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날짜: 
2018/05/20
말씀: 
약4:6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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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 어거스틴에게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기독교의 최고의 덕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의 큰 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시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세 번째로 기독교의 큰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세 번째 역시 ‘겸손’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에 있어서 겸손이란 너무나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또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도 겸손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약4:6)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시22:26) “겸손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잠3:34)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149:4) “주께서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시147:6)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도다.”(시10:17)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계속 받고 성공자가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실패자가 되느냐의 중요한 원인은 바로 겸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겸손은 무엇일까요? 손이나 싹싹 빌고, 허리를 굽실거리고, 얼굴 표정을 이상하게 하고, 목소리를 조용히 내려 깔면 그것이 겸손일까요? 오히려 그것은 위선의 죄를 하나 더 짓는 가증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겸손이란 비굴한 행동이나 자신을 속이는 위선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격하시킴으로 묘한 즐거움을 느끼는 매조키즘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못나고 부족한 모습을 깊이 깨닫고 저절로 그 분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 분께 매달리고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된 겸손입니다.
예를 들면 원숭이가 나무를 잘 타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스스로 “에헴, 나보다 나무 잘 타는 동물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그래?” 하고 자신을 뽐내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제가 아무리 나무를 잘 타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입니다. 그리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는데 제가 실수하여 나무에서 떨어져 뇌진탕 걸리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태도가 바로 겸손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운전 경험이 많고 아무리 운전을 잘하고 자신이 있어도 “하나님, 운전대를 붙잡아 주시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운전을 할 때마다 기도를 하는 것이 겸손한 태도이지 “에헴, 나보다 운전 잘하는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그 ?” 하고 자신의 운전 솜씨를 뽐내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 부교역자로 있을 때 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제법 큰 사업도 하시는 모회사의 회장님이요, 교회에서도 모선교회 회장님으로 주의 일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얼굴빛이 별로 안 좋아 보이더니 간암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의학 박사님이 이 암은 수술만 하면 완치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수술 성공률도 거의 100% 확신한다고 말하며 빨리 수술을 하자고 해서 급히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00% 확신한다는 수술이 잘못되어 그만 며칠 후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내 분이 의사에게 “아니, 박사님, 수술 성공률이 거의 100% 확신한다기에 수술을 받았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그 의사 분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 분은 자기의 실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수술에 실패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의사 분이 수술하기 전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를 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저는 암 전문의가 된지 이제 100년도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만병의 의사시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시니 수술을 하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수술을 도와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교수님은 진통제를 발견하여 환자들이 고통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학계에 있어서 너무나 큰 발견이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심프슨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뜻 깊고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들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이 질문에 다른 학생들 모두가 속으로 “에이, 멍청하게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 그야 물론 진통제의 발견이라고 대답하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심프슨 교수님은 한 동안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네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각종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러한 겸손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했던 예수님을 통하여 겸손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한 삶을 사신 신앙의 여러 위인들을 본받음으로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2:6-7)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즉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천하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5)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고, “그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요13:4-5)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뽐내기를 원하고, 대접받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셨고, 자신을 결코 과시하지 않으셨고, 대접받기보다는 남을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야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5)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산 기도를 하고 내려오니 그의 얼굴에서 백성들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그때 그가 “에헴, 나를 보아라. 어때 뻔쩍뻔쩍하지? 굉장히 신령하지?” 하고 자기를 뽐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니 그가 계속해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즉 그 광채가 얼마 후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 얼굴에 너무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눈이 부셔 가까이 할 수 없사오니 이 광채를 좀 빼주십시오.”
그러나 오늘날 교만한 사람 같으면 아마 이렇게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 얼굴에 광채가 뻔쩍뻔쩍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이 감히 내 앞에 얼씬도 거리지 못하고,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시고, 멀리서 ‘와- 모세 봐라. 너무 멋있다!’ 하고 저를 우러러보고 존경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도 보십시오. 그는 당시에 학문에 통달한 사람이요,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백그라운드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교만이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스스로 이름을 사울(큰 자)에서 바울(작은 자)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15:8)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 라고 말하며 “나는 사람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고전 15:9)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해진 그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어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인 13권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하셨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사도로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도 많은 능력을 받은지라 언제 또 교만해질 위험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불치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혹시 교만의 끼가 보이면 그 병이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아이고, 아파라! 하나님이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하고 깨닫고 다시 겸손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시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실까요? 교만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교만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하늘의 천사장도 교만하여 마귀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교만하면 마귀가 됩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같은 동기 목사들과 조용기 목사님을 뵈러갔습니다. 그때 조용기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권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목회 하면서 세 가지를 항상 조심하라. 돈 조심하고, 이성 조심하고, 교만을 조심하라.”
그 말을 듣고 저는 자주 자주 기도합니다. 같이 한번 따라 해봅시다. “돈 조심하고, 이성 조심하고, 교만을 조심하게 하옵소서.” 여러분, 물이 낮은 곳을 따라 흐르고 채워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낮아진 사람, 겸손한 사람에게 흐르고 채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물론 교만한 사람이 “아 내가 그 동안 교만했구나! 이제 교만하지 말아야지.” 하고 깨닫고 하루아침에 겸손해 지기가 매우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오늘과 같은 말씀을 통하여 최선을 다하여 겸손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면 좋습니다. “하나님, 저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아무쪼록 이 이민 생활, 외국 생활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더욱 겸손하시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계속 받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