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

날짜: 
2014/11/02
말씀: 
애3:33
말씀구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설교: 

옛날 한국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드래요. 둘이는 서로 서로 사랑을 했드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모르는 척 했드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드래요.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드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안 그런 척 했드래요.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드래요.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 보고 울었드래요. 갑돌이 마음은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고까지 것 했드래요.”

자- 이 노래 이 가사와 오늘의 설교 제목과 일치 되는 부분이 있지요? 오늘 설교 제목이 뭐라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 그리고 노래 가사 중에 본심이 아닌 내용은 무엇이지요? “겉으로는 음음음 모르는 척 했드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안 그런 척 했드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고까지 것 했드래요.”

즉 실제는 모르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겁니다. 실제는 안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겁니다. 실제는 고까짓 것이 아니고 매우 중대한 겁니다. 그런데 자기의 본심을 살짝 숨기는 겁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겁니다. 속으로는 달 보고 우는 겁니다. 속으로는 이불 뒤집어쓰고 통곡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도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속에 있는 본심이 있고, 겉에 있는 겉심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속과 겉이 다른 이중인격자란 뜻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고상한 인격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본심이 있지만 그 본심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자기의 본심을 후퇴시키며 뒤에서 안타깝게 한없이 우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봅시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키웁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매우 위험한 짓을 합니다. 부모는 깜짝 놀라서 어린 자녀를 제재합니다. 때로는 “안돼! 이놈!” 하면서 야단을 칩니다.

이때 어린 아이는 소리치고 막 웁니다. 어린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는 나쁩니다. 부모가 돼서 왜 어린 자녀를 울리는 겁니까? 어린 아이를 왜 괴롭히는 겁니까? 그러나 우리는 부모가 어린 자녀를 울리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울리는 것은 부모의 본심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린 아이를 야단치는 것은 부모의 본심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자녀는 부모의 본심을 모르고, 부모에 대하여 오해를 합니다. “아빠 나빠, 엄마 나빠!”라고 말하며 토라집니다. “아이고 녀석아, 너 언제 철들래!”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오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이제는 그냥 놔둡니다. 괜히 간섭하다간 역효과가 나니까 모르는 체 합니다. 그러자 자녀가 또 오해를 합니다. “아빠 엄마가 나한테 무관심하구나! 나는 버린 자식이구나! 저 사람 진짜 우리 엄마 아빠 맞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과 다른 신을 섬기니까 하나님이 “애들아, 그러지 마라.” 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말을 안 듣습니다. 하나님이 징계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느냐? 하나님이 왜 우리를 버리느냐?” 하면서 오해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주께서 너희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리고 신앙의 철이 들면 이제는 하나님의 본심을 좀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본심을 좀 알아보십시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이 반문합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이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5-9)

즉 이스라엘 남자들이 남성 우월주의, 남편 우월주의에 빠져서 아내의 약점이 있으면 그것을 핑계로 아내를 버리고 계속 새 장가를 갑니다. 모세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강퍅하여 도무지 말을 안 듣습니다. 도리어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이혼장도 못 받고, 위자료도 못 받고 강제로 이혼을 당하다보니 새로 재혼도 못합니다. 인권이 유린됩니다. 자칫 창녀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세가 “이혼을 하려거든 이혼장을 써주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이 말을 오해하여 “모세는 이혼을 허락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니네들이 하도 완악하니까 모세가 그런 말을 했지만 실지는 그게 아니다. 그게 모세의 본심도 아니고, 그게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라는 겁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것은 목자의 본심이 아닙니다. 성도님들을 괴롭히고 시험 들게 하는 것은 목자의 본심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은 오해를 합니다. 그것이 목사의 본심인 줄 압니다. 그래서 가끔은 따지기도 합니다. “도대체 우리 목사님 왜 그러냐고?” 그런데 이렇게 따지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냥 스스로 오해에 오해를 더하여 십해를 하고 이십해를 하고 나중에는 조용히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참 신사 양반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오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이유를 조목조목 나열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하나님을 버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이큐가 훨씬 적은 인간이 하나님께 계속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이 몇 번 설득을 하다가 그냥 가만히 계시든지 “니가 알아서 해라.“ 하고 마지못해 허락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자꾸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무엘 선지자도 하나님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도 사무엘 선지자도 왕을 세워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는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니까 뒤로 물러가고 눈에 보이는 인생들 중 하나인 자기들 중에 하나를 뽑아서 왕을 세워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매우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조르니까 할 수 없이 하나님이 왕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들이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힙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따집니다. “왜 이런 왕을 세워서 우리를 이렇게 괴롭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자꾸자꾸 왕을 바꾸어줍니다. 그런데 이미 타락한 성품으로 가득한 또 다른 인간들이 왕이 되어봤자 거기서 거깁니다.

하나님은 이걸 이미 다 아신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허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을 압니다. 결국 우리의 왕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라가 제대로 통치가 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왕으로 오시고 왕국을 이 땅에 다시 건설하는 겁니다. 그때에는 진짜 정의사회가 되는 겁니다. 그때에는 진짜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겁니다.

또한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이 과연 좋은지 나쁜지 정탐꾼을 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정탐꾼 보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땅을 주신다고 했으니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꾸 정탐군을 보내자고 조르니까 모세가 할 수 없이 12정탐꾼을 보냅니다. 하나님도 할 수 없어 정탐꾼을 보내는데 허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모세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집에 하나님과 모세가 진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그들의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12정탐꾼들이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10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땅 나쁘다. 안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하나님도 결국 화가 나셨습니다. “그 땅 안 좋으면 들어가지 마라.” 그래서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모두 한 세대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정탐꾼을 보내지 말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한 것을 자기들이 뒤집어버리려고 시도하는 것은 안됩니다.

이를 알고 나중에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만 보냈습니다. 이때의 정탐꾼은 땅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려고 보낸 것이 아니라 군사작전을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것은 괜찮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우기면 후퇴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후퇴는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후퇴가 하나님의 동의 내지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실지는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종아, 그것은 니가 알아서 해라.”(부드럽게) 그런데 하나님이 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니가 알아서 다 해라.”(화내며) 여러분! 같은 말이라도 앞에 것은 하나님의 예스 사인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것은 예스가 아니라 노입니다. 뒤에 말의 하나님의 본심은 “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니 멋대로 하려고 하니?” 하는 뜻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예비한 배필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가 좋은 쪽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몇 번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는 “니가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허락은 허락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우기면 하나님의 뜻이 돌아갑니다. 내가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내가 졌다.”고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 할 때 모압왕 발락이 잔꾀를 부립니다. 이방 선지자인 발람을 초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겁니다. 그 동안 발람 선지자가 저주하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사신을 보내어 발람 선지자를 초대합니다. “우리 왕이 당신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각종 금은보화 부귀영화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발람 선지자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갈까요? 말까요?”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합니다. “니가 왜 내 백성을 저주하니?” 하고 말립니다. 그런데 발람 선지자가 금은보화가 탐이 났습니다. 계속 하나님께 묻습니다. “갈까요? 말까요? 갈까요? 말까요?” 나중에 하나님이 가라고 허락합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중도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그 선지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본심을 저버리고 모압왕에게 간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는 못하고 그들을 음란에 빠트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잔꾀를 부립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도 나중에 여호수아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결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본심을 좇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심을 좇아가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본심은 온 인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돌려 달라.”고 기도하다가 다시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하나님이 본심을 좇아가신 예수님이 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겁니다. 때로는 그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의 뜻이 내게 당장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좇아가면 결국 모두에게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의 본심이 결국 최선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가장 좋은 뜻인 하나님의 본심을 좇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