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책임을 질수 있겠는가?

날짜: 
2014/05/10
말씀: 
마19:26
말씀구절: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설교: 

세상에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큰 고통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세월호와 같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라든지, 성수대교 붕괴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같은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총각 전도사로 첫 교구를 맡았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방학 때가 되어 친구들과 강원도에 피서를 갔다 온다고 했는데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구역장을 맡고 있는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뜻한 슬픔을 겪으며 몇날 며칠을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 도저히 사실같이 여겨지질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대문을 열면서 "어머니- 저 다녀왔습니다." 하는 아들의 음성이 들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아들의 음성을 듣지 못한지 벌써 보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애가 진짜 죽은 모양이다." 생각이 들며 그 분은 다시금 슬픔이 복받쳐 그만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이 당하는 이런 슬픔과 고난이 나에게는 전혀 닥칠 것 같지 않았는데, 그러나 웬일인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수많은 문제와 고통을 겪으며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당하는 개인의 문제 뿐 만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가정과 사회, 국가들이 당하는 문제와 슬픔은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특히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근 한 달이 되도록 한국 사회가 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TV와 매스컴은 매 시간마다 이 일을 방송하고 있습니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는 각종 문제와 그로 인한 고통스런 모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도대체 이 모든 문제들을 누가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으며, 누가 이 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우리는 현재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의 문제를,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지도 모를 여러 가지 문제를, 보다 완전하게 해결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참 행복과 평안을 결코 기대 할 수 없습니다.

고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내가 당하는 이 고통과 슬픔의 문제를 과연 "누가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같이 성경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마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야, 인생은 너 자신이 개척해야 돼. 너 스스로 책임을 지며, 너 자신의 수단과, 너 자신의 방법을 동원하며, 네가 인생을 살아야 돼.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겠다는 것은 다 거짓이야, 그것은 의지할 것 없는 나약한 예수쟁이나 하는 말이야. 야- 하나님이 어디 있냐? 봐- 없잖아!”

사람들은 이런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철저한 인본주의의 울타리를 만들며, 그 속에서 스스로 책임지며, 열심히 땅을 개척해 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돋아나는 수많은 가시와 저주의 엉겅퀴에 이리저리 찔리고 할퀴는 고통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인상을 찡그리며 상처를 줍니다. 이로 인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투며, 지도자와 백성이 서로 불신하고, 나라와 나라 간에도 으르렁 거리고, 마치 지구는 이런 사람들로 인해 이곳저곳 얻어터져 시퍼렇게 멍이 들고 코피가 터져 영원히 회복하지 못할 중환자실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 책임을 지며 그렇게 잘 살아보겠다던 저 공산주의도 이제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토해내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그 무엇을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입니까? 역사를 통해 살펴보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참 모습은 서로를 사랑하며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극한 이기주의 속에서 서로가 물어뜯고, 피 흘리며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우며, 또 싸우고 또 싸우는 끊임없는 싸움과 투쟁의 연속입니다.

이런 고통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외치고 따집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고통을 우리들에게 가져다주었는가?" 이로 인해 상처는 더 커지고 고통은 쉽게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참모습은 상처와 고통뿐입니다. 패잔병 중의 가장 비참한 패잔병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 도대체 누구를 책임지며 누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등지고 어떻게 정의 사회가 이루어지고 복지사회가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난 후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어떻게 참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잘 살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 여보시오. 당신이 정말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위대하고 잘난 사람입니까? 당신이 이 온 세계를 창조했고, 당신이 이 온 우주를 통치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습니까? 모두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죽어서 한 줌의 재와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릴 수 가 있으며, 나의 쓰라린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그것이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는 않지 않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어디론지 멀리 도망쳐 버리고 싶은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잘 생겼으면 얼마나 잘생겼고,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습니까? 우리의 그 잘난 모습이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수가 있으며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좀 더 솔직하게 대답해 봅시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고 살아 왔지만 당신은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거룩하게 지냈나요? 당신은 이제까지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가운데 남 몰래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지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5,19,21-24)

도대체 이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문제로 인해 통곡하며 한숨짓는 저들을 누가 위로해 주며, 누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고, 누가 그 인생을 행복하게 대신 꾸려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남편을 여섯 명이나 갈아치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누가 만족케 할 수가 있으며, 누가 그 여인에게 소망찬 삶을 지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누가 일으킬 수가 있으며,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 썩는 냄새가 펄펄 나는 나사로를 향해 누가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부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 누가 나의 이 기막힌 사정을 들어 줄 수가 있으며, 파괴된 나의 자존심을 누가 일으켜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가르칩니다. “야, 세상은 어차피 싸우는 거야. 투쟁이란 말이야. 너가 다른 사람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너가 오히려 상처를 당하고 말아. 그러니 인정사정 볼 것 없어. 죽여- 죽이란 말이야!”

또한 비관론자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야, 세상은 더러운 것이란다. 그러니 머리를 빡빡 깎고, 흰 두루마리 하나 걸쳐 입고 김삿갓처럼 속세를 떠나는 것이 상책이야. 부모와 자식도 떠나야 돼. 아- 잊어버리란 말이야!”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이렇게 나를 정죄합니다. “야- 쌤통이다, 거봐 내가 뭐랬냐? 너 내 말 안 듣더니 그 꼴 됐지. 어이구, 이 바보야, 병신아, 쪼다야!“ 또한 쾌락주의자들은 이렇게 권유합니다. "야- 이렇게 슬프고 괴로울 땐 술이 최고야. 그것도 독한 소주가 좋단다. 아, 마셔 봐. 부어 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속주의자, 비관론자, 율법주의자, 쾌락주의자의 말을 좇아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달려가 보았지만 그 길은 역시 고통이었습니다. 슬픔이었습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성품을 가지고 지 아무리 윤리와 도덕을 세우며, 철학과 종교의 바벨탑을 높이 세워 보았지만 그것이 나를 고통에서 결코 자유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느니라.”

이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와, 나의 말 못할 사정을 완전히 해결할 사람은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 파괴된 인생, 찢어진 마음을 치료해 주며,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입니까?

2. 하나님만이 책임을 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한 이래 인류는 끊임없는 고통과 눈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형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비롯하여,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므로 노아의 대홍수라는 심판을 겪게 되고, 극도로 타락한 음란과 방탕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세상은 온통 넘치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7년 대 환난을 겪게 되고, 아마겟돈이라는 최후의 전쟁과 함께 마지막 인류의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말세의 넘치는 음란과 죄악,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틈바구니에 끼어 오늘도 안타깝게 외칩니다. “나를 살려 주시오. 나를 좀 구원 해주시오.” 그러나 이와 같은 외침도 한낱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될 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내가 너를 진정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진정 책임져 주겠노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하나님을 모르는 세속주의자, 비관론자, 율법주의자, 쾌락주의자가 아무리 많은들 나의 이 절박하고 답답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위를 봐도 절망이요, 아래를 봐도 절망입니다. 도저히 가망이 없습니다. 너도 죄인이요 나도 죄인이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느니라.”(롬3:10-17)

그러나 이 어둡고 캄캄한 세상 가운데 오직 참 빛이 비추었으니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요3:16-17)

2000년 전 우리의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너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 한발 두발 올라가실 때, 그 십자가 위에는 내가 죄 값으로 말미암아 당해야 되는 모든 고통과 저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양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신음하며 ‘아- 내가 목마르다!’ 외칠 때 그 고통은 바로 죄 많은 내가 당해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와 같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넘치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온 저와 여러분들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고, 각종 저주와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르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들어온 저와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그는 물질의 축복도 많이 받았고, 장수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물론 영혼의 구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축복 중 가장 귀한 것 중 하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당하는 고난과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애급에 내려갔었는데 그는 거기서 큰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애급 왕 바로가 누이 동생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 그녀를 취하여 자기 아내로 삼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애급 왕 바로의 처남이 되어 수많은 양과 소와 그리고 낙타와 노비를 얻었지만 평생에 잊지 못할 쓰디 쓴 상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 사래가 애급 왕 바로에게 시집을 가고 만 것입니다. 일이 꼬여도 참 재수 없게 꼬였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애급 땅으로 내려간 실수도 있고,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 거짓말도 했지만, 어쨌든 자기 아내가 남의 아내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인 사래와 더불어 다시 동침하게 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자기 아내를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살리겠습니까? 이는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와 같은 상처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수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은 또한 그가 모진 문제로 인해 고통 할 때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에 욥이라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아 동방의 가장 큰 부자요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이 닥쳤습니다. 수많은 양과 소와 낙타와 노비 모두를 오랑캐에게 약탈을 당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 키워 논 자녀 7남 3녀가 집이 무너져 몰사 당하므로 한날에 자기 손으로 장례를 치루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입니까? 자식새끼 한 날에 모두 잃고, 졸지에 거지가 된 것도 감당하기 힘든 시련인데, 자신의 온몸이 문둥병처럼 악창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깨어진 기와 조각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자신의 몸을 북북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의 아내가 위로는 못해줄망정 독사같이 쏘아대며 말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뿐만 아니라 평소에 절친했던 3명의 친구가 문상을 와서 한다는 말이 "네가 하나님께 죄악을 범하므로 하나님이 너를 치셨다."고 율법의 독화살만 쏘아댑니다. 도대체 누가 이 욥이라는 사람을 책임지며, 누가 이 사람을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욥은 대답하여 말합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냐?”(욥42:2-3)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니이다.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요,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32:17-18) 결국 하나님은 욥의 모든 고통과 문제를 책임지고, 그 고통과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3.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께 맡기자.

고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겨야 됩니다. 아기 못 낳는 여자,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이혼을 당하고 버림을 당해야 했던 여자도 하나님은 책임져 주셨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내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또한 호세아라는 사람도 하나님은 책임을 지셨습니다. 그의 아내 고멜이 2남1여를 낳고도 외간 남자와 그만 바람을 피우고 맙니다. 이제 같이 살아야 할지, 이혼도장을 찍어야 될지, 망설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책임져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3:1)

또한 요셉이라는 청년, 보디발 장군의 아내인 아리따운 여인이 옷을 붙잡고 나와 동침하자 조를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이 요셉, 사춘기를 지나 한창 정욕이 끓어오르는 나이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결의 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음란한 세대에서 여러분의 자녀, 남편, 아내를 누가 책임져 주며, 누가 그들을 지켜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있는 그 못 말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말려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일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힘든다 할 찌라도 하나님께 맡겨 보십시오.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 과연 나 같은 죄인도 당신이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워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죄를 수없이 저질렀는데요? 만약 당신이 나의 이런 추한 모습조차도 책임질 수 있다면 나는 오늘 당신께 돌아가기 원합니다. 당신께 나의 인생을 전폭적으로 맡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다면 나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5,9)

그렇지만 하나님, 저는 아직도 계속 부족하고 연약하여 행하는 것이 죄요, 말하는 것이 남을 상처 입히는 독이요, 그래서 나도 상처입고 남들도 상처 입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럴 때는 어떡합니까?

이때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곳에 왜 오셨나요? 나의 파괴된 인생, 찢겨진 마음, 고달픈 상처를 주님이 책임지시고 치료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이곳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 주님은 두 손 벌리며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너희 염려를 다 내게 맡겨 버리라.”(벧전5:7)