에 빠져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든지 간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환경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왔다고 주님이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떨어졌다고 주님의 은혜마저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은 그런 어려운 처지가 될 때에 우리가 그 어려움을 진리로 헤쳐 나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고로 어떠한 형편에서도 늘 진리를 붙잡고, 진리 안에서 희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이 더 좋게, 더 아름답게, 더 행복하게 이루시는 풍성한 열매를 다 함께 얻으시고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