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났기 때문에(동영상)

날짜: 
2013/08/31
말씀: 
고전1:26-29
말씀구절: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고전1:26-29 못났기 때문에

혹시 인형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인형을 좋아하면 어떤 인형을 좋아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어공주나 바비인형이나 혹은 신데렐라 같은 예쁜 인형들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표현할 때에 "아- 저 사람은 인형같이 예쁘다."고 칭찬의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인형 중에도 예쁘지 않은 인형이 있습니다. 옛날에 유행하던 인형 중에 배추인형이 있습니다. 인형치고는 그리 예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시골처녀와 같습니다. 그런데 한때 사람들이 그 인형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인형 중에도 아주 못생긴 인형이 있습니다. 특히 '못난이 세 자매' 인형은 각자가 아주 개성 있게 못났습니다. 그런데 그 인형을 의외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취향은 어떻습니까? 제가 그 '못난이 세 자매' 인형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이 이렇습니다.

"아니, 애들은 인형인데 왜 이리 못났을까? 누가 이렇게 못생긴 인형을 만든 거야? 거기다가 이 인형 못생긴 주제에 또 퍼지게 울고 있지 않는가? 애들아 니들 왜 그래? 응-"

그런데 그 인형을 계속 가만히 쳐다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쯧쯧쯧, 너희들 참 불쌍하다. 그런데 왜 무슨 일이 났니? 도대체 왜 그렇게 퍼지게 우는 거야? 내가 뭐 도와줄 것이 있니? 말해봐. 내가 도와줄게."

이렇게 측은한 생각이 들면서 그 울고 있는 못난이 인형을 나도 모르게 쓰다듬어 줍니다. "에고, 불쌍한 녀석들!" 여러분! 신명기 7:7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은 많은 민족 중에서 유독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시고 사랑하셨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에도 나타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약하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이 천대를 받고 버림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여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에헴,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괜찮으니까, 잘났으니까, 배우고 똑똑하니까, 좀 더 가졌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복을 주시고 사랑하는 거야. 그렇지요? 하나님, 나 잘났지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고요. 착각하지 마세요. 도리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여 축복과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너와 내가 남들보다 못났기 때문입니다. "아니, 못난 사람을 왜 그렇게 사랑합니까?"

제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못난이 자매와 같은 인형을 불쌍히 여기시는 겁니다. 못났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더구나 처량하게 울고 있기 때문에 도와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더욱 불쌍한 처지가 되기에 자비를 베푸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사실, 이 진리,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큰일 납니다. 이 사실 깨닫지 못하면 아주 신앙이 못되고 교만하게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개와 고양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와 고양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연구하다가 그들의 차이점을 한 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인이 개에게 밥을 줄때 개는 주인을 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주인이 자기에게 밥을 줄때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진짜 신으로 섬기는 분이 있고, 도리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신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주객이 전도됐다고 합니다. 즉 주인과 손님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면 개처럼 하나님을 좋아하고, 개처럼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제때에 축복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들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얼굴을 확- 할퀴고 도망갑니다.

그리고 뒤돌아서며 뭐라고 그러지요? 야옹- 하면서 무서운 눈으로 주인을 째려봅니다. 주인이 자기를 좋아하고 신처럼 받들어 줄때는 주인과 사이좋게 지내지만 주인이 자기를 푸대접하면 주인이고 뭐고 얄짤 없습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고양이 같은 신자 되지 마시고 개 같은 신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말하고 보니 좀 이상하네요.) 개는 원래 충실한 동물인데, 우리가 본받을 것이 많은데, 굉장히 오해를 당하고 저평가가 되고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이야기 해볼까요. 개는 고양이에 비해 스스로 먹이를 구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고양이는 주인이 밥을 안줘도 슬며시 나가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생선 가게에서 생선 한 마리 훔쳐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보란 듯이 말합니다. "야, 니가 밥 안줘도 나 살 수 있다. 나 더 좋은 것 먹고 왔다. 임마-" 그러나 개는 쥐새끼 잡아먹을 능력이 딸립니다. 주인이 밥을 안주면 기껏해야 길거리에 나가서 떨어진 똥이나 주어먹고 옵니다. 똥개지요.

그러니 개에게 있어서 밥을 주는 주인은 얼마나 고마운 은인입니까? 나 같은 못난이, 나 같은 능력 없는 것을 먹여주시고, 재워주시고, 사랑해주시니, 주인님, 참 감사합니다. 주인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멍멍멍-

교회에도 보면 개처럼 충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못난 사람을 택하여 주시고 사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밥 주시니 감사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이렇게 개의 마음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은 절대로 배신을 안합니다.

그러나 고양이의 마음을 가지면 충성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언제 배신할지 몰라 늘 불안합니다. 주인이 항상 그의 마음을 맞추어야 하고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써야합니다. 피곤한 신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때 종종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개와 같은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너 나 없으면 못살지. 너 나 없이는 굶어 죽지. 너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너 못난 사람이지. 그런 못난이 같은 너를 내가 사랑한단다. 내가 너에게 밥을 주는 분이란다. 그러니 절대 교만하지 말고 끝까지 겸손히 충성해라. 알았지? 이럴 때는 아멘 해봐!"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물론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그 다음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렇게 대답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나서는, 어느 정도 섰다고 스스로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멀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 왕을 보십시오. 그는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직업은 목동입니다. 맡겨준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이리나 곰, 심지어 사자와도 싸워야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렇게 사나운 짐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윗은 그때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목동의 직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즉 자기는 약하고 못났고 부족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평생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직업은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은 늘 죽음의 사선을 넘어드는 사람입니다. 전쟁터에서 언제 적의 독화살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언제 죽어도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결국 그는 평생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운 환경이 도리어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만드는 축복으로 작용한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즉 부자는 가진 재물로 말미암아 스스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그는 천국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살기 힘이 듭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 직장 주세요. 하나님, 돈 주세요. 하나님, 병을 고쳐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고로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갈 확률이 부자보다 높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가난은 좋은 것이고 부요는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칫 자신의 부요함이, 자신의 잘남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교만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겸손이란 하나님 없이는 내 힘으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겠습니까?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겸손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필요 없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입니까?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 못났습니다. 저를 붙잡아주시고, 저를 도와주세요."

신약성경의 반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원래 이름은 '사울' 번역하면 '큰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깨닫고 자기의 이름을 '바울' 번역하면 '작은 자'로 바꿉니다. 즉 자기가 커지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 자기가 작아지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더욱이 그가 몸이 아파서 매우 힘이 들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여러분! 예수님 믿고 타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에도 레벨이 있는데, 가장 큰 타락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복 받고 살아온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셨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나서 축복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없으면 못삽니다. 하나님 없으면 하루아침에 인생이 망하고 맙니다. 고로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겸손히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하나님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늘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잘나고, 가졌고, 똑똑해야 나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못났고, 못 가졌고,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고 세워줍니다. 그래야 그는 하나님께 제대로 감사하고, 하나님께 계속 겸손하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는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는 남들보다 많이 못났습니다. 그러니 저를 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