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자녀냐 내 자녀냐 ?

날짜: 
2003/07/21
설교: 

제 목 ; 남의 자녀냐 내 자녀냐 ?
본 문 ; 마 20:20-28

하루는 포수가 새 사냥을 하기 위해 숲으로 갔습니다.
이때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어미 참새가 포수를 보고서 제발 내 자식만은 쏘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습니다. 포수는 "당신 자식이 어떻게 생겼소 ?"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미 참새는 숲 속에서 가장 잘 생긴 참새가 내 자식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포수는 "당신 자식만큼은 절대로 쏘지 않겠소 !" 하고 어미 참새에게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포수가 사냥을 마치고 나오자 어미 참새는 자기 자식이 총에 맞아 죽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슬픔에 잠겨 울부짖으며 그 포수에게 따졌습니다.
"아니 왜 내 자식을 쏘았습니까 ?" 그러자 그 포수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숲속에서 가장 못 생긴 참새 놈을 쏘았을 뿐이오 !"

여러분, 이 이야기는 모성애로 말미암아 자기 자녀에 대해 눈이 먼 어머니가 결국 자기 자녀를 잘못 판단하여 그 자녀를 망치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처럼 오늘날 너무나 많은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모성애로 말미암아 자기의 자녀에 대해 잘못 판단하므로 자녀의 바른 교육은커녕 자기 자녀를 망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의 자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
"제 자녀요 ? 아이고- 둘도 없이 착한 아이지요 !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이만하면 인물도 괜찮고, 앞으로 이 애는 큰 인물이 되어 한 자리 할 것이구먼요 !" 라고 말을 할 때 하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과연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
혹시 하나님이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야, 착각하지 마라. 너도 참새 어미처럼 네 자녀를 그렇게 잘못 판단하다가는 나중에 큰 슬픔을 당하고 만다."

여러분, 옛날 한국에는 거의 모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그리 많이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보다는 오늘날의 부모가 자녀들을 더욱 소중하고 끔찍하게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녀를 마치 우상처럼 여기고 바라보는 것을 볼 때 "아- 이것은 아닌데 !"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시대를 초월합니다. 그리고 자녀 사랑에 대한 것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주어진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은 있어도 "네 자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그 자녀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든 부모가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모든 부모의 마음이 기왕이면 자기 자녀가 남의 자녀보다 더 잘되고, 남의 자녀보다 더 잘 생기고, 남의 자녀 보다 더 똑똑하고, 남의 자녀보다 더 출세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는 아주 가까운 친척지간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절을 하며 이렇게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1) 이 부탁에 예수님은 상당히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을 사랑하여 남보다 더 높이려고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두 제자말고도 또 다른 10 제자가 있었고 때마침 그 이야기를 다른 10 제자들이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러지요 뭐 ! 야고보와 요한은 우리 친척 뻘이 되니 내가 그들에게 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하지요."라고 대답을 하였더라면 아마 다른 10 제자는 질투심을 느끼고 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났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 저희가 말하되 할수 있나이다 가라사데 과연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2-23)
즉 존귀와 위엄의 상징인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신의 아들들이 앉는 것을 모든 부모가 원하지만 그 자리로 인해 서로 싸우려고 하지말고,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고 남의 종이 되는 것이 바른 제자의 자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아들과 딸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삼기를 원하십니까 ? 아니면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기를 원하십니까 ?
만약 이 물음에 "예, 당연히 내 아들과 딸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지요 ! 더구나 교회에서 이렇게 남을 섬기는 자세를 배우고 실천해야 바른 자녀로 키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하고 자기 자녀들에게 종의 자세를 모범을 보여가며 가르친다면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자녀를 나의 뜻에 맞게 바르게 키우고 있구나 ! 그러니 내가 앞으로 네 자녀를 축복하고 들어 쓰리라."
그러나 이 물음에 "아니, 무슨 소리하는 것입니까 ? 이렇게 똑똑한 내 자녀가 남의 종이 된다고요 ? 그런 말씀 자꾸 하면 나 시험에 들어 교회 안나오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자녀는 머리가 된다고 했으니 기왕이면 내 자녀가 머리가 되어야지요 ! 애야, 너는 앞으로 공부를 잘해서 남을 다스리는 머리가 반드시 되어라."라고 말을 한다면 오늘 본문의 주제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그 부모를 향해 주님은 오늘 본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이방인의 주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5-27)

어느 마을에 한 어머니가 5살짜리 외아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동네에 나와서 개구쟁이 친구들에게 얻어맞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얻어맞고 울면서 집으로 오면 그 집에서는 날카로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골목 밖으로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이 녀석, 바보같이 매일 매만 맞고 다녀. 당장 나가 ! 나가서 때리고 들어 와 ! 다시는 매 맞고 들어 와서 울면 가만 놓아두지 않을 테야. 얼른 나가서 때리고 와 !"
물론 귀한 아들이 친구에게 얻어맞고 우는 모습을 기분좋게 생각할 어머니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어머니의 반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약 이때 그 어머니가 이렇게 반응하면 어떻겠습니까 ?
"어머나, 우리 똘이가 얼마나 아프겠니 ? 가엾어라 ! 똘이야, 그래도 넌 참 훌륭했어 ! 네가 끝까지 친구를 때리지 않고 참은 건 아주 훌륭한 행동이야. 남을 아프게 하는 일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란다. 우리 그 친구를 용서해 주자꾸나 !"

여러분, 예수님이 어렸을 때 남을 때리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서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뼘을 맞고 멸시를 당할지언정 남을 때리거나 남보다 높아지려고 허세와 위엄을 떨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태어날 때부터 그리 잘생긴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사53:2)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자 동네에서 자라나게 하지도 않았고, 맛있는 것 각종 좋은 것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렛 촌동네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게 하셨고, 오늘날의 좋은 대학도 보내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 교육이 잘못 되었을까요 ? 혹은 하나님이 그 자녀인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진정한 지도자, 진정한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남을 섬기는 것, 남의 어려운 사정을 알아주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가난한 집안, 가난한 동네에서 교육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전에 미국 잡지에 '자녀의 일생을 망치는 열 가지 비결'이란 글이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이렇습니다.

(1) 자녀가 사달라는 대로 다 사준다.
(2) 실용성 있는 옷보다는 겉모습에 치중한 옷을 늘 사주고 그것으로 크게 만족한다.
(3)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만화, 좋아하는 TV프로 등 좋아하는 것만 배려해 준다.
(4) 인내로 기다리는 것보다 조급하게 결과를 얻는 것을 가르친다.
(5) 친구와 싸울 때 자녀 편만 들어주고 친구의 부모를 공격한다.
(6) 성실하게 일해 대가를 얻는 것보다 단시일 내에 일확천금을 얻는 방법만 가르친다.
(7) 이웃을 위해 공부해서 큰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리사욕을 위해 공부해서 큰 사람이 되기를 가르친다.
(8) 매를 들지 않고 무조건 감싸준다.
(9) 베풀기보다 소유하는 방법만을 가르친다.
(10) 경건한 인생을 위해 고난 당하는 삶보다 세속적인 인생을 위해 편하게 사는 삶을 가르친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좀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잠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이중 잣대'라는 말을 쓰지요. 그중 자기 자녀와 남의 자녀를 이중 잣대로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1. 남의 딸이 애인이 많으면 행실이 가벼워서이고, 내 딸이 애인이 많으면 인기가 좋아서이다.
2. 남의 아들이 웅변대회 나가서 상을 받으면 누구에게나 주는 상을 어쩌다 받은 것이고, 내 아들이 웅변대회 나가서 상을 받으면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3. 남이 자식을 관대하게 키우면 문제아 만드는 것이고, 내가 자식을 관대하게 키우면 기를 살려 주는 것이다.
4. 남의 자식이 어른한테 대드는 것은 버릇없이 키운 탓이고, 내 자식이 어른한테 대드는 것은 자기 주장이 뚜렷해서이다.
5. 남이 내 아이를 나무라는 것은 이성을 잃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이고, 내가 남의 아이를 나무라는 것은 어른 된 도리로 타이르는 것이다.
6. 남의 아이가 대학 입시에 낙방하면 실력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고, 우리 아이가 대학 입시에 낙방하면 워낙 경쟁률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7. 내 아이가 어디 가서 맞고 오면 쫓아가서 때린 아이를 혼내줘야 하고, 내 아이가 어디 가서 때리고 오면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참견할 필요가 없다고 접어둔다.
8. 남의 아이가 눈치 빠르면 약삭빨라서이고, 내 아이가 눈치 빠르면 영리하기 때문이다.
9. 남의 아이가 비행을 일삼는 것은 아이의 성격이 삐뚤어서이고, 내 아이가 비행을 일삼는 것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이다.
10. 남의 딸이 말이 많으면 수다스러운 것이고, 내 딸이 말이 많으면 붙임성이 있는 것이다.
11. 어른들 이야기에 남의 아이가 끼여들면 건방져서이고, 내 아이가 끼여들면 성숙해서이다.
12. 남의 아이가 질문이 많으면 이해력이 부족해서이고, 내 아이가 질문이 많으면 탐구심이 많아서이다.
13. 남의 아이가 신경질이 많으면 성격이 이상한 것이고, 내 아이가 신경질이 많으면 감정이 예민해서이다.
14. 남의 아이가 맞고 오면 바보 같아서이고, 내 아이가 맞고 오면 너무 순해서이다.
15. 남의 아이가 편식하면 입이 까다로워서이고, 내 아이가 편식하면 입이 고급스러워서이다.
16. 남의 아들이 전쟁놀이를 즐기면 호전적인 거고, 내 아들이 전쟁놀이를 즐기면 남자다운 것이다.
17. 남의 딸이 미스코리아에 당선되면 성형수술에다 미용 조명발 덕분이고, 내 딸이 미스코리아에 당선되면 원래 미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날 닮았거든)
18. 남의 아이가 개구쟁이면, "왜 이렇게 아이가 번잡스러워, 정서불안이야 ?" 내 아이가 개구쟁이면, "개구쟁이라도 좋다, 씩씩하게만 자라다오."
19. 남의 아이가 시력이 나쁜 것은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아서이고, 내 아이가 시력이 나쁜 것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이다. (어이구, 예쁜 내 새끼...)
20. 남의 아이가 돈을 밝히면, "어린 게 벌써부터 돈맛을 알아서 쯧쯧쯧..." 내 아이가 돈을 밝히면, "경제 감각이 빠른 모양이야."

어느 한국교회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개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한국의 모 교회 여름 수련회에서 중고등부 애들이 야외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그만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교인들이 전부 비탄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로 인해 목사님을 원망하는 교인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그 죽은 아이의 장례를 치른 후 얼마 후 목사님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아이가 내 자녀였기 망정이지, 교인들의 자녀였다면 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소! 목사 잘못 만나서 내아이 죽었다는둥,목사의의 기도가 부족해서 내아이가 죽었다는둥... 말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