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국의 두란노 ‘아버지 학교’의 캐치플레이즈(catchphrase)가 있습니다. 뭐지요?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입니다. 그런데 그 후 어머니 학교도 생겨나서 거기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그리고 그 후 또 이런 구호도 생겨났습니다. “남편이 살아야 가정이 산다.” “아내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그런데 요즘은 이 말들이 더욱 변형이 되어 이와 반대로 말하기도 합니다. “남편이 죽어야 가정이 산다.” 어때요? 여러분, 남편이 살아야 가정이 삽니까? 남편이 죽어야 가정이 삽니까?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사는 것보다 남편이 죽어야 가정이 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옆에 사람 눈치 보지 마시고 한번 솔직하게 대답해볼까요? 남편이 살아야 가정이 산다고 생각하시는 아내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반대로 남편이 죽어야 가정이 산다고 생각하시는 아내 분, 손들어보세요. 아니- 남편이 죽으면 처량한 과부 신세가 될 텐데, 남편 없이 살면 개고생이 되고, 팔자가 세질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아이- 목사님, 솔직히 말해서 남편이 죽어야 할렐루야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나요?
물론 여기서 남편이 죽는다는 뜻은 진짜 육체가 죽는다는 뜻이 아니고, 남편의 똥고집이 죽고, 남편의 사나움과 남편의 좋지 못한 인격과 행실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가정이 화목하고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나아가 남편이 아내인 자기의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 순종을 잘하는 것을 더 바라는 분도 있을 겁니다.
즉 가정에서 아내가 대장이 되고, 남편은 졸병이 되든지 머슴이 되는 것을 더 선호할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가정이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남편도 죽고 아내도 좀 죽어야 됩니다. 못된 성질도 죽어야 하고, 사나운 성격도 죽어야 하고, 똥고집도 죽어야 하고, 좋지 못한 습관과 행실도 죽어야 합니다.
러니까 결혼을 하면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죽어야 하니까, 그게 결혼생활의 힘든 점입니다. 그런데 결혼해서도 서로가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려고 작전을 벌입니다. 어떤 작전일까요? 다름 아닌 그들에게 자녀를 주는 겁니다. 여러분, 자녀가 태어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부모로서 일단은 좋을 겁니다. “Happy birthday! 오- 사랑스런 내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를 키우면서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아- 이 새끼가(사랑스런 자녀분이) 시도 때도 없이 우는(우시는) 겁니다. 피곤해서 잠을 좀 자야 되는데, 도저히 이 분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고문이 없습니다. “너 도대체 왜 태어났니? 다시 니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 자녀를 키우다보니 내 시간이 없어집니다. 자녀에게 하루 종일 묶이는 겁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좋은 시절 다 지나갔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더니...”
그렇게 자녀를 키우면서 남편과 아내의 이기적인 마음이 깨어지고 죽는 겁니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면서 희생의 마음도 생기고, 인내의 마음도 생기고,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고, 또한 자녀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말과 행동도 다듬어지고 가꾸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녀는 그 부모를 길들이는 하나님의 좋은 도구입니다. 어찌 보면 인질과 같습니다.
그럼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없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하고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겁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40이 되고 50이 되었는데도 배우자나 자녀가 없고 혼자인데도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하고 노래하면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쯧쯧쯧-’ 하고 불쌍히 쳐다볼는지 모릅니다.
온라인 댓글 란에 보면 수없이 많은 댓글들이 올라오는데 그 중에 이런 댓글이 참 많습니다. “결혼 하지 마라. 너무 힘들다. 왜 사서 고생하니?“ 반대로 이런 댓글도 많습니다. ”그래도 결혼하는 것이 좋다. 결혼해라.“ 그런 댓글들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습니다. 즉 결혼의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습니다. 자녀가 있어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결혼한 것을 저주로 보지 않고 축복으로 봅니다. 그리고 자녀가 있는 것을 저주로 보지 않고 축복으로 봅니다. 물론 결혼해서 배우자와 살면서 서로가 도저히 맞지 않아 많이 싸우기도 하고, 후회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국 선을 이루게 됩니다. 아멘입니까?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좀 특이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1999년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1999년에 김경일 씨라는 분이 책을 냈는데 그 제목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입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성균관대학에서 이 사람을 고소했습니다. 고소 이유는 공자의 유교 사상을 모독했다는 것이요, 그로 인해 유교 사상을 가르치는 성균관 대학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같은 해에 최병원 씨가 이 책을 반박하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입니다. 한쪽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하고, 한쪽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합니다. 이걸 가지고 서로 고소하고 법정에서 싸우니 일반 서민들은 굉장히 이상합니다.
”아- 이 사람들, 되게 배가 부른 사람들이구나. 원 별걸 가지고 다 싸우네. 공자가 죽든지 살든지, 유교가 죽든지 살든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여러분, 그러지 않습니까? 지금 시대에 공자가 살든지 죽든지 그게 저와 여러분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공자가 살면 어떻고, 공자가 죽으면 어때요. 공자가 산다고 나에게 100불이라도 생기거나, 공자가 죽는다고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한국의 역사를 보면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수백 년간, 거의 천 년간 피터지게 싸웁니다. 기원 전 6세기에 중국의 공자는 유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원 전 6세기에 인도의 석가모니는 불교를 창시했습니다. 이 두 사상 가운데 어떤 사상을 택하느냐에 따라 한쪽이 죽고 한 쪽이 살았습니다.
고려시대 때에는 불교가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 말기에는 불교가 많이 타락했습니다. 그로 인해 나라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로 넘어와서는 불교는 억제하고 유교는 숭배한다는 ‘숭유억불정책’을 폈습니다. 그런데 유교도 양반과 상놈으로 계층이 나눠지고, 그로 인해 과학이나 기술을 천히 여기므로 나라의 발전이 더딥니다. 그래서 또 다른 학문인 실학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시대에 따라,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종교나 학문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겁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것은 서양 종교요, 상놈의 종교라고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1800-1900년도 사이의 100년간 1만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볼 때에 기독교를 믿는다고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지난 2000년간 7000만 명이나 됩니다. 오늘날도 평균 매 6분에 한 명씩 기독교인들이 순교들 당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를 ‘순교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 순교자의 피를 바탕으로 세워진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즉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고, 저와 여러분들이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 사상은 기독교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예배당의 중앙에나 교회 건물의 꼭대기에 잘 보이도록 십자가를 걸어놓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듯이, 우리 신자들도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부탁하셨습니다. “애들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온 인류가 산 것처럼, 우리도 각자 죽으라고 하는 그곳에서 죽어야 그곳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공동체가 삽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그리고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도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여기서 ‘죽는다’는 뜻은 자기를 희생한다는 뜻도 있고,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자기의 몸과 마음과 생활을 절제한다는 뜻도 있고,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를 좇아가려는 육은 죽고, 하나님을 좇아가려는 영이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법에도 보면 양이나 염소나 소나 비둘기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죄가 사해지고, 그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됩니다. 이 예표를 따라서 예수님이 나 대신, 너 대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우리들에게 나타나서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즉 희생의 죽음이 없고, 희생의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히9:22)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고, 일터가 천국이 되고, 학교가 천국이 되고, 사회가 천국이 되고, 나라가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살게 됩니다.
제가 28년 전 여의도 순복음 교회 선교국에서 선교사 발령을 받고 이곳에 오기 바로 전에 여러 선교사 후보생들과 단체로 마포구 합정동의 절두산에 있는 순교자 박물관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국을 복음화 시키려고 200년 전 조선시대 때부터 한국 땅에 와서 순교한 외국의 선교사 분들의 묘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선교사 부모님들과 같이 한국 땅에 와서 풍토병에 죽어간 어린 자녀들의 무덤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마음이 찡-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 내가 지금 선교사 발령을 받고 캐나다 땅으로 가는 것은 살기 좋은 캐나다에 살러 가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 주님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죽으러 가는 거구나.”
저의 목회 생활을 뒤돌아보면 이제 40년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한국에서 13년을 목회했고, 여기 캐나다에서 28년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역를 E떠나지 말고, 여기서 계속 목회를 하라고 하니까, 아마 여기 캐나다 캘거리가 제가 죽어야 할 땅인 것 같습니다. 동물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귀소본능으로 인해 자기가 태어나고 자기가 자란 고향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저의 고향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입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 캐나다 캘거리도 저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이곳이 저의 목회지요, 사명지요, 선교지요, 무덤터요, 순교지입니다. 목회자와 선교사로서 하나님이 보내준 이 사명의 땅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명예로운 것입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다가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죽음인 것처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이 명예로운 죽음인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보내 주신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다가, 마귀와 한 영혼을 놓고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하다가 죽는 것은 크리스천으로, 십자가의 군병으로서 참으로 명예로운 죽음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저와 같이 주님을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서 치열한 영적 싸움을 끝까지 잘 하시다가 최후의 순간, 즉 죽음의 순간을 명예롭게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찬란한 훈장도 타시고, 영원히 명예롭게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친히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모범을 보이셨으니, 우리들도 그 자취를 따라 죽을 때에 잘 죽게 하시옵소서. 돈과 세상을 위해 거짓되고 비겁하고 부끄럽게 살다가 죽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스런 죽음, 명예로운 죽음, 떳떳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