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을 맞이하여(동영상)

날짜: 
2013/03/23
말씀: 
눅 22:54-62
말씀구절: 

(눅 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눅 22: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눅 22: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눅 22: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눅 22: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마26:71, 막14:69, 요18:25

(눅 22: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눅 22: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눅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막14:72, 요13:38

(눅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설교: 

눅22:54-62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이번 주부터 부활주일인 다음 주일까지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 당시의 바로 그 때, 즉 2000년 전의 고난 주간에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면서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보다는 영광을 원합니다. 그리고 저주보다는 축복을 원하고,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창 꽃피워야 할 젊은 나이인 33세에 너무도 힘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시대 당시에는 극악 범들은 벌거벗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형제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음에 대하여 많이 들어봤기에 그 죽음의 모습에 대하여 그리 쇼크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아주 아끼는 애완견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자기 자녀처럼 너무도 아끼는 개였습니다. 개도 주인을 너무도 좋아하고 잘 따르는 개였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직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세상에 그 사랑스런 개를 누가 나무에다 못 박아 현관문 앞에다 매달아놓았습니다. 그 개는 양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힌 채 피를 흘리며 낑낑대다가 죽어갔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개의 머리와 온 몸에 칼과 채찍으로 징그럽게 난자를 당했습니다.

개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눈을 뒤집고 이빨을 내밀고 온 몸이 축- 늘어져 죽었습니다. 만약 이런 장면을 오늘날 누가 유튜브에 올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어느 놈이 이런 잔인하고 미친 짓을 한 거야?" 하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의 주인은 너무 놀라서 실신을 할런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 동안 밥맛도 잃고 큰 슬픔 가운데 고난주간에 빠질 것입니다. 만약 캐나다에서 누가 개를 이렇게 난자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면, 그 범인은 만인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아마 징역살이를 상당한 기간 동안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범인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개가 그렇게 벌거벗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너무 징그럽고 잔인한데, 사람이 더구나 예수님이 벌거벗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은 그리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죽음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나 귀걸이를 장식으로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 십자가에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벌거벗겨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목말라 몸부림치며, 기진맥진하다가 결국 심장이 터져 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 참, 끔찍합니다.

더구나 하나 밖에 없는 내 사랑스런 자녀가 인신매매범에게 잡혀가 칼과 채찍으로 난자를 당하고, 벌거벗겨 군중들에게 조롱과 침 뱉음을 당하고, 십자가에 양 손과 양 발이 못이 박혀 피를 흘리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죽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끔찍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내 자녀가 그 십자가에서 큰 고통 속에 죽어야 했는데 예수님이 대신 그 고통과 그 죽음,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세상에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나대신 그런 고통과 죽음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부모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그 고통을 당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혹 어떤 분은 사랑하는 친구나 애인을 구하기 위하여 대신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일본의 강점기에 있었을 때에 나라를 구하려고 모진 고문과 죽음을 당하신 애국자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은 모두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 사랑하는 친구, 사랑하는 애인, 사랑하는 조국을 위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2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청년 하나가 조금 고통을 당하다가 죽은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리고 살다 보면 그렇게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을 수도 있지 뭐! 예수쟁이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난리를 부리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대한민국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을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를 기리고, 그를 믿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 2000년 전, 십자가의 고통 속에 죽으신 예수님이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살리기 위해 죽었다면 예수님은 그들만의 구세주, 그들만의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어느 특정한 사람을 위해 죽었다면 그들만의 특정부류의 구세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통의 죽음을 그냥 먼 산 바라보듯이 "어- 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네!" 정도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괜히 고난주간이라고 특별히 야단법석을 떨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10년 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님, 어머님 제사상 차리는 것이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깨달음이 없이는 그 분을 제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도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를 받고 깨닫습니다. 그 귀하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셨고, 그 분이 죄인 중의 괴수요, 원수 중의 원수인 나를 살리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도대체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나에게 무슨 잘난 점이 있다고 나를 위해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은 것입니까? 도대체 이게 웬 일입니까? 이게 웬 사랑입니까? 오늘 고난주간에 이 큰 은혜, 이 큰 사랑을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또한 철학자 플라톤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두 명언을 합치면 이런 명언이 나옵니다. "네 자신을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명언을 누가 했을까요? 지금 제가 했잖아요?

여러분! 사람들은 가끔 자기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한번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남자(여자)입니다. 나는 000의 아내(남편,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갈 때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살면서 인생사는 가치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되레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는커녕 버림을 당하고 "무가치한 녀석, 너 인생 왜 사니? 차라리 너 같은 녀석은 지구를 떠나거라."라는 시선을 받고 산다면, 이 땅에서 살 힘이 끊어지고 맙니다. 즉 우리는 어느 가수, 어느 노래가 말했듯이 사랑 없이는 못삽니다.

그러나 말세가 다가올수록 인간 속에서 친구와 애인에게, 심지어 부모나 자녀 사이에도 사랑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로부터 미움과 싫어버림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랑에 힘입어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나를 너를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사랑합니다. 왜 나 같이 못난 것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 분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했습니다. 때로는 그 분의 마음에 탕탕탕- 사정없이 못을 박았습니다. 그 분의 옆구리를 날카로운 창과 칼로 마구 쑤셔대고 찔렀습니다. 그 분이 아프다고, 매우 고통스럽다고 피를 흘리며 신음했습니다. "마- 그만 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여러분! 우리는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고난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당할지언정 예수님만큼은 영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은 여전히 고난을 당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성도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당하고 버림을 당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신음하며 또 다시 죽어갑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을 주고, 예수님이 대신 죽어서 살려내신 성도들로부터 그런 고통을 또 다시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잘 봉양해야할 그들이 예수님의 몸을 또 다시 찔러댑니다.

오늘날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애들아- 고난 주간 안 지켜도 좋으니 이제 그만 찔러대라. 나 좀 그만 좀 괴롭혀라. 왜 니들이 고난주간에 나를 죽이고 나서 일주일 후에는 또 부활절이라고 즐거워하느냐?"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런 잘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금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시면 우리는 우리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거나 죽이지 않겠습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선대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는 종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아예 독생자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의 종들을 따르겠다고 해놓고 또 다시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더 이상 줄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큰 은혜, 이 큰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에게 더 좋은 것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가장 좋은 행복을 주셨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이 오시면 그 모든 것이 영광중에 확실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노라. 내가 너를 그토록 사랑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나는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그리고 주님은 이 고난 주간에 아무 말씀도 없이 나를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왜 그렇게 바라보십니까?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어린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모든 말을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 베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주간이기에 예수님은 그냥 묵묵히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베드로도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처량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너무도 불쌍한데, 베드로만큼은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을 보호하고 변호해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는 더욱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에게도 고난주간은 참으로 힘든 주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든 고난의 순간도 잠시 후에는 영광의 순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우리들에게도 찬란한 영광이 있고, 부활이 주어집니다. 고로 오늘의 고난조차 우리들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고난 중에도 큰 희망의 빛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나타나는 부활과 큰 축복을 기대하면서 한 주간을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